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캐나다 토론토의 어느 사범대학 입시 면접장, 바짝 긴장해서 덜덜 떨고 있는 어느 한국계 지원자가 있다. 읽기도 힘든 이상한 외국 이름을 가진 이 남성 지원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도 어렵다. 그의 캐나다 교육에 대한 대책 없는 무지와, 형편없는 영어 실력에 슬슬 짜증이 나던 면접관은, 계속되는 그의 헛소리를 들어주기 힘들어 급기야 한숨을 내뱉는다.
"후우, 잠깐만! 이봐요, 당신 뭔가 잘 못 알고 있어. 우리 주에 그 제도가 있는 이유는... 중략... 아시겠어요? 암튼 수고했습니다. 가셔도 좋습니다."
일 년의 재수 끝에 겨우 런던(캐나다)에 있는 사범대에 문 닫고 들어간 이 남자는 2006년 가을, 마침 교사가 부족해 캐나다까지 교사를 모집하러 온 뉴욕시 교육청이 주관하는 교사 취업 설명회에 참가하게 된다. 과학과 수학 교사를 주로 뽑겠다 하니 혹시 일말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오는 미란다를 연상케 하는 여성 면접관, 이제 갓 사범대에 들어가 천지분간 못하는 남자의 말을 끊고 한숨을 쉰다. 두 해 전, 사범대 면접장에서 들었던 바로 그 한숨. 훗날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서 아픈 관식이가 병원에서 분노했던 그 한숨에 남자는 또다시 얼굴이 벌게진 채 한없이 작아진다.
"휴우, 미안하지만 당신은 뉴욕에서 교사를 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어요. 그리고 너무 물렁물렁해 보입니다. 뉴욕 공립학교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 줄 알아요? 당신처럼 부드럽게 굴었다간 그 애들에게 산채로 잡아먹힐 거라고요!"
탈락을 직감한 남자는 엉거주춤 일어날 준비를 하는데, 그 면접관 옆에 앉은 다른 면접관이 끼어든다.
"잠깐만! 그래도 이 친구, 과학과 수학을 전공해서 가르칠 수 있다잖아. 우리 할당량 채우려면 아직 한참 더 찾아야 하는데..."
잠시 고민하던 미란다 씨,
"하아, 이봐요. 잘 들어요. 내가 일단은 합격시켜 줄게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교육청 차원에서 채용을 하겠다는 것이고, 당신은 내년 여름에 뉴욕에 와서 각 학교별 교장과 면접을 보고, 당신을 원하는 교장이 있을 때 비로소 뉴욕에서 일할 수 있는 겁니다. 알겠죠?"
"근데 아무도 저를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럼 당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뉴욕시 내에서 교사 인력이 필요한 학교에 보내지게 될 겁니다."
설마 한 군데는 되겠지. 기다려 뉴욕! 내년에 간다!
이듬해인 2007년, 힘겹게 사범대를 마친 이 남자, 여름 내내 14시간씩 기차와 버스를 타고 뉴욕에 두 번이나 가서 수없이 많은 인터뷰를 보았다.
맨해튼의 나름 알려진 근사한 학교들뿐 아니라, 할렘이나 브롱스의 거친 동네에 있는, 경찰이 상주하고 학교 입구에서 금속 탐지기를 통과해야 하는 무서운 분위기의 학교 면접도 마다 하지 않았지만, 그를 원하는 교장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 면접을 끝으로 다 포기하고 그레이 하운드를 타고 캐나다로 돌아오는 데, 국경을 넘자마자 눈에 보이는 Tim Horton's 간판에 마치 고향이라도 돌아온 듯 눈시울이 젖어든다.
과외 선생과 학원 강사로 떠돌던 2008년, 마침에 이 남자의 쥐구멍에도 작은 볕이 든다. 캐나다의 동쪽 끝 바닷가 작고 아름다운 도시 핼리팩스에, 비록 50% 파트타임 1년 계약직이지만, 160년 전통의 지역 최고의 명문인 한 가톨릭 사립 여학교에 덜컥 취업을 하게 된다. 만세!
새 학기 시작 후 한 달, 교장선생님이 보자 한다. 무슨 일일까? 떨리는 마음으로 가보니 학부모들의 민원이 쏟아진단다.
"새로 오신 남자 선생님이 아이들 통제를 전혀 못해요. 그래서 우리 아이가 도저히 그 반에서는 공부를 못하겠다고 하니, 다른 선생님 반으로 바꿔주세요."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얼굴색을 감출 수도 없으니 더 부끄럽다.
"걱정 마세요, 우리는 이런 이유로 반을 바꿔주지 않습니다. 신 선생님 우리 학교 와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하시는 거 알아요. 괜찮으시면 내가 수업 참관을 한번 해보고 싶은데, 언제가 좋겠어요?"
몇 번의 교장 참관 수업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신 선생, 은퇴를 앞두신 인자한 할머니 같은 교장선생님의 따뜻한 피드백에 눈물이 난다. 지적하고 고쳐주려고 참관하신 게 아니라,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하신 거란 걸 나중에야 알았다.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대륙의 반대편 끝 BC주 밴쿠버의 어느 남학교에서 오래 근무하며, 이제 어느덧 베테랑 소리도 듣게 된 이 남자. 2025년 새 학기를 앞둔 9월 초, 전 교직원 회의에서 새로 채용된 직원들을 소개하는 데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아, 5년 전 졸업했던 제자 데릭이 EA (보조교사)가 되어 학교로 돌아왔구나!’
학생부 디렉터가 그를 소개하며,
"자, 다음은 우리 학교 출신 데릭을 소개합니다. 이 친구 기억하는 분들 많으시죠? 데릭은 고등학교 시절, 우리 미스터 신의 학생이었는데, 지원서에 한 가지 일화를 언급하며 자기도 '미스터 신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이렇게 보조 교사에 지원'하게 되었답니다."
동료들의 박수와 그를 향한 환한 미소에 부끄러워 숨고 싶지만 그의 마음은 어느새 하늘을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