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니아 떠난 자리에 물을 준다 223
아로니아 떠난 자리에 물을 준다
그는 떠났다.
그동안 새벽에 들어올 때 성길씨 집에 불이 꺼져 있어도 오싹하지 않았다.
요즈음 볼 일 있어 나갈 때 불이란 불은 다 켜놓고 나간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차에서 주위를 살피고 내린다.
오늘 저녁때 번호키 뚜껑이 올려져 있었다. 당황하여 선뜻 문을 열지 못하고 꽃님이를 불렀다. 집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발을 먼저 들려놓았다. 꽃님이가 나를 보고 귀를 세우며 일어났다.
성길씨는 이사 간다고 나에게 통보한 날부터 날마다 술을 마셨다. 그는 삐비 껍닥처럼 말라 주민들이 암 걸려 죽게 생겼다고 했다.
나는 깜깜한 마당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저씨, 곧 갈 것 같아요.”
“정말요?”
그는 죽는 게 무서웠는가 보다. 밤중에 나에게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했다. 그는 병원에 가기 전 화장실 간다고 길 건너 파밭으로 갔다. 한참 동안 구역질 소리가 났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앉아서 오줌을 싸고 있었다. 모든 게 불안해서 오는 행동이었다. 병원에서 이상 없다고 했다. 그 순간 얼굴이 펴졌다.
집 들어오는 개천가에 펜스가 쳐있다. 우리는 펜스를 보고도 모른 척했다. LH 이가 쳐 놓은 것이다. 펜스에 대해 나나 성길씨나 입에 올리리 않았다. 이제는 인정할 때도 됐는데 입에 올리는 순간 이사 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성길씨는 이사 간다고 했다가 안 간다고 했다가 몇 번이나 번복했다. 충분히 이해했다. 나도 이렇게 이사 가기 싫은데 그는 오죽할까. 나도 불안하고 어수선해 봄, 여름 이곳저곳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여름 끝물 어슴푸레한 저녁때이었다. 성길씨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마당에 서 있는 나에게 말했다.
“여옆집 이이사 가아지 마아세에요.”
“왜요?”
“나아 이이사 아안 가아고 끄으끝까아지 사알라고오요. 여어기서 태어어나아고 여어기서 이이 나이까아지 사알아느은데에 내에가아 에왜 이이사아를 가아야해에요.”
“아저씨. 더는 이사 가니 마니 번복하면 안 돼요.”
“나아르를 모오옷미더요? 나아는 수울 아안마아시인다면 아안 마아시잔아요.”
“약속, 손가락 걸었어요.”
그는 김장배추와 무 모종을 했다. 나도 배추, 무, 적 갓 성길씨 와 약속도 심었다.
성길씨 와 나는 주민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오르막 길을 내려갈 때마다 불안했다. 서로 못 본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길씨는 진창 술을 마시고 이사 간다고 통보했다. 그러니까 나 혼자 약속을 심었다. 배추와 무는 나보고 뽑아 김장하라고 했다.
그랬던 그, 이사 가서 먹는다고 배춧속까지 새파란 배추를 잘라 소금에 절였다. 황당했다.
이사 간 날 아침 7시에 트럭 두 대가 도착했다. 날마다 짐을 버리고 태워 이삿짐은 단출했다.
성길씨 여동생이 연탄창고를 들여다보면서 삽, 쇠스랑, 곡괭이를 가져 자가고 했다. 농기구는 옆집 거라고 그가 말했다. 농기구는 성길씨 거다. 그는 막상 떠나려고 하니 나에게 뭐라도 주고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며칠 전 말다툼했던 것을 후회했다. 이삿짐을 나르려 성길씨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 갈 때 싣고 간다고 장만한 소파에 노모가 앉아 있었다. 노모 옆에 가서 앉았다. 노모는 “그동안 고마웠어” 나를 안아주면서 말했다. 울컥해 밖으로 나왔다.
이삿짐 싣는 동안 나와 성길씨는 단풍나무 아래 수돗가에서 수도세와 전기세를 계산했다. 그는 쪼그리고 앉아있다 일어나 천둥을 쳤다. 떠나는
마당이라 나는 입을 꾹 눌렀다.
그는 시청 수도과와 한전에 전화했다. 흥분해 말을 더듬거렸다. 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에게 이삿짐 정리하고 다시 와서 계산하겠다고 했다.
“우리 집 잘 부탁해요.”
'방금 화낸 사람 맞어.'
그는 집에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주면서 트럭에 탔다. 그의 몸인 집, 어차피 다 헐릴 것인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아저씨, 심심하고 답답하며 할머니 모시고 놀러 와요.”
할머니에게 인사하러 노모가 탄 트럭으로 옆으로 갔다. 차는 나를 못 보고 출발해 버렸다.
트럭 꽁무니를 보다 눈물이 터졌다.
주인은 이사 가고 세 든 사람이 남아 빈집을 지키고 있다.
그는 나랑 끝까지 같이 살자고 해놓고 가버렸다. 남자 말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시 한번 머릿속에 각인했다.
번호키 배꼽을 누르고 문고리를 걸었다. 그가 이사 가기 직전 볼펜으로 점을 찍으며 한 시간 걸려 문고리를 달아주었다. 나는 문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이사 가기 싫어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 태우던 모습이 벌써 눈에 선하다.
그는 나 없는 사이 밭에 서 있는 애지중지하던 아로니아를 베어버렸다. 상추 자랄 때 나 불편하다고. 봄이면 아로니아꽃이 하얗게 피었었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아로니아 등걸에 조리개로 물을 준다. 성길씨와 노모와 이곳의 선명한 기억과 함께 봄마다 하얗게 꽃이 피길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