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항구의 니쿠코짱!>
토토로를 닮은 니쿠코는 어렸을 때 가출을 한 뒤 스낵바나 화류계를 전전하며 일을 하다가 툭하면 만나는 남자에게 사기를 당해 돈을 뜯기는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다. 니쿠코는 금방 사랑에 빠져 모든 걸 내어주지만, 남자들에게 항상 이용당하고 적절한 선을 모르기에 사람들을 대하는 걸 어려워한다. 다름 아닌 그녀의 딸 키쿠코의 객관적인 평가이다. 키쿠코는 수많은 남자를 사랑하고 상처받고 그로 인해 그 도시를 떠나는 걸 반복해 온 니쿠코의 인생을 기구하다고 평한다. 니쿠코와 함께 화류계에서 일하던 친구가 친모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자신이 원치 않는 아이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키워준 니쿠코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론 어딜가나 튀는 니쿠코를 창피해한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애니메이션 특성상 니쿠코의 캐릭터가 익살스럽게 표현되고 식탐이 많은 인간 토토로쯤으로 그려지면서 키쿠코의 양가감정이 약하게 드러나지만, 책에서는 키쿠코의 내적 갈등이 더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니쿠코와 키쿠코는 얼굴은 물론이고 체형, 성향까지 하나도 닮지 않은 모녀 사이이다. 문학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키쿠코와 달리 니쿠코의 경우 문학은 별로 관심이 없는 분야이다. 니쿠코가 문학가를 꿈꾸던 한 남자에 빠져있었을 때, 키쿠코는 덕분에 문학의 세계에 빠지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실패한 열정적인 사랑이기도 했지만, 하필 그 남자가 “고향에서 죽겠다”는 쪽지를 남기고 떠나는 바람에 니쿠코는 신발도 제대로 챙겨 신지 못한 채로 그 남자의 종적을 찾아다니다가 항구 마을에 흘러들어 정착하게 되었다. 니쿠코는 다행히도 마음씨 좋은 고용주를 만나 항구의 배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고 동네 고깃집에서 서빙하는 일을 하며 살게 된다.
그러나 작은 동네이기에 새로 온 니쿠코는 더욱 튀어 보였다. 키쿠코의 체육대회에서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며 동네 유명 인사가 되어버리면서 키쿠코는 부담과 창피한 감정을 느낀다. 더구나 니쿠코가 밤마다 전화하는 것을 보고 또 나쁜 남자에 빠질까 봐 불안해하기도 한다. 심지어 키쿠코는 아직 어린 초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함께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같이 먹으면서도 니쿠코처럼 뚱뚱해질까 봐 걱정한다. 이런 니쿠코와 키쿠코의 관계가 일반적인 모녀 관계는 아니다. 오히려 이리저리 예측할 수 없는 니쿠코를 키쿠코가 관찰하며 ‘니쿠코 일지’를 머릿속으로 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또래에 비해 성숙한 키쿠코는 엄마가 철없는 것을 넘어 아이 같은 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 먹을 것에 집착해 계속 체중이 늘어나서 고용주가 걱정하며 딸인 키쿠코에 얘기할 정도이다. 니쿠코는 펭귄을 구경할 때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남을 의심 하지 않는 단순한 면이 있고 이해력이 달려서 문학을 좋아하지 않으며, 눈치가 부족한 편이라 키쿠코 혼자 부끄러움을 느낀다.
