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 39번째(2005) 봄호 수록
페미니즘은 단순히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니야, 네 실존을 통째로 흔들까봐 두려운 거 아니야?
2004년 11월 중순, 학생회관에 몇 장의 자보가 붙었다.
학생회관은 평소 많은 학우들이 식사를 하거나, 동아리방에 들르기 위해 자주 오가는 곳이다. 자보가 붙어있는 그 곳의 벽 또한 늘 접하게 되는 익숙한 환경이라 그런지 자보에 관심을 갖는 학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유독 그 날의 자보 앞에는 글의 내용을 읽으려는, 확인하려는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문제(?)가 되었던 자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대에 다니는 한 학생이 당시 학생회장으로 출마한 전(前)총여학생회장의 자질을 거론한 것이 주된 골자였고 그는 학우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일 수도 있는 여러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나열하며 자격미비를 언급하는 동시에 출마취소를 요구하였다. 사실 나는 긴 자보를 읽으면서 자격을 운운한 내용자체의 사실여부보다는 학생회장 후보가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덧붙이며 그가 보여준 여성주의, 즉 페미니즘에 대한 저항과 울분에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자보는, 총학생회장부호인 전총여학생회장이 아니었다면 그 날 학관벽에 붙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출신 총학생회장 후보라… 총학생회장후보가 여자인데, 페미니스트이기까지 하단다. 그녀를 어떻게든 물어뜯고 찢어놓고 싶었던 걸까?
다음은 당시의 자보 내용 중 일부분이다.
4. 그대의 출신은 총여학생회이니…
…콘돔이나 뿌려대고 섹스에 관련된 이야기들로 일색된 당신들의 이야기는 여성주의라기 보다는 마치 섹스에 굶주린 인간들이나 아니면 여성은 무조건 피해자라는 피해망상적인 사고에 젖은 그런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 사실 굳이 총여학생회라는 조직이 필요한지 묻고 싶다. 총학생회 특별위원회(인복위 같은) 정도로 운영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 여학우 권리신장이라는 측면을 살펴볼 때에 오히려 지금의 총여학생회가 없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는 매우 심각하게 자보를 읽던 학우들의 옆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으려 손을 입가에 가져갔던 것 같다. 비록 본인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정치적으로는 올바른 행동과 발언을 해야한다는 것이 지식인의 필수요건처럼 여겨지는 문화가 아닌가, 그리고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여성주의적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지금 강의실이라는 공간에서 ‘여성’이나 ‘여성주의’와 관련된 이야기가 언급될 때 헛소리를 지껄이는 학우들은 점차 사라져 가는 추세이다. 지난 학기 수강한 여성학 관련 수업에서 얼마나 친여성적인 남학우들을 많이 만났는지 모른다. 그들은 포르노에서 다루어지는 여성의 대상화에 치를 떨었고 불과 몇 백 년 전만 해도 여성의 교육권과 참정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수업을 듣고 집에 가서 포르노를 보고, 자아실현을 위해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가려는 여자친구를 막고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요즘 오히려 페미니즘이라는 가면을 쓰고 온갖 진보성을 자랑하면서, 뒤로는 더더욱 가부장적으로 살고 있는 인간들이 더 무서웠다. 따라서 자신의 꼴통보수성을 당당히 드러내는 그 학우가 더 정직하고 솔직해 보였다. 따라서 저렇게 대놓고 페미니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을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학우가 참 무지하지만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사실 나는 자보를 붙이는 학우의 행동보다 그 자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언제부터 학생들이 저렇게 학내에 붙은 자보에 관심을 가졌는지, 자보가 붙어있는 며칠 내내 학관은 그 자보를 보려는 학생들과 그에 대한 담소를 나누는 학생들로 항상 북적북적했다. 아마도 총여학생회장이라는 자리에 대한 이미지와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 또한 과거 그녀에게 ‘노랑 머리’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조롱한 것으로는 모자라 무언가 직접적이고 논리적이며 가시적으로 그녀와 그녀의 모든 것을 비판할 수 있는 요소들을, 어떤 ‘용기있는’ 다른 학우가 속시원히 드러내주었다는 것에 대한 반가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보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나는 부모님성을 같이 쓰고 있는데 우선 이름을 소개할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짐을 느낀다(각자 가지고 있는 ‘페미니스트=?’ 공식을 대입하겠지). 그리고 여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져 나올 경우 그 때부터 문제에 연루된 여성과, 그 여성들을 변호하는 여성주의자에 대한 공격에 대응하고 그들을 달래느라 매우 바빠진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나는 성매매 특별법의 시행을 쌍수들어 환영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성매매 하지 말 것을 부탁(;)하고 다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남성의 동물적인 성욕은 어떻게든 풀어주어야 한다거나, 그래야 평범한 여성들에게 누가 가지 않는다거나 하수구가 더럽다 하여 모든 하수구를 막으면 깨끗한 도시가 유지되지 않는다(정말 무서운 논리다)는 등의 이유를 들면서, 여성부에서 쓸데 없는 일을 벌이고 다니는 것이라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항상 결론은 여성부는 남성들의 권리를 빼앗고 있으므로 없어져야 한다!