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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지 May 01. 2023

[지난 녹지 새로 읽기] 채무감과 이상의 결여

녹지 21번째(1988) 수록

다시 읽기


벌써 일 년도 더 지난 일이건만 생각날 때마다 생생하게 불쾌한 사건이 있다.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고 기억된다. 나는 베란다를 청소하려고 큰 양동이에 물을 받으면서 한 바가지씩 떠서 타일 바닥에 끼얹고 있었다. 그때 둘둘 말려 있던 호오스가 수도물의 압력에 못 이겨 꿈틀 풀리면서 물줄기가 양동이를 벗어나 공중으로 분수처럼 솟구쳤다. 수도꼭지를 너무 세게 틀어놓은 내 잘못이었다. 나는 얼른 수도를 잠그면서도 그동안에 베란다 밖으로 튕긴 물방울이 혹시 지나가던 행인의 옷이라도 적신 게 아닐까 겁이 더럭 났다. 아니나 다를까,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출, 파출⋯” 나는 처음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려니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분명히 나를 험악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청바지에 방수천의 빨간 파카를 입은 그 여자는 처녀처럼 해맑고 앳돼 보였지만 백일 전후의 예쁜 아기를 안고 있었다. 나의 잘못으로 튀긴 물방울이 그 여자의 파카에 송알송알 이슬처럼 맺혀있는 게 내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밝은 봄날에 잘 어울리는 그 여자에게 나는 웃으면서 사과의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험악한 시선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고 입에선 더 지독한 소리가 나왔다.


“파출, 눈은 얻다 뒀길래 일을 그따위로 해요, 아이 기분 나빠.”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발을 한번 꽝 구르고 가버렸다. 우리 막내딸 정도의 나이밖에 안 되는 여자였다. 허술한 옷차림으로 베란다 청소를 하는 늙수그레한 여자를 파출부로 본 그 여자를 나무랠 마음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파출부라 해도 즈이 어머니 나이는 됨직한 어른에게 ‘파출’이 뭔가. 그냥 아주머니나 할머니라 해도 그만이고 흔한 말로 ‘파출부 아줌마’라고 해도 좋았을 것을.


내가 그 얘기를 내 친구에게 했더니 친구는 눈깔이라고 안 했으니 그 정도면 약과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 내가 충격을 받은 건 그녀의 고약한 말버릇이나 모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앳된 여자의 노동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에 대한 그 너무도 당돌한 우월감과 몰인정은 충격적이다 못해 섬짓할 지경이었다. 그 여자가 내 딸 또래여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내 딸이 저럴 수도 있으리라는 우리 집 가정교육에 대한 반성과 함께 우리나라의 고등 교육 전반에 걸친 회의가 뒤따르는 것 또한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여자를 그 고약한 말버릇에도 불구하고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여자로 단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젊은 나이에 지금 내가 사는 아파트(중형이상) 단지 정도에 살면 시집을 괜찮게 간 축에 들 테고, 요즈음 세상에 시집을 괜찮게 가기 위해서 대학간판은 필수적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추리에 근거하고 있었다. 또 그 여자의 교만한 태도, 육체노동 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몸에 밴 능숙한 하대(下待) 등도 그 여자가 경제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엉석받이로 자라왔으리라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했다.


잠깐 스쳐 지나간 여자를 너무 집요하게 짓씹는 것 같지만 결코 나의 개인적인 분풀이를 위해서 이러는 건 아니다. 바로 그 여자에게서 고등교육을 받고 남편을 잘 만나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요즈음 젊은 새댁의 전형을 본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이웃의 젊은 엄마들과 얘기를 해보거나, 그들끼리 서로 주고받는 얘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아이들의 학교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어디로 이사 가고 싶다거나 이 동네는 틀려먹었다는 희망이나 불만도 거의 학군과 관계가 있다.