어쩌면 니쿠코가 지적장애와 평균 지능 그사이(IQ 71~84점)에 존재하는 경계선 지능(borderline intelligence)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계선 지능은 앞서 언급했던 남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생활에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 벌어놓은 돈을 사기당해 빈털터리가 될 확률이 남들보다 높다는 점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다. 영화에서 니쿠코는 유난히 연애나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며 돈까지 여러 번 잃는다. 만일 니쿠코가 어떻게든 삶을 꾸려가는 긍정적인 성격이 아니었다면 생활고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걸리는 등 경계선 지능을 가진 사람들이 겪는 부가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경계선 지능 여성은 집단에서 이탈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성폭력이나 성매매에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다. 니쿠코는 가출한 뒤 돈을 벌기 위해 스낵바나 화류계에서 일을 한 적 있는데, 경계선 지능 여성이 부모의 보호 없이 살아갈 경우 성 산업에 유입되기 쉽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니쿠코가 본격적인 화류계에서 일했던 걸로 보이지는 않는다. 스낵바나 화류계에서 일했지만, 키쿠코의 친모와 달리 큰손 손님이 없었던 것을 보면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아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니쿠코가 애정결핍으로 끊임없이 남자에게 빠지는 모습은 돈을 떼어먹히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기 쉬운 상황이다. 실제로 경계선 지능 여성은 그루밍 성범죄에 노출되기 쉽고 성매매까지 이어질 수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경우 경계선 지능 여성이 미성년자인 경우에도 가해자의 편으로 판결이 나는 사례가 많다. 경계선 지능을 대상으로 하는 성교육도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값을 받았다는 이유, 소극적인 거부표현 또는 일관성 없는 진술 등으로 피해자가 자발적 성매매자로 뒤바뀐다.
<항구의 니쿠코짱!>의 니쿠코는 그런 면에서 운이 좋은 환경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직원의 아이 몫까지 식사를 함께 챙겨주는 고용주 삿산은 아이가 아플 때 사정을 봐주고 도와주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 니쿠코는 불안정한 고용과 연애로 인해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살았으나, 주변인의 도움을 통해 보호자로서 한곳에 정착해 아이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이웃의 적절한 관심과 도움이 있기에 떠돌아다니던 생활을 청산하고 자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니쿠코는 딸 키쿠코의 조용한 사춘기를 겪으며 함께 성장했다. 니쿠코도 더 이상 불같은 연애를 하지 않고 키쿠코에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경계선 지능을 가진 사람을 ‘느린 학습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체계적인 교육이 뒷받침된다면 속도가 느리더라도 결국 이들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성교육으로 경계성 지능 여성이 성범죄와 성매매에 노출되는 현상을 막을 수 없었다면 결국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 느린 학습자의 눈높이에 맞춘 성교육과 사회화 교육이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이 여성들이 궤도에서 이탈해 인권의 사각지대로 추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니셰린의 밴시>의 파우릭과 도미닉 또한 발달장애에 해당하는 지적장애라기보다 범주의 경계에 위치한 경계선 지능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선 글에서 돌봄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면서 지적장애를 언급하게 되었지만, 경계선 지능을 가진 사람들은 안전이 보장된다면 혼자서도 삶을 꾸려갈 수 있기도 하다. 또한 말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파우릭이나 아버지의 성적 학대로 인해 후천적으로 말을 더듬고 사회성이 떨어지게 된 도미닉이나 각기 다른 특징과 장점을 가진 사람들이다. 도미닉의 경우 후천적인 영향이 큰 것인지 파우릭보다 어휘력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파우릭은 친절함을 가진 사람이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도미닉이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정황을 쉽게 알아챈다. 경계선 지능을 가졌기에 타인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지만, 어떤 면에선 정상 범주의 지능을 가진 사람들의 잔인함과 무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경계선 지능은 말 그대로 경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음을 의미하는 존재이다. 인구의 14~18%를 차지하는 만큼 이들이 성인이 된 후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자립을 도와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른 특성을 배척하기보다 그들이 자신의 속도에 맞게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영화에서 니쿠코가 밝은 성격으로 마을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니쿠코들도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자신들의 재능과 역할을 찾아 안전하게 자립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글 안녕
참고문헌
경계성 지능장애 여성의 성폭력·성매매 피해 예방방안
https://www.bwf.re.kr/kor/CMS/Board/Board.do?mCode=MN062&mode=view&mgr_seq=20&board_seq=18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