로 귀결된다. 총여학생회는 남학생들에게 역차별적인 조직이므로 없어져야 한다는 학생들의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인상은 또 어떠한가, 위에 언급했던 것처럼 전총여학생회장은 머리를 노란색으로 염색했다는 이유로 ‘노랑머리 노랑머리’라는 닉네임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안에 들어있는 성적코드에 굉장히 당황했다. 노란색으로 물들인 머리가 결코 평범하지 않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노랑머리’라는 이름은 순수하게 색깔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야하다고 소문난 같은 이름의 영화, 그리고 주인공 여자를 칭했던 이름의 뉘앙스를 풍기면서 굉장히 섹슈얼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총여학생회장(페미니스트)이 아니었다면 결코 가질 수 없는 닉네임일 것이다.’ 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만일 총학생회장이 머리를 빨간색으로 염색했다면 다른 학우들은 그를 ‘불대가리’로 부를까…. 어쨌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주의자에 대한 인상은 대략 이런 것 같다. 원나잇스탠드를 밥먹듯이 하는 프리섹스주의자거나, 지독한 골초이거나, 아주 못생겼거나(그래야 피해의식이 더 커질 것이므로) 못생긴 주제에 꾸미지도 않는 추함의 결정체로 말이다. 게다가 성격은 어찌나 드센지 무슨 말만하면, 툭하면 싸우려 드는 무서운 것들이므로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 신상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처럼 페미니스트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여성에 대해 요구하는 것들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존재이므로 체제 안에서 순응하며 살고픈 사람들에게는 두렵고 더러운 것들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이런 편견과 두려움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전에는 보수적인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편협함과 이기심에 관계 맺기 자체를 부정하고 이상한 인간으로 내몰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여성이라는 존재에 의해 자신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것들을 잃고 싶지 않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기득권 유지 욕구라고나 할까.
지금까지는 경쟁도 남자들끼리의 경쟁이었고, 학교도 사회도 남자들만의 공간이었는데 갑자기 여자라는, 수적으로 맞먹는 어마어마한 세력이 등장하면서 경쟁을 부추기고, 학교에 여자 화장실을 놓아달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벽에 생리대자판기를 설치해 달라고 하기 시작한다. 수업시간에 재미있자고 음담패설을 좀 했기로서니 성추행이라고 생난리를 치면서 남자들 앞 길을 막는다. 호기심에, 또는 재미 좀 보려고 ‘집창촌’에 가끔 들렀는데,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여자를 샀는데 성매매특별법인지 뭔지가 제정되면서 갑자기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이런 논리 안에서는 당연히 호주제가 폐지되면 개인의 결혼역사, 특히 이혼여성들의 과거기록이 없어지고 가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는 것은 곧 가족해체를 의미하므로 국민모두가 ‘동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자들이 더 이상 여자들-특히 페미니스트-의 기세에 눌려 인간답게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들의 논리 안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이 있는데 남자들은 그들이 여자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라고 주장 하면서 성폭력이나 성매매이야기만 나오면 자기들은 동물적인 요소를 가진 존재(!)라고 스스로 말한다는 것이다. 이거 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인간이라면, 스스로의 성욕 통제쯤은 식은죽 먹기 아닌가,
한편, 여성들은 남자들과 똑같은 권리를 요구하면서 남자들의 영역으로 침투해오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의 문화와 다르고, 현존하는 체제와 충돌하는 새로운 문화를 생산 하고 있다. 남성적인 말하기, 남성적인 글쓰기만이 통용되는 세상에서 ‘여성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곧바로 주변화되고 만다. 여성주의자들은 바로 그 점을 포착했다. 비록 지금은 아웃사이더에 불과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남성적인 방식만큼 설득력을 갖지는 못하고 있지만 점점 그들은 그들의 존재를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페미니스트 가수 ‘이상은’, ‘지현’, ‘안희경’씨는 페미니즘 진영 안에서 가부장제의 억압과 여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는 여성주의적 대중음악을 실현시킨 바 있고 ‘또 하나의 문화’, ‘이프’, ‘여이연-여성문화이론연구소’는 여성주의적인 서적을 출판하고 강의를 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월경페스티벌이나 안티미스코리아 대회 역시 여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의 대표주자로 왜곡된 생리문화, 뒤틀린 여성상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기존 체제의 문화를 바꾸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남자교수라면 절대로 할 수 없을, 뮤지컬 같은 강의를 하는 연세대 사회학과 김현미 선생님이나 정희진 선생님의 의사 전달 방식은 꽤 매력적이다. 