내가 알기로는 명문대학에서 대학원과정까지 마친 어느 인테리주부가 앞으로 몇 년은 더 우리 동네에 살아도 될 것 같다고 안심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까닭은 전에는 형편없던 국민학교가 요샌 모든 여건이 좋아졌으니 아이들이 중학교 가기 전까지는 이 동네에 살아도 무방하다는 얘기였다. 그 좋아진 여건이라는 게 시설이나 환경, 훌륭한 선생님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불량주택이 밀리고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가난한 아이들이 없어졌다는 거였다. 자기 자식이 가난한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는 걸 나쁜 환경이라 여기고 어떻게 하든지 부자동네로만 골라서 이사를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다니, 가난이 무슨 몹쓸 전영병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생각이 대부분의 교양있고 유복한 젊은 엄마들의 공통의 생각이요 가장 심각한 고민거리이다. 자기 자식이 가난한 아이들과 섞이는 걸 혐오하는 것과 파출, 파출하는 하대와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같은 여자의 목소리고 그 목소리의 마음일 뿐이다.


좋은 가정환경에서 학교는 대학까지 나온 여성의 의식수준이 보편적으로 그 정도라면 그건 가정이나 대학이 함께 깊이 반성하고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물론 대학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다 유복한 환경에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식에게만은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설움과 고생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부모의 비원과 천신만고에 의해 대학교육을 받았을 수도 있고 본인의 굳은 의지로 고학을 했을 수도 있으리라. 그렇더라도 이 땅에서 대학까지 나왔다는 건 소수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혜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내 실력으로 입학시험에 붙었고 내 부모가 등록금 대줬으니까 대학을 나올 수 있었다고만 생각하면 속은 편할지 모르지만 지성인다운 생각은 아니다. 특별하게 혜택을 받은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특별하게 못 받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은 얽히고 설켜 더불어 사는 인간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시작이다. 부모에게뿐 아니라 이 사회에도 빚을 진 것 같은 채무의식과 같으려는 책임감의 결여는 나의 편견인지는 몰라도, 남성보다 여성고학력자가 더 심한 것 같다. 남성처럼 졸업 후 고루 사회활동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학력이 보다 이기적인 목적에 봉사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집을 갚을 마음은 있는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법이 과연 있을까. 빚을 갚을 마음만 있다면 파출부아줌마나 내 자식의 가난한 학교 친구에게 그렇게 교만하고 몰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름 아닌 바로 그런 사람들한테 빚을 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 사회활동의 문제만 해도 돈을 버는 취직의 문은 아직 좁을지 모르지만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룩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은 무진장하다고도 볼 수 있다. 요는 보다 나은 사회적 조건에 대한 꿈, 즉이상(理想) 을가 졌느냐 못가 졌느냐가 먼 저지, 방법은 그다음 생각해도 될 일이다. 이상의 결여야말로 오늘날의 여성고학력자들의 가장 큰 허점이 아닐까.  


높은 학력의 젊은 엄마들의 공통의 관심사인 아이들 교육문제만 해도 그렇다. 엄마들 개개인은 다들 바람직한 교육환경에 대한 꿈이 있고 오늘날의 학교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분개도 열렬하다. 그러나 실제의 그들의 행동은 더욱 학교와 아이들을 망치는 쪽으로 치닫고 있다. 그리고도 교육을 망치는 건 자기만 제외한 모든 남들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이 공상이나 환상과 다른 것은 그것이 지성의 산물일 뿐 아니라 현실적인 뜻을 가지고 행동을 방향 짓기 때문이다. 이성으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건 알면서도 행동은 그래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만 하고 있는 건 이상보다는 당장의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고학력부모가 많은 학교일수록 아이들의 성적은 우세할지 모르지만 교육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져 간다는 어느 국민학교 교사의 한탄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사회참여란 별 건가. 비근한 예로 자기 지역 내의 자기 자식이 다니는 학교에 교육을 회복하는 것도 훌륭한 그리고 시급한 사회참여다. 어째 처음부터 미운여자얘기 만한 것 같다. 이왕 내친김에 미운여자얘기를 다하고 끝마쳐야겠다. 꿈대신욕심만 있는 여자, 끝없는 물욕을 높은 이상으로 착각하고 있는 여자는 밉다. 자신의 성취욕이 온통 자식과 남편한테로 뻗친 여자도 밉다. 세 살 적 응석을 언제까지나 아무 데서나 부리는 여자도 밉다. 특히 직장에서 자신의 무능이나 부족함을 응석으로 때우려는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같은 여자의 일자리를 막아서고 있으므로 미울 뿐 아니라 곤란하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평생 교육장의 모든 과를 두루 섭렵하고 온갖 취미생활을 다한번씩찝적거려보고도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지 않은 여자도 밉다. 유명 라이벨의 고급 옷으로 빼입고 노점상한테 천 원어치 사고 덤 한 알 더 얻으려고 악을 악을 쓰는 여자도 밉다.


