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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집 할머니의 죽음

by Flying Pie

참 곱고 단아한 분이셨습니다. 여든이 훨씬 넘어 보이는데도 여전히 스스로 운전을 하셨고, 치매를 앓고 계신 할아버지를 혼자 돌보면서도, 늘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며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저희 집에 찾아와 도움을 청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알코올 중독이 의심되는 할아버지가 종종 술을 드시고 나면 바닥에 누워 계시다가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할머니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일으킬 수가 없으니 도와달라 청하시더군요. 술에 취해 몸을 전혀 가누지 못하는 고령의 노인을 훈련도 받지 않은 제가 일으켜 세우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로 911을 부르기도 애매해서 용기를 내어 일으켜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전에는 건물 관리인에게 연락을 해서 도움을 받았는데, 관리인도 이제 나이를 먹고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합니다. 한참을 망설이다 큰 용기를 내어 저희 집에 노크를 하고 도움을 청했을 그 마음을 생각하고 도와드렸습니다.


그 후로도 같은 일로 몇 번인가 더 도와드린 적이 있는데, 비록 서로 왕래하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동안 고마웠다며 초콜릿 박스를 선물로 주시기도 했습니다. 또 언젠가 아내가 며칠 동안 현관 옆 화분에 물을 주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흙이 다 말라 있겠거니 생각하며 가봤더니, 의외로 촉촉하게 젖어있고 화초의 상태도 나쁘지 않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앞집 할머니가 그동안 말없이 저희 화초에 물을 주고 계셨다고 해서 고마워했던 적도 있습니다.


어젯밤, 아내와 아이들이 각자 잠자리에 들고난 후, 식탁에 앉아 혼자만의 금요일 밤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한 11시 정도 되었을 때, 밖에서 뭔가 다급한 소리가 들렸는데, 바로 앞집 할아버지였습니다. 워낙 고령이시고 발음이 분명하지 못하셔서 평소에도 의사소통을 하기 힘든 분이었는데, 어제도 역시 무슨 말을 하시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플리즈 헬~프!!”란 말이 들리는 것 같아서 깜짝 놀라 바로 달려갔습니다.


도착해 보니 할아버지는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온 집안에 불을 밝혀 놓고 계속 안절부절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다가가서 무슨 일이냐 물어보니,

“우리 미치가 안 보이네. 어디에 있지? 자네가 혹시 아는가?”

고령의 할머니가 밤 11시에 치매 남편을 놓고 외출을 했을 리는 없을 텐데… 혹시 할머니의 전화번호를 아는지 물어봐도 모르시고, 예전에 얼핏 딸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딸의 연락처를 물어봐도, 짙은 술냄새에 상황에 맞지 않는 말만 무한 반복하면서 도저히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의미 없는 대화를 시도하며 집안을 찾다가 마침내 침실에서 침대 옆 바닥에 쓰러져 계신 할머니를 발견했습니다. 별다른 외상은 보이지 않았고, 의식도 있었고, 호흡도 규칙적으로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일단 911에 전화를 해서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최대한 잘 설명을 하려 했지만 도대체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이 없어서 답답했습니다.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넘어지셨는지,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낙상을 하셨는지, 상황파악이 안 되는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그 상태로 얼마나 오래 방치하셨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죠.


할아버지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반복하며 왔다 갔다 하고 계시니 혼자 놔두고 도움을 청하러 나갈 수도 없고… 자고 있던 아내를 급히 깨워 건물 아래로 가서 구급차가 도착하면 위로 안내하라고 내려보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살피며 그저 구급대가 빨리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 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는 매 순간 속이 타들어가는 듯했습니다. 신고한 지 20분이 지나 911에 다시 전화를 해서 제발 빨리 좀 오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다시 10여 분이 지나고 나니, 할머니는 이제 눈도 잘 뜨지 못하고 숨결도 가늘어지는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습니다. 아, 뭐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저는 CPR을 할 줄 모릅니다. 할 줄도 모르면서 하다가 할머니 상태를 악화시키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그리고 그 와중에도 혹시 잘못돼서 나중에 내가 책임을 물게 되면 어쩌지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두려움에, 저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원과도 같은 10분이 더 지나고 마침내 처음 신고 전화를 한 지 40여 분만에 구급대가 도착을 했습니다. 심각한 상황을 인지한 그들이 부랴부랴 추가 인력까지 불러서 열심히 노려했지만…


결국 할머니는 영영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관계자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니 계속 현장에 있을 수는 없었고, 구급대의 리더인 듯 한 사람과 간단한 인터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는 할아버지와 좀 있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온 딸인 듯 보이는 사람의 흐느끼는 모습을 현관문 외시경으로 지켜보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오늘도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힘겹게 숨을 이어가고 있던 할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가슴이 아립니다. 노인만 두 분이 살고 계셨는데 비상시에 연락해 줄 가족의 번호라도 알아둘 걸 하는 후회가 듭니다. 병원이 지척인데 911 구급대가 40여 분이나 걸려서 도착을 한 사실도 너무 화가 납니다.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서 가슴 압박이라도 했어야 했을까? 그랬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하는 이제 와서 아무 소용도 없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할아버지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할머니가 없으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으실 텐데...


황망하게 돌아가신

미치 할머니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제 홀로 남은 가여운 할아버지와,

뒤늦게 달려와 흐느끼던 그 따님과,

남은 다른 가족들에게도

마음을 담아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 한동안 마음이 힘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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