기승전결과 같은 틀에 박힌 플롯을 무시해 여성적인 글쓰기로 평가받는 문학작품 ‘말리나’, 가부장제 안에서 황폐화 되어가는 여성의 모습을 적나라 하게 드러낸 ‘피아노 치는 여자’ 등 여성들은 이때까지 무시되어왔던 그녀들의 고유한 특수성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기존에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사적 영역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여성이 남편, 사회로부터 억압 받아온 이유는 항상 사적이고 비가시적인 영역에서 머물러 왔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아내폭력, 아동학대, 소수자에 대한 착취는 공공연하게 일어났고 이를 문제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억압된 이들은 지금까지 기득권자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겨져왔던 것들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맞벌이하는 여성의 경우, 직업과 가사노동을 함께 병행하는 것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무모한 시도임이 분명함에도 사회와 남편들은 끊임없이 그것이 바람직한 여성상임을 주지시키려 하고 있다.
가정 안에서 창녀와 하녀를 옆에 끼고 모든 통제력을 행사하는 남자들에게 그 권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틀림없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 것임을 안다. 하지만 아내는 가정의, 남편의, 자식의 노예가 되기 위해 결혼한 것이 아님을, 그들은 왜 모르는가. 따라서 결혼한 여성들은 집안일과 육아가 여성의 일이라는 통념을 뒤집으면서 그것이 한 가정의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수행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피를 토해가며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반란과 궐기에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들이 느끼게 되는 감정은 앞에 언급한, 자신의 이익을 단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는 두려움 외에도 또 다른 것이 숨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그들이 한번도 의심해 보지 못했던 내 주변의 일상과 자신의 삶을 통째로 흔드는 폭풍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사회가 원하는 모습대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어 성장해온 ‘친사회적 인간’들,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대와 위치, 그리고 역할에 대해 특별한 생각없이 살아온 이들에게는 ‘내가 옳다고 믿었고 안주해왔던 삶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니다, 나를 옭아맸던 남성성이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그들이 나름대로 견고히 만들어 놓은 모래성을 단숨에 부수는 쓰나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진리인줄 알고 따라왔던 신념과 생활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과 공포가 어떤 것인지는 타자성의 내면화시몬 드 보부아르가 쓴 ‘제 2의 성’에 따르면 자궁을 가진 여성은 태고적부터 출산에 예속됨에 따라 생리, 임신, 출산, 육아 기간 동안 모든 노동력을 상실하게 되므로 생존을 위해서는 남성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여성의 모든 운명은 남성의 손에 달려있었고 여성은 자신의 실존에 의해 삶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자를 정의하는 데로 자기를 인식하고 남성의 구미에 맞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만들어간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편입함으로써 물질적인 생존이 가능하고 남편의 지위고하에 따라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 역이 결정되는 것이므로 여성은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타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며 자신이 타자라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가부장제 문화 또한 여성에게 타자성을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것이 ‘진정한 여성’이라고 주입시킨다. 를 경험했던 사람으로써 충분히 이해한다. 이러한 요소는 페미니즘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페미니즘은 실존적이고 성찰적인 고민을 끊임없이 던짐으로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가부장제와 나와의 관계를 고민하게 만드는 학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야기가 많이 돌아왔다. 결론적으로 나는 학관의 자보를 보면서 가진자들의 편협함과 옹졸함보다는 그들안에 내재된 두려움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 저항이 안쓰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여 분노를 느끼기 보다는 그저 한번 웃어주고 만 것이다. 총학생회가 남학생회나 마찬가지이니 총여학생회가 필요한 것이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처가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남성부와 다를 바가 없으므로 여성부가 필요한 것이다. 장애인 이동을 위해 설치된 지하철 내 계단마다 붙어있는 소형이동기가 생겨서 비장애인들이 움직일 공간이 줄어들었다고 장애인권운동가를 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여성운동은 많은 운동- 환경운동, 반미운동, 인권운동 등-과는 달리 보이는 것일까. 왜 여성이라면 그토록 치를 떠는 것일까.
