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부모들은 어떻게 자녀를 양육하는가?
우리가 답하는 질문은 샬롯메이슨의 살아있는 교육 1 '9세 이하 어린이들의 훈련과 교육 가정교육'의 질문을 바탕으로 부부간의 생각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쯤에서 부모의 양육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현실을 점검하는 단계이다. 분명한 건 부모마다 자녀 양육의 태도가 상이하다는 점이다. 가정마다 문화가 다르고 어떤 가정은 더 엄격하고 어떤 가정은 덜 엄격하다. 정도가 심하면 양 극단 어딘가에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가정 문화는 가정의 교육 철학을 반영한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가 백지의 상태이며 부모들이 멋진 그림을 그릴 계획으로 시작한다. 샬롯 메이슨(Charlotte Mason, 1842년 1월 1일 ~ 1923년 1월 16일) 이 살았던 20세기 말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많은 부모들이 그러하다.
많은 부모들이 어느 정도 '정교한 방임'으로 자녀를 양육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유전자를 인정하고 성향대로 자라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이것이 부모의 교육철학이 될 수 없다고 샬롯 메이슨은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부모가 적당한 양질의 영양을 공급하면 자녀들이 스스로 소화하고 발달한다는 전제에 도전하는 말이다. 음악이나 체육, 음식과 같은 물리적인 영양도 있고 철학이나 사상 같은 정신적인 영양도 있다. 그러한 것만 부모가 적절히 제공하면 아이는 그가 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되는가? 샬롯 메이슨은 반문한다. 그녀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나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다. 세 딸의 아빠로서 매일 아이들과 놀이를 하고 나들이도 하지만 '정교한 방임'의 교육을 하는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양질의 영양을 공급해 주는 것을 대부분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맡기고 부모의 역할은 교육을 받도록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양질의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 부모가 들여야 할 시간과 노력을 충분히 들이지 못하고 있다. 일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녀 교육을 '준비'하고 '계획'하는데 하루에 적어도 한 시간 쓸까 싶다. 요즘에는 가정 교육의 구체화하기 위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그 전에는 이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생각이 영양을 공급하는 책임에 미치지 못하면 가정 교육은 한계가 있다고 본다.
한편으로 본다면 어린이집 혹은 유치원과 같은 교육 시스템이 나의 아이에게 최선의 영양을 공급하는지는 확신이 없다. 물론 훌륭하신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시지만 그들이 케어하는 한 아이, 한 아이에게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케어하는 건 어찌 되었든 그들에게는 '업'의 일부이기에 자녀들의 '최선'보다는 '기본'적으로 충족해야 할 바운더리만 지켜내는 방향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부분도 큰 헌신이다. 하지만 샬롯 메이슨은 그게 충분하지 않다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적당한 영양을 제시한다고 아이가 성장할 수 있는 최선의 존재가 된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 더 필요한가?
부모들은 우선 아이들의 발달에 대해서 '지식'을 갖추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의 발달은 일련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고 자녀에게 시기 적절한 최선의 영양을 공급하자라고 한다. 부모의 책임은 '정교한 방임'의 태도가 아니라 '최선의 노력과 투자'라는 입장이 샬롯 메이슨이 말하는 바다. 그리고 아이들의 최선의 존재로 발달하는 데에는 가정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개인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가정을 기본단위로 구성된다고 한다. 가정에서만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은 학교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어쩌면 아이 개개인에 대한 극진한 정성과 사랑 그리고 지식을 갖춘 이해라는 부분이다. 이는 아이의 부모만이 감당할 수 있는 희생으로 가능한 영역이다.
끝으로 부모들이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아이들은 가정에게 맡겨진 사회속의 존재라는 점이다. 부모들이 자녀 양육의 방향과 책임을 가진다. 하지만 이것이 아이들이 사회 속의 존재라는 점을 없애지는 못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유익한 존재로 성장해야 한다. 처음에 언급한 '제 1대리인'이라는 개념이 적용되는 부분이다. 사회에 맡겨진 존재인 아이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의 부모 뿐만 아니라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 자녀가 없는 사람들도 양육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백지상태로 부모의 욕심에 의해 온갖 것들을 - 부모들이 원하는 것 - 채워간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내가 세 아이를 낳고 길러온 과정들을 생각해보면 비슷한 것 같다. 나보다 지식이 부족하고 약하다는 이유로 내가 옳다고 여겼던 것들과 바라던 이상향을 아이들에게 주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언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나이 임데도 자기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인격이 있는 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 만 4세, 3세, 1세의 아이들은 각각 요구하는 것이 다르다. 첫째와 둘째만 하더라도 원하는 것을 말로 정확히 표현하고 막내는 말은 못하지만 가리키거나 간단한 단어들로 의사를 표현한다. 하지만 그 것은 기본적인 욕구에 지나지 않아서 여전히 양질의 활동을 하기 위해 이끌어 줄 필요가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자연을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북적북적한 놀이터 대신에 호숫가에서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보고 갈대의 꺼끌꺼끌함이나 민들레 씨앗의 폭신폭신함을 느끼는 자연의 신비를 느끼는 행위들. 매일 아침 헨델의 메시아를 듣거나 클래식을 듣는 행위들은 신기하게도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좋은 것을 계속 섭취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만들어 준다. 한번은 둘째가 메시아를 틀어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쉬운 부분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보낼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보육/교육기관의 교육시스템의 자유방임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교육을 받아들이고 가정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혼란이 서로를 괴롭게 만든다. 아마 오늘 질문에 대한 묵상을 하지 않았다면 '왜 아이들은 유치원/어린이집에서는 잘 놀다가 집에 오면 저럴까'라는 생각으로 한숨만 쉴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다시 최고의 것을 주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기를 결단한다.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계획적으로 실천하면서 말이다.
나의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그 때 부모님이 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주고 옳은 것을 알려주는 노력을 하셨다면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그 안타까움에 대한 방증으로 우리 아이들에게는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알려 주고 있다. 정교한 방임에 놓였던 입장에서 부모가 된 지금 그것은 해서는 안될 일이다. 사회의 유익한 존재로 키우기 위해서 양질의 좋은 것을 주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런 양육을 하기 위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아이들이 만 6세가 되기 전 충분히 누려야 할 부모의 사랑과 시간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