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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보다 더 중요한 것

AI시대 아이디어의 홍수 속에서 디자이너가 존재하는 방식

by 김석민

밤 늦은 사무실, 텅 빈 회의실 한 켠.
화이트보드에는 오늘도 수십 개의 키워드가 흐릿한 잉크로 남아 있었다.
‘임팩트’, ‘트렌디함’, 그리고 빨간 원으로 두 번 감싼 단어, ‘대중성’.


아이디어는 넘쳤다.
누구나 자유롭게 말했고, 누구나 제안했다.
그 자유는 우리를 들뜨게 했고, 동시에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말할 수 있는 세상에서,
누가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하고 있는가.


AI는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프롬프트 몇 줄이면 수십 개의 시안이 생성되고,
우리가 애써 상상하던 것들을 단 몇 분 만에 시각화해낸다.

아이디어는 더 이상 희소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 많다. 쌓이고, 흘러넘치고, 방치된다.

그리고 그 끝에서 디자이너는 조용히 한 발 물러서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진짜 디자인은 선택에서 시작된다


몇 달 전, 한 스타트업의 브랜드 리뉴얼 미팅 자리.
대표는 Midjourney로 만든 이미지 시안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우리 브랜드 톤을 시각화해봤어요. 다 괜찮은 것 같지 않나요?”

정갈했다. 감각적이었다. 흠잡을 데 없었다.
그런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중에서 왜 이 방향이어야 하나요?”
“이 브랜드가 지금 세상에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요?”
“고객이 이 브랜드를 만났을 때, 어떤 감정을 가져가길 바라세요?”


질문은 공기를 바꿨다.
우리는 시안이 아닌 맥락의 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AI는 선택지를 제시한다.
하지만 ‘왜 이것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은 인간의 몫이다.
그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우리는 결과물이 아닌, 선택의 논리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설명되지 않는 디자인은 설계된 것이 아니다


디자인은 감각에서 출발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되려면 설명 가능해야 한다.


W-H-W 프레임워크

What (무엇을 했는가)
“12pt 산세리프 폰트를 사용했습니다.”

How (어떻게 적용했는가)
“모바일에서도 가독성을 유지하도록 계층적으로 배치했습니다.”

Why (왜 그렇게 했는가)
“핵심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선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결정은 감각이 아니라 근거 위에서 설득된다.
디자인은 설명 가능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좋은 디자인은 구조로 말한다


한 클라이언트는 말했다.
“예쁘긴 해요. 그런데 왜 이 디자인이어야 하죠?”

그럴 때 우리는, 설명이 아닌 흐름으로 설득한다.


BRIDGE 전략

Background “사용자들이 주요 정보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Research “히트맵 분석 결과, CTA 클릭률이 급감하고 있었습니다.”

Insight “정보 구조가 사용자의 시선 흐름과 어긋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Design “그래서 콘텐츠 위계를 다시 정비하고 대비감을 높였습니다.”

Goal “전환율 개선이 목표였습니다.”

Evidence “적용 전후 A/B 테스트로 성과를 측정했습니다.”


설계된 구조는 설명을 가능하게 만들고, 설명은 설득을 만든다.


질문이 없는 사람은 AI의 답만 감상하게 된다


“AI가 만든 디자인이 제 것보다 나아요.”
한 후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하루 종일 고민한 걸, AI는 10분 만에 뽑아내거든요.”

나는 되물었다.
“그 결과물을 클라이언트에게 그대로 보여줄 수 있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어색해요. 브랜드 톤이랑 잘 안 맞는 것 같고…”

AI는 이미지를 만든다.
하지만 브랜드의 역사, 타깃의 감정,
담당자의 말투와 속도까지—
관계의 결을 읽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디자이너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AI는 물을 붓는다.
하지만 우리는 물이 흘러야 할 수로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100개의 결과보다 중요한 건, 브랜드 철학을 시각적으로 풀 수 있는 5개의 축이다.
그 축을 잡고 나면, 반복은 AI가 도와준다. 선택은 우리가 한다.

그리고 그 설계는 언제나 글에서 시작된다.


디자이너의 진짜 도구는 손이 아니라, 질문이다

이 디자인이 정말 사용자에게 도움이 되는가?

이 감정은 브랜드의 방향성과 닿아 있는가?

우리는 기능을 만드는가, 아니면 경험을 설계하는가?


질문은 방향을 정하고, 방향은 구조를 만들며, 구조는 결과를 책임지게 한다.


디자인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 닿는 일이다


한 프로젝트의 시안 발표회 날, 우리는 수십 개의 시안 중 하나를 골랐다.
기술적으로 가장 완성도 높은 것도, 가장 화려한 것도 아니었다. 가장 ‘사람다운 것’이었다.


“이 시안은 보자마자 ‘아, 이게 우리 브랜드다’ 싶었어요.”
“감각도 좋지만, 방향성이 진짜 잘 잡혔네요.”


디자인은 결국, 감정을 설계하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이미지 안에, 흐름 안에, 구조 안에 숨기고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AI 시대, 디자이너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AI는 빠르다. 정확하다. 효율적이다.
그러나 마음을 가진 적은 없다. 질문을 던진 적도 없다.

설명한 적도 없다. 디자인은 픽셀이 아니라 감정의 리듬이다.

움직이는 손보다 먼저, 움직이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묻는다


“오늘 나는, AI가 대신할 수 없는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오늘도, 나는 사람을 이해하고, 맥락을 읽고, 질문을 던지고,
설계 가능한 언어로 감정을 번역할 것이다.

아이디어는 누구나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왜 이것이어야만 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그 설명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이 시대, 디자이너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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