물론 페미니즘이 현재의 트렌드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반페미니즘의 물결이 너무나 거센 나머지 아직은 갈 길이 멀고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단언할 수 있다. 뻣속까지 스며든 가부장제에 끝까지 매달리는 것은 새로운 문화를 만날 기회, 새로운 자아구축의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바보 같은 짓이다. 시대를 거슬로 올라가고 있다는 말이다. 이미 여성들은 새롭게 태어난 지 오래이고,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여성의 출현은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남성의 출현을 요구할 것이다. 가부장제에 눌린 나머지 아직 한번도 써 보지 못한 아웃사이더인 여성들만의 무한한 힘이 기지개를 펴고 있는데, 언제까지 애써 무시하려 들 것인가. 남성중심 문화가 가진 여러 문제점들이 이미 드러난 지 오래인데, 언제까지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착각하면서 자신을 속일 것인가 말이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을 하라, 페미니즘이 싫은 것이 아니라, 변화가 두렵다고 말이다.
글 주리
녹지 39번째(2005) 봄호 수록
자질, 타고난 성품이나 소질, 어떤 분야의 일에 대한 능력이나 실력의 정도. 총여학생회 출신의, 페미니스트인, 여성 총학생회장후보의 자질을 논하자며 ‘페미니즘’을 논하고(심지어는 왜곡하고) 학내 여성인권을 위한 기구는 총학생회 산하 위원회 정도로 괜찮지 않냐 말하는 남성이라. 놀랍지도 않다. 아, 직접 대자보까지 써서 붙이는 무지에 대한 자랑과 적극성은 놀라울지도 모르겠다. 요즈음의 남학우들은 ‘에브리타임’을 통해 집에 누워 혐오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올해로 57년째 이어져오고 있는 녹지에 꽤나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바로 ‘여성주의는 대세’이며 그에 대한 반동, ‘반페미니즘적인 물결’이 거세 여성을 향한 남성과 사회의 반발이 날로 격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여성주의가 여성의 삶을, 사회를 바꾸고 이에 대한 반발이 있음에도 결국에는 우리가 옳다는 말들. 믿음을 가지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말들. 거센 백래시에 지치더라도 포기하지 말자는 말들. 세상은 우리가 바라고 옳다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아주 느리지만 결국에는 바뀌고 있다는 말들. 그러니 결국에는 여성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말들은 녹지가 창간되었던 1960년대에도 실렸으며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그리고 지금의 내가 이 글을 쓰는 2020년대에도 반복되고 있으며 나는 ‘우리’의 ‘믿음’을 지속하고 반복해 되새기는 이들 중 하나이다.
녹지가 <지난 녹지 새로 읽기>를 시작한지도 어느덧 반년이 훌쩍 지났다. 이 기간동안 지난 녹지를 파고들며 느낀 것은 ‘세상은 확실히 변하고 있다. 근데, 정말 바뀌고 있나?’하는 것이다. 오랜시간동안 우리는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적인 사회와 싸워왔다. 호주제 폐지를, 낙태죄 헌법불합치를, 스토킹처벌법 개정을 이뤄냈으며 동일임금 동일노동, 여성의 몸을 둘러싼 권리 보장, 교묘히 가려진 여성혐오와 여성에 대한 차별 철폐를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노력과, 그 성과는 분명하다. 하지만 녹지 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간이 흘러도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논의들이 있고, 이 논의들 간 유사성을 볼 때면 ‘과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한 것인가…’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대학 내에서 활동하는 여성주의 단체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학내 백래시는 빠지지 않는 주제다. 대학 내 단체 뿐만이 아니다. 여성주의에 대한 백래시는 여기서도, 저기서도 계속계속 나오는 주제가 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백래시는 멈추지 않고 계속계속 우리를 향해 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가 그토록 신뢰하는 통계만 봐도 성평등이라는 건, 아직 한참 먼 이야기임에도 ‘이제 남녀차별이라는 거, 없지 않나?’하는 말은 몇 십년 째 들려온다. 극소수의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제 여자도 다 학교 보내고 대학 보낸다는 이유로.
여자도 돈을 버니까, 요즘 세상엔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이 힘들고, 남자는 군대까지 다녀오고, 요즘 여자들은 애도 안 낳는데, 남자도 길 가다 칼을 맞는 시대니까, 아무래도 약한 여자가 더 표적이 되는 건 당연하지, 그래도 남자가 더 힘들어, 요즘엔 딸 키우는 게 더 복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딸이 귀여우니까, 여자를 안 뽑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고, 아무래도 여자들은 결혼하면 그만두는 일이 잦고, 남자는 가장이고, 여자들은 힘든 일을 기피하잖아, 요즘 여자애들은 기가 세서 남자애들이 기를 못 펴고 다니는 세상이니까, 여자애들은 공부를 너무 잘해서 문제고, 능력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인데, 아무튼 이런 세상에 아직도 페미니즘을 외치다니, 쟤들은 아무래도 남자를 못 만나서 저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 하는 말들.
