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계를 살 게 아니라 치아교정을 해야 했다

2부 - 일상에서의 실패

by 박기주

2010년 여름, 아이패드 1세대 제품을 처음 손에 넣던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스티브 잡스가 처음 공개하던 순간부터 손에 쥐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애플 제품이 미국보다 한참 늦게 출시되던 시절이라 구하기 어려웠다. 전자제품 직구도 활성화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다 운 좋게 싱가포르 출장 갈 일이 생겼는데, 한국보다 먼저 출시한 곳인지라 짬을 내 겨우 사게 된 것이다.


그 무더운 날, 두꺼운 아이패드 박스를 받아 들었을 때의 짜릿함은 잊을 수 없다. 호텔에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매장을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벤치에 앉아 패키지를 뜯고 기기를 만지작거리며 행복에 겨워했다.


아이패드의 첫 번째 모델은 요즘 제품보다 50%는 더 무겁고, 장편소설책 두께만 한 베젤이 사면에 둘러쳐진 디자인이었지만 그때 내게는 마법의 도구에 다름 아니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하루 종일 들고 다니며 밤이면 베개를 나란히 베고 잘 정도였다.


그 아이패드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10년도 더 전에 누군가에게 그냥 줬는데, 그 사람도 아마 버린 지 오래일 것이다. 혹시 아직 살아 있어 전원이 켜진다 해도, OS도 앱도 모두 구형이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c7d2e87b4386e4e10fe764e60816edc4.jpg 당시 찍은 아이패드 1세대 사진 - 다 찌그러진 후면 사진만이 남아있다


그게 내 마지막 아이패드는 아니었다. 2~3년에 한 번 꼴로 새 모델을 샀다. 살 때마다 애플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혁신에 감탄했고 한동안 설레했다. 하지만 그 모든 아이패드들 역시 지금은 수중에 없다. 어떤 건 주고, 어떤 건 팔고, 어떤 건 너무 망가져 버려 버렸다.


아이패드뿐이겠는가? 노트북도 그렇고, 핸드폰도 시티폰 시절부터 대체 몇 개를 사서 몇 개를 버렸는지 손가락을 꼽아봐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화폐의 시간가치를 따지지 않더라도 이런 IT 기기에 쓴 돈이 수 천만 원은 족히 되고도 남을 것이다.


돈보다 더 아까운 것은 시간이다. 이런 고가의 물품을 살 때마다 살지 말지 판단하고 브랜드와 모델을 결정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고, 구입한 다음에도 액정 보호 필름과 케이스와 키보드와 스타일러스펜을 사고 성능을 시험해 본다고 여러 프로그램이나 앱을 깔았다. 보상 보험 가입, 액정 수리, 중고판매도 노력을 많이 잡아먹는 일이었다. 그렇게 쓴 시간을 모으면 수천 시간이 넘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내가 가진 자원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돈과 시간 – 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자원들로 교환하는 가치의 크기가 꼭 돈, 시간과 비례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똑같은 돈을 주고 산 물건의 가치가 동일하지 않다.

똑같은 시간을 부어 넣은 경험의 가치가 같은 기간 동안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면 나같이 가지고 있는 자원의 총량이 많지 않은 사람은

정말 치밀하게 계산을 하여 가치가 큰 것에, 가치가 오래갈 수 있는 곳에 돈과 시간을 써야 했다.


아이패드, 노트북, 핸드폰, 그리고 그 외에 수많은 물건들과 경험들. 지금 돌아보면 그중 절반, 아니 80%는 없었어도 아무 문제없던 것이었다.


구입한 당시에는 물론 행복했다. 즐거웠다.

하지만 그게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과 다른 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그 돈과 시간으로 지속적으로, 가능하다면 영속적으로 가치를 남길만한 것들에 투자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주식투자나 부동산처럼 미래를 알 수 없는 투자는 이제 와서 가치가 상승한 결과만 보고 말하는 거니까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소비 시점에서 가치의 크기와 효용 기간이 확실한 것에 투자해야 했다는 말이다.




난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인데, 그중 하나는 덧니다.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리게 되고, 사진 찍을 때 입을 다물게 된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교정하려니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너무 늦었다. 잇몸이 내려앉고 있기도 하고, 치아 교정기를 끼고 주간 업무 보고 미팅에 참석하는 것은 사장님으로부터 "치아 교정 전에 판매부터 교정해라"라 말과 함께 다른 참석자들의 비웃음을 사기 딱 좋은 일이다.

vecteezy_close-up-shot-of-girl-having-fun-giggling-covering-mouth_49921784.jpg Image from Vecteezy.com. No attribution required


대학생 때야 돈이 없어 못 했다 쳐도, 사회 초년생 때는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왜 하지 않았을까.

이제와 돌아보면, 당시로서는 더 중요하다 생각했던 다른 많은 것에 돈과 시간을 잘못 썼기 때문이다.


오래전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 손목시계를 산 적이 있다. 지금은 천만 원 넘는 시계도 흔하지만, 당시 내게는 정말 큰 소비였다.

시계 공부를 하느라 꽤 오랜 시간을 들였고, 여러 매장을 돌아다니며 시착을 거듭하다 몇 달 치 월급을 들여 산 시계였건만, 그 시계를 차고 수천 명을 만나는 동안 “오, OOO 시계 차셨네요”, "시계 참 예쁘네요"라며 알아봐 준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대부분은 내 손목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자기만족을 위한 소비'라고 위안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vecteezy_watches-and-cufflinks-with-classic-design-and-luxurious_48639987.jpg Image from VEcteezy.com. No attribution required. 이 시계를 샀다는 건 아니다.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고가 시계를 살 돈으로 치아교정을 했야 했다.

어차피 1년이면 구형이 될 신형 스마트폰을 사지 않고 악기를 배우거나

게임을 파고들며 연구를 할 시간에 제2 외국어 공부를 해야 했다.

무엇을 하든 지금까지 남아서 나에게 증분 가치를 가져다줄 것들에 투자를 해야 했다.




시간과 돈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자,

한 번 쓰면 되돌릴 수 없는 소모품이다.


그 중요한 자원의 교환가치를 똑똑하게 계산하지 못하고

순간순간의 즐거움에 우선순위를 두어 잘못된 선택을 쌓아온 것,

이것이 내가 실패한 일곱 번째 이유다.


난 오늘도 회사에서, 그 비싼 손목시계를 찬 손으로 덧니를 가리고 있다.

keyword
이전 08화단점은 입사 첫 해에 바로 잡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