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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저 Aug 22. 2024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착한 이야기의 명암(明暗)

드라마 <정신병도에도 아침이 와요> 리뷰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친절하고 상냥한 이야기다. 조명받지 못하던 약자들을 데려와 따뜻하고 다정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하지만 어쩐지 떨쳐버릴 수 없는 위화감이 있다. 지금부터 그 위화감에 대해서, 또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적어보려한다.      

 


주인공인 정다은은,


앞서 말했듯 이 이야기는 친절하고 상냥하다. 주인공 ‘정다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친절함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다. 순수한 상냥함이 아닌 것처럼.

다은은 모두가 손사래 치는 환자들에게도 단 한번의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지친 것을 잘 해소하거나 포장한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지치지 않은 것처럼.


완벽한 친절함에서 오는 위화감은 다은이 정신과 환자가 되었을 때 그 정체를 드러낸다.      


간호사
너무 안 드시면 안 돼요. 약도 드셔야 되는데.

다은
(늘 내가 하던 얘기다. 그런데 낯설다.)

간호사
먹는 걸 봐야 제가 움직일 수 있거든요?

다은
(안다. 그게 간호사의 일이니까.)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9화 중     


그 말을 들은 다은은 순순히 약을 먹는다. 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다은은 혀 아래에 숨겨놓고 삼키지 않았던 약을 뱉어 버린다. 약을 먹으면 자신이 정신병 환자라는 걸 인정하는 거니까.

그리고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다은은 같은 방에서 지내는 환자들을 훑어본다. 그들의 상태를 살피고 병명을 예상한다.


그러니까 다은은 자신과 환자를 철저하게 구분한다.      

여기서 다은의 완벽했던 친절함이 정체를 드러낸다. 다은의 친절함은 시혜적이다. 다은의 친절함은 늘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참회하기 위한 악인들


그런 다은과 대립하는 악인들은 마치 참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주인공 다은이 ‘옳은 말’을 하기 위한 배경이 되는 듯 하다. 악인들의 근거는 늘 허술하고, 주인공의 바른 말에 쉽게 설득된다. 특히 다은이 간호사로 복귀하는 에피소드에서 그렇다. 다은의 퇴사를 요구하는 보호자들의 근거는 희박하고, 그렇게 모였던 무리는 쉽게 설득되어 흩어진다.      



그럼에도 의미 있는,


앞서(오만해보일 만큼...) 이 이야기가 가진 ‘암’을 이야기했지만... 이 이야기는 이런 ‘명’을 가지고 있고, 이 부분도 꼭 작성하고 싶다. 이 착한 이야기의 ‘명’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할테니까.     


정신병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없다는 듯 취급된다. 인정하기 싫은 방어 기제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자주 다뤄지지 않아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은의 친구인 유찬은 공황장애를 앓고 있지만, 주변의 모두에게 그 사실을 숨긴다.    

       

고윤
주변 사람들한테는 왜 얘기 안 했어?

유찬
쪽팔리잖아요. 몸이 아픈 게 아니라 정신이 아픈 거니까.
내가 내 정신 하나 제대로 컨트롤 못 하는 나약한 놈으로 보이잖아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3화 중


감기로 기침이 나는 것은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고, 공황 장애로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것은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컨트롤 해야만 ‘멀쩡한’ ‘제대로된’ 사람이라 인식한다. 이런 오해가 공황장애 같은 병을 직면하지 못하게 한다.      


다은
승재 씨, 약 먹어요.
이긴다도 이겨지는 병도 아니고 버틴다고 낫는 병도 아니에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3화 중     


그런 이들에게, 이 이야기는 약을 직접적으로 권한다. 자신의 병을 마주하고 약을 복용하는 건 나약함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한편, 공황장애를 직면하지 못하는 것보다 어려운 건 ‘그 감각’이 공황장애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름 붙지 않은 실체는 존재해도 눈치채기 어렵다. 이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그 역할을 해준다.      


이런 상황은 조울증이라고 불러요.

이런 상황은 공황장애라 불러요.

이런 상황은 가스라이팅이라 불러요.

환자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정신병의 병명과 양상을 보여준다.      


이렇게 이름 붙이는 행위는 덜 외롭게 한다. 무언가에 이름이 있다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젊은 adhd의 슬픔>의 정지은 작가는 한 북토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터넷에 자신에 대한 글을 쓰면, 나와 비슷한 사람이 귀신같이 찾아온다.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외로움이 조금씩 해소된다.     


외롭지 않다면, 함께 나아갈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어찌됐든 어떻게든 이겨낼 힘이 생긴다.

나만 이런가, 생각하며 외롭게 괴로워하는 중인 모두에게 이 이야기를 추천하고 싶다.     


다은
우리는 모두 낮과 밤을 오가며 산다.
(...)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경계인들이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12화 중


우리는 모두 낮과 밤처럼 언제든 건널 수 있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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