이런 통념들이 아무렇지 않게 공유되는 사회가 우리 사회다. 왜 아직도 완전한 성평등 사회라 할 수 없는지, 왜 여성들이 더 많이 죽는지, 왜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더 힘든 삶을 살게 되는지, 대학 내에서 여학생들을 위한, 성평등을 위한 기구가 왜 필요한지 공감하지 못하고 생각도 않고는 ‘이제 필요 없지 않나…?’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 사회 속에서 ‘현상유지’란 이전의 ‘마음껏 차별하고 혐오할 수 있었던 사회 분위기로의 회귀’를 뜻한다.
여성주의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가 누군가에게 실존의 문제라면 여성주의를 외치는 목소리에 실존이 흔들리는 것은 남성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이 사회는 성평등을 이뤘고 현 상태의 유지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기득권자이거나 현실을 회피하는 이들이다. 자신이 ‘한번도 의심해 보지 못했던 주변의 일상과 자신의 삶을 통째로 흔드는 폭풍’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 폭풍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러우니까. 특히나 평등과 권리를 배우고 청소년기까지는 비교적 미묘하고 은은한 차별 속에서 살아온 여자 아이들이 자신을 사회적 약자의 포지션에 놓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비록 우리집에서 자식들 중 여자인 나만 집안일을 하고, 남동생이 나보다 용돈을 많이 받고, 대학 입시에서도 멀리 가기 보다는 집 근처 대학을 가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듣고, 운동을 잘하는 여자면 남자냐는 소리를 한 번씩은 들어보고, 여자애들 몸매평가하는 남자애들의 불쾌한 대화를 애써 못들은 척 하고, 특목고 입시에서 남학생은 면접 질문도 쉽다는 게 공공연한 입시판 비밀로 여겨지며, 실제로 어느 학교는 남학생 뽑으려고 성적 조작도 했다고 하지만… 아무튼, 나와는 가깝지만 먼 일이니. 그러니 페미니즘과는 선을 긋고, 자기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남성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로 받아들이고, 같이 페미니즘을 욕한다. 하지만 말이야. 오히려 여자 아이들이 여자로서, 여성으로서의 주체성을 확실하게 배웠다면, 여성에게 이득이 되는, 자신을 위한 목소리를 더 크게 낼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왜 여자는 자신의 권리보다 남을 위한 배려를 먼저 배워야 하나? 왜 미묘한 눈치를 살피고, 애써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이기적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항상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없나 주변을 살펴야 하나?
이런 고민들이 여자들 사이에서, 내 안에서 돌고 돌고 또 돈다. 진짜 문제는 가부장제고, 남성사회지. 나도 알지만, 진짜 문제는 그들이라는 걸 알지만.
57년간 녹지 안에서 언급된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이 갈수록 거세지는 날들 보다도 요즘의 백래시가 더 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내가 지금을 통과 중인 사람이어서도 있지만 실제로 사회는 더 강력하게 여성의 입을 틀어막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 뿐만이 아니라 사소한 혐오 표현을 지적하기만 해도, 여성의 목숨을 걱정하기만 해도, 저급한 농담에 불편한 기색을 표하기만 해도, 아니 사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여성들은 피곤하고 예민한 애로 치부되며, 얻어 맞고, 일자리를 잃는다. 여성과 성평등을 위한 기구는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로 다가왔고, 혐오에 대항하는 목소리는 너무 쉽게 묻히고 또 무시되는 반면 혐오의 목소리는 쉽게 사회의 문을 통과해 버린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야지. 이제까지 우리는 그래왔고, 그렇게 이뤄냈고, 사회를 바꿨고, 여전히 비슷하고 또 다른 사회이지만, 2등 시민이었던 여성이 인간으로 존중받고자 목소리를 내는 것에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잔뜩이지만, 여성과 정정당당하게 다투는 것에 반감부터 느끼는 사람들 투성이지만.
페미니즘은 단순히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니야, 페미니즘은 이미 우리가 목표로 삼고 나아가야할 지향점이 된 지 오래다. 페미니즘을 호불호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이미 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평등과 자유, 인권의 문제가 어떻게 단순 ‘좋고 싫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을까?
아마 너도 그걸 알겠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네 실존이 통째로 흔들릴까봐 두려운 거 아니야?
글 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