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같은 날 219
밤 같은 날
그가 단풍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밤껍데기를 까고 있다.
“아저씨, 지붕 올라가 물 샐 때 막어야 할 곳 갈케 주세요.”
“시이끄으러어워어요. 소오옥 시이끄으러어우운데에.”
그는 내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소리를 질렀다. 아니, 악썼다.
나는 수돗가에 서서 멈칫했다. 그사이 술 취한 풀치가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아저씨, 이사 갈 때까지 소리 지를라요?”
성길씨는 불안하고 자기 맘대로 안될 때 말을 더듬는다. 최근에 심해졌다. 성길씨는 시멘트 바닥으로 내려가 앉았다. 풀치는 그 옆에 주저앉아 대추를 꺼내며 말했다.
“누님, 벌레 안 먹은 걸로 골라보세요.”
“너나 먹으세요.”
“너어도 가아고오 여어지입도 가아요. 지이이그음 내에가아아 소옥이 소옥이 아아니이에요.”
말을 더듬거리는 그가 답답했다. 한편으로 이사 갈 날을 받아 놓은 성길씨가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나에게 계속 퍼부어 성질났다. 그가 더듬거리며 퍼붓는 말을 옮기고자 했지만, 읽는 사람이 짜증 날까 봐 못 쓰겠다. 패스. 나는 듣다 한마디 했다.
“아저씨, 혹시 생리 허요?”
“머어라고오요?”
그는 벌떡 일어났다.
풀치는 웃다가 성길씨 얼굴과 딱 마주쳤다. 웃음을 삼키며 재빨리 일어나 마당 입구로 갔다. 풀치는 나 대신 성길씨 아디다스 짝퉁 슬리퍼로 얻어 터지 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저씨, 그렇잖어요. 썽질 낼 일도 아닌디 악쓰고, 아저씨 이사 가먼 겁나게 좋은 이 집, 세상에 둘도 없는 집, 물 새먼 내가 지붕 올라가서 고쳐야 하는디, 당연히 물 새 껄 뻔헌디, 시간 있을 때 갈케 주라는 것이 그리 잘못했소? 내가 말 허기 전에 알려 줘야지, 안 그러요?”.
풀치는 고개를 끄떡거렸다. 곧 쥐어 터지겠다.
“어얼래에 이이러언 지이집이인 주우울 아알아았으으며언서.”
“그래서 그동안 내가 집에 대해 한마디 했어요.”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섰다 반복했다.
“내 돈 들여 화장실 고치고 집구석구석 고쳤을 때 아저씨헌테 돈 달라고 헌 적 있어요. 수도관 낡어 터져 수도세 70만 원 나왔을 때 아저씨 나 몰라라, 내가 사방으로 알아봐서 고쳐잖아요. 다행히 시청에서 수도세 할인해 줘 12만 원 낼 때 꼴랑 2만 원 보태고, 누수 고칠 때 백만 원 나온다고 허니까 이십만 원 보탠다고, 내가 여태 천장에 물 샌다고 해서 월세 안주다고 헌 적 있어요?. 이거는 절대 말 안 허려 했는디, 아무리 집주인이지만 어쭈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전기장판 코드를 뽑는다요. 아저씨도 알고 있죠? 내가 그날 대한민국이 다 아는 비밀번호 바꾼 것.”
성길씨는 반박하고자 했다. 하지만 입술이 말을 안 들어 손만 허공을 저었다. 나도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풀치는 그런 일이 있었구나, 표정으로 나를 동조하는 눈빛을 날렸다.
“나는 상황이 어쩔 수 없으먼 떼 안 써요.”
“이이사 가아아알 사아람하안테 그으러어니이까, 그으리고오 지이그음 다앙자앙 가아느은 거엇도오 아아니이고오.”
“아저씨, 첨 썽질 낸다는 거예요? 끄떡 허먼 악쓰고 자기 화난 것 못 삭이고, 만만헌 술고래나 나헌테 풀고, 뒷방 할매 있을 때 맨날 욕 해대고, 지금 뒷방 할매에게 하던 짓을 나한테 똑같이 허잔허요.”
“지이붕웅에 오올라아 가아라고 하아니이까 여얼 받잔아요오.”
“그러니까, 내가 아저씨 각시요, 여동생이냐고요? 본인 일을 혼자 못 삭이고 나헌테 풀게. 나도 이사 가기 싫어 손에 일이 안 잡히는디. 글고 같이 오래 살자 해놓고 혼자 갑자기 가먼서. 내가 그동안 참은 것은 날마다 얼굴 봐야 해 참았는디. 이사 가는 날도 얼마 남지 않어 어지간허면 참을라고 했어요. 가는 날까지 월세 받고 인색허기는 짝이 없고, 꽃돌이도 아저씨 고양인디 나 몰라 허고, 나 혼저 입양처 알어 봐 비 오는 날 성남까지 데려다주고 왔는디, 고맙다는 말 한 번 안 허고.”
나는 소리 지르면서 우리 집 귀퉁이까지 왔다. 계속 원자폭탄 투하했다. 시원했다. 그는 살며시 의자에 앉았다.
‘그래 오늘 다하자’ 안 할 말까지 쏟아냈다. 자존심 내동댕이쳤다.
“내 친구들 올 때는 나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동생들이나 친구들 뜸 허면 나헌테 술 마시자고 허고.”
‘나 좋아헌다 말이여, 어쩌자는 것이여. 헷갈리게 허고 말이여.’
“그으게 아아니이고.”
“아니기는 뭐가 아니요.”
그의 말을 낫으로 무 자르듯 잘랐다. 풀치는 쪼그리고 앉아 눈을 굴렸다. 성길씨가 풀치를 향해 슬리퍼를 던졌다. 나는 붉은 대추를 집어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새벽 지붕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살금살금 밖에 나갔다. 지붕에 사다리가 받쳐져 있다. 그는 비닐을 펼쳐 돌로 눌러놓고 있었다. 돌을 주우러 사다리 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를 보다가 돌덩이를 주워 지붕에 올려놓았다.
뒷심이 부족한 걸까, 나 혼자 두고 가는 게 걱정된 걸까. 나 같으면 하루라도 지나고 지붕 위에 올라갈 텐데. 소심하기는.
어제 오전에 아저씨에게 월세를 보냈다. 성길씨와 내 차로 소주 사러 내리 나흘 동안 편의점에 갔다 왔었다. 그는 기름값 주는 대신 월세에서 제하라고 했다. 택시를 부르면 들리는 곳마다 택시비를 줘야 한다. 나를 전용기사로 부린 셈이다. 이사 가기 싫어하는 그의 마음을 알아 군소리 없이 갔다.
그는 술 사러 다닐 때는 몰랐다가 기름값 깐 게 아까웠는지 날짜가 맞는지 확인하자고 했다. 달력에 기재한 것을 보여 줬다. 우리 집 안팎을 잘 아는 미선이가 날짜를 꼭 체크해놓으라고 했었다. 하루에 두 번 갈 때도 있었다.
성길씨는 내가 달력을 보여주면서 한 번은 서비스해 줬다고 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갔다.
혹시 돈 아까워 저리 화를 낸 것일까.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