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도 아닌데 나는 손을 씻고 212
죄인도 아닌데 나는 손을 씻고
그는 수돗가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노모랑 앉아 있다.
“아저씨 이사 가먼 아저씨 텃밭에 배추 심을라요.”
“욕심도 많아. 농사도 못 지으면서.”
“아저씨 이사 가먼 심는다고요. 어차피 이사 가먼 김장 못 허잖아요.”
“이사 가든 안 가든 내가 배추 심을 거예요”
“아니, 내 밭은 호두나무와 막사 그늘 때문에 뭘 심어도 자라지 않으니까. 글고 내가 욕심 많으먼 친구들이 나 먹으라고 귀하다고 가져온 거 할머니 드리라고 주고, 아저씨네 고양이 사료와 병원비 내 돈으로 사주겄소. 살다가 별말을 다 듣네.”
그에게 맺힌 것 많아 추접스럽고 유치했지만 막 쏟아냈다. 성길씨는 맞는 말이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와 말하기 싫어 집으로 들어왔다. 하루에 열 번도 드나드는 마당에 나가지 않았다.
에어컨을 켜고 싶어도 참았다. 에어컨을 켜면 성길씨는 즉각 마당에 서서 ‘계량기 날아가요’ 어쩔 수 없이 방문을 열어놓고 도 닦았다.
새벽이다. 담배 연기가 창문 틈으로 들어왔다. 창문 밖을 내다봤다, 성길씨가 텃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다. 새벽부터 뭔 일일까.
그가 앉은자리를 보는데 상추가 흔적도 없어졌다. 나도 모르게 ‘야호’ 손바닥을 쳤다. 유리잔으로 참기름 한 컵은 먹은 거 같았다.
얼마 전 그는 상추를 모종 했다. 상추 모종이 다 말라죽은 것이다.
나보고 농사지을 줄 모른다고 면박을 주더니만.
‘사람도 타 죽게 생겄는디 그 어린것이 버티겄냐고 이 사람아.’
성길씨는 모종을 또 사 들고 왔다, 성길씨는 밭에 풀도 뽑았다.
‘이사 간다는 것이여, 안 간다는 것이여.’
그는 밭에서 나왔다. 바지를 달달 걷어올리고 단풍나무 아래 앉아 부채질했다. 나를 불렀다.
“덥죠? 우리 집 좌변기 교체했어요.”
‘뭔 생뚱맞은 소리여.’
“얼마나 좋은 줄 알아요?”
‘내 보증금도 안 주고 이사 간다고 속을 뒤집더니.’
“한번 봐볼래요?”
“아무리 구경할 거 없다고 변기 구경이래요. 됐어요.”
‘허다허다 변기통을 다 보라고 헐까. 뒤샹의 변기도 아니고.’
“얼마나 비싼 건데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일어나 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며칠 전 빈집에서 뜯어왔어요.”
“무슨 말이에요?”
“우리 마을에서 제일 부잣집이 어디인 줄 알아요?”
“저그 위에 일본 집처럼 생긴 마당 겁나게 넓은 집이요. 그 집 사람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사람이에요.”
“누구 집 인디요.”
“우리나라 ㅇㅇ 신발 집 아들 집이에요.”
“진짜요?”
“거기서 뜯어왔죠.”
“아저씨, 혼자 뜯어왔소?”
“그거는 묻지 말고.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쪽 거보다 더 좋아요. 물을 내리면 변기 안을 몇 번이나 싹 훑고 내려가는지, 한번 봐봐요?”
궁금했다. 금 변기인가! 그렇게 부잣집 변기라면 틀림없이 다를 것이다
“그래 가봐요.”
성길씨는 화장실 문 옆에 서서 팔짱을 껴안고 입과 턱을 내밀었다. 문을 열어보라는 뜻이었다. 나는 보물이라도 보려는 듯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옴매' 깜짝 놀랐다.
할머니가 변기에서 일어나며 바지를 올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멋쩍은 듯 웃었다. 나도 민망해서 웃었다. 노모가 발을 떼자 변기가 보였다. 하얀 변기였다. 금색이 아니라. 아무 곳에서 볼 수 있는 변기였다. 내 집 변기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나 참 기가 막혀서 변기통 구경 허겄다고 한 내가 미쳤지.’
“좋죠?”
“겁나게 좋소.”
집에 들어와서 날짜 지난 신문을 뒤적거리는데 왜 이리 울적하지. 동네가 빈집이 많아 오토바이 기름값도 안 나온다고 얼마 전 신문도 끊겼다. 그건 이미 마음을 달랬고.
성길씨 변기 자랑하는 게 눈에 자꾸 떠오른다.
‘그럼 성길씨가 쓰던 변기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었다는 말인가.’
상추 타 죽었다고 불나도록 손바닥을 친 내가 참 못나 보였다. 죄인 손 씻는다는 차원은 아니지만, 욕실에 가서 손을 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