여자가 아름답다는 건 한 가정에뿐 아니라 한나라에도 큰 복이다. 가정이나 나라가 고난에 처했을 때 우리의 어머니나,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얼마나 아름답게 처신했던가를 상기해 보길 바란다. 미운 여자 얘기를 장황하게 한 건 조금이라도 아름다움에 이바지하고자 함이었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글 소설가 박완서

녹지 21번째(1988) 수록


새로 읽기


시간이 꽤 지났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덮어놓았던 무언가를 들추는 구석이 있는 글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들이 ‘채무감과 이상의 결여’가 있다는 비판에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떳떳하게 반박할 수 없는 탓이다. 찜찜함에서 벗어나 이 글을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여전히, 아니 더욱, 채무감과 이상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젊은 여성들이 많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대학 진학이 보편화되면서 고등교육을 받는다는 특혜 의식은 사라지고 있으며, 이전과 달리 물질적 풍요는 더욱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누리는 환경을 인지하고 아래를 보는 것보다 끝없는 경쟁에 휩쓸려 이전 세대라면 알 수조차 없었을 목표를 따라 달린다. 누구나 타인의 인생을 손쉽게 볼 수 있게 되면서 이상 아닌 물욕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대학 생활은 힘겨웠던 수험생활에 대한 보상이 되어버리고 어릴 적에 가지고 있었을 이상은 성인이 되며 유흥과 취업난 사이에서 의미를 잃는다. 대학 사회의 일원으로서, 향후에 사회진출을 할 사람으로서, 내가 누리고 있는 기회를 인정하고 다시 그 사회에 기회를 돌려주는 ‘기여’가 결여된 것이다.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좋은 학군을 찾아 똑같이 생긴 아파트에서 길러진 아이들이 이렇게 사회를 채우고 있다. 정말로 교양 있는 고학력 여성들이 아무런 고찰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그대로 가정주부가 되어 자신의 성취욕을 왜곡해 자녀의 사교육과 학군에 집착하며 이런 사회가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지겨운 경쟁과 약자에 대해 배려라곤 찾아볼 수 없는 풍토가 여성들이 가정에서 제대로 된 가치를 교육하지 않아서 생긴 일일지도 모른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억압했던 환경이 그런 여성들을 만들어 낸 게 원인인지, 여성들이 이 사회를 잘못 키운 것이 원인인지 따지고 올라가는 것은 닭과 계란의 순서를 따지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극단적인 교육열은 유교나 농경사회 특징 때문인지 동아시아 전반에 나타나며, 전체주의에 길들여진 국민성이 가정에서 유발된 것이라 보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미운 여성들’이 밉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이 여자들은 정말이지 백해무익하다. 학습된 여성성을 기반으로 남성에게 의존하고 제대로 된 자아 없이 살아가는 여성들을 마주치면 짜증이 올라온다. 하지만 이 여성들을 같은 여성보다 더 진심으로 경멸하는 이들은 남성이다. 소위 말하는 싸가지 없는 여성들은 된장녀, 김치녀 등 이름을 바꾸어 가며 자국 남성에게 비난받아왔고, 그 특성에 해당되지 않는 평범한 여성들 또한 영향을 받아 자기 검열을 하게 되었다. 이기적인 여성으로 낙인찍히는 것보다 남성이 요구하는 의무를 장착한 개념녀가 되길 선택한 것이다. 이 여성들은 언제 어디까지 계산해서 평등한 가격을 나누어 지불할지 모르겠지만, 더치페이를 하고 데이트 통장을 만들고 반반결혼을 하며 같은 가격을 지불했으니, 상대와 평등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진심으로 이런 여성들에게 짜증을 느낀다. 이렇게 자기 검열을 하고 개념녀가 되고 자조적으로 한녀라는 표현을 쓰며 ‘미운 여성들’에서 멀어지면 해결될 일이라 믿는 여성들이 짜증 나고 여성의 흠결에 열광하는 사회에 환멸을 느낀다. 김여사, 맘충, 설거지론 등 유행어에서 일부의 몰상식한 경우를 과장해 가부장제에 편입된 여성과 그 모성마저 전체적으로 조롱하는 현상에 슬픔을 느낀다. 또한 이 사회는 여성 정치인이나 자본가의 잘못이 드러나면 신이 나서 까 내리기 바쁘다. 갑질 사건이라도 터지면 축제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아마 여성혐오를 인식하며 김치녀를 끝으로 〇〇녀와 같은 유행어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미디어에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젊은 여성의 새된 목소리를 조롱하고, MZ라는 명목으로 젊은 여자 사원들의 무례함을 싸잡아 까 내리는 것을 보면 그저 더욱 교묘해진 것이다. 최저임금을 받고 서비스직이나 육체노동을 하는 여성과 평범하게 가정주부가 된 여성이나 사회에서 권력 있는 여성이나 전 국민의 비난 대상으로 전락하는데 이들이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말할 수 없고 따라서 여성으로서 ‘파출’에게 선을 긋는 것도 웃긴 일이다.


