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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품들의 사계

새파란 대파 끝, 어디를 향해225

by 불량품들의 사계

새파란 대파 끝, 어디를 향해



대파 모종을 하고 있었다. 하필 그때 안전화를 신은 사내가 다가와 명함을 건넸다.

철거담당자였다.

뒷집 아저씨가 아침에 검정 비닐봉지에 대파 모종을 가져왔다. 나는 심어도 되나 잠깐 고민했다. LH에서 집을 비우라고 종용하기 때문이었다. 이사 간 주민들도 봄부터 자기 땅이었던 곳에 작물을 재배했다.

나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다 들킨 것처럼 눈을 깔고 모종을 내려다보았다. 감꽃 옆 안전화도 모종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살고 있는디도 부수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사람을 앞에 두고 부수겠다는 말을 차마 못 하겠다는 것 같기도 했다.

대파를 심는다는 것은 뿌리를 내릴 때까지 한 계절을 살아내겠다는 뜻이다. 아니, 올겨울을 이 집에서 보내겠다는 속내를 저기 햇빛아래 망초도 날아가는 새도 다 안다.

수 대째 살아온 뿌리를 통째로 뽑겠다는 최후의 통첩을 받았었다. 나무뿌리들은 파란 하늘을 향해 있다. 주민들 이삿짐을 싣고 언덕을 내려가는 트럭 뒤꽁무니를 몇 년째 보고 있다.

밭 가에 서 있는 사내를 올려다보는데 나는 무슨 큰 죄 졌기에 가슴은 이리 뛰고 손은 둘 곳이 없을까.

사내와 나의 간격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다.

그는 돈을 받고 일하는 자,

나는 갈 곳 없어 버티는 자,

서로 미워하거나 증오할 수 없는 일이다.

머뭇거리고 서 있는 그의 고향을 물었다.

“남원입니다.”

“아따, 나랑 같으네요.”

나는 남쪽 신안 섬이고 그는 북도다.

“차로 가면 금방, 요새는 다 이웃이 지라?”

“아. 예.”

한 발짝 물러선 그에게 다시 말했다.

“점심 먹고 가세요.”

사내는 손을 저었다. 감꽃을 밟으며 마당을 피하듯 벗어났다.

나는 일어나서 배웅했다. 그의 명함을 핸드폰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큰길 옆 개망초 무성한 묵은 밭에 공고판이 세워져 있다.

-농사지어 이득을 보며 벌금을 물립니다.

폐허다. 아침 일찍 탱크보다 큰 포클레인이 날마다 집을 부수어 철근과 시멘트가 얽혀있다. 나무이파리가 오그라든다. 폭격기가 휩쓸고 간 자리 같다. 일요일도 없는 전쟁터, 우크라이나, 가자지구가 생각난다. 그나마 이곳은 주말에는 포클레인이 오지 않는다.


서리를 뒤집어쓰고 새파란 칼날 같은 대파 끝이 허공을 향해 있다. 올여름 얼마나 더웠던가. 모종에 물을 주던 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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