이 사회는 여성에게 너무 가혹하다. 제도와 가정의 보호에서 벗어난 여성 청소년은 불안한 심리상태와 경제적 상황으로 성매매에 유입되기 쉽지만, 어떤 이들은 그런 선택을 한 여자애들의 인격까지 비난하기 바쁘다. 같은 여성임에도 그 환경적 요인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그들이 문란하기 때문이라 여기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평이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대학에 진학한 ‘보통’에 해당되는 여자들이 이런 기조를 갖게 되는 것은 사회적 문제이다. 여성의 인생이 밑바닥을 칠 때 어디까지 추락하며 인권이 유린당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는 태도야말로 더 나은 기회를 가진 여성으로서의 ‘채무감과 이상’이 결여된 모습이다. 대학 사회에서 여성주의 성향을 드러내면 ‘페미’와 ‘메갈’이라는 말로 낙인찍히는 현실에 굴복해 같은 여성의 아픔을 외면하고 문제의식조차 없는 여성들이 밉다. 택배노조 파업에는 공감하며 응원하지만, 청소노동자나 여성 노동자 파업에는 관심 없는 여성들이 밉다. 남성 정치인이 여성 인권을 진심으로 대변할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여성들이 밉다. 주제 파악 못 하고 이만하면 됐지, 현재의 여성 인권에 만족하는 여성이 밉다. 사회에는 관심 없고 연애에 정신이 팔려 얄팍한 행복에 빠지는 여성이 밉다. 이 사회가 잘못됨을 알면서도 나서지 않는 여성들이 밉다.


이들을 마냥 미워만 할 수 없는 건 나 또한 대학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지질한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미운 여자들’은 수업을 같이 듣는 학우이기도 하고 친한 친구 거나 도서관에서 스쳐 가는 얼굴들일 것이다. 나 또한 대학 생활을 하며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마음보단, 타고난 환경을 탓하고 비관했던 한 사람으로서 얼마든지 그들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여자들이 하나씩 바뀌다 보면 취업사관학교로 전락해 버린 대학의 역할이 제 기능을 할 것이며 더 나은 방향으로 사회가 바뀔 것이다. 결국 이 고장 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건 여자들뿐이다.


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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