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월 London Wall 투어 (2)
투어가 한시간 반을 넘어가고있었고 한겨울이라 무거운 코트를 입고 있어서 다소 피로감이 몰려올 무렵 우리는 바비칸 센터의 브릿지를 통과하고 있었다. 가이드의 영어가 몽롱하게 들려오는데 눈에 띈 '저것'. 연결 통로에 서서 런던 월을 보며 설명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요새같이 생긴 성벽에 새겨진 저 돌도 런던 월의 일부인걸까, 왜 벽돌에 박혀있는걸까?.. 등등 궁금증 투성이였지만 질문할 타이밍은 놓치고 어영부영 투어는 끝났었다.
로만 제국의 원형 타워, 세인트 자일스 성공회 성당, 바비칸 센터 그리고 커튼월 유리의 현대건축물이 한 화면에 담긴 사진. 정말 런던스럽다.
스폴리아 (The Spolia)
그렇게 찝찝함을 남긴 채 다시 바쁜 학기가 시작되었고, 선택과목으로 Graeme Brooker 라는 교수의 REUSE라는 과목을 듣게 되었다. 건물 재사용에 대해서 세계적으로 선구적인 연구를 한 학자이신데, 이 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이 부분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The Spolia. 한국어로 딱히 번역도 안되는 생전 처음 들어본 용어다. Graeme 교수가 쓴 REUSE 라는 책을 보면 The spoliated object 라는 표현에 있는 spoliate 라는 동사의 뜻은 '약탈하다, 강탈하다' 에서 Spolia의 의미에 대해 추론이 가능하다. 즉, Spolia는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가 패배한 지역의의 구조물 중 일부를 채취하여 새로운 건축 또는 장식용으로 용도를 변경한 것이다. 쌩둥맞은 건축 재료가 자기 발로 들어갔을 리는 없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자랑하고 대대손손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처럼 박아넣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전리품같은 것인데, 전 세계의 보물들을 뺏다시피하여 갖다놓은 '대영박물관스럽다' 라고 할 수 있겠다. 역시 이긴 놈은 자랑스럽고 당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폭력적이기도 한 부분이다.
그리하여 교수님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스폴리아가 맞냐고 여쭤보았고, 교수님은 자기도 처음 보는 부분인데 스폴리아가 맞다고 하셨다. 과제로 Reuse 시리즈 중에 하나 골라 케이스 스터디를 한 주제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 바비칸 건축투어팀에도 물어보고, 바비칸에 살고있는 건축가 친구가 주민 소통 게시판에 물어보기도 했지만 딱히 원하는 답변이 안나왔었다. 심지어 London Walking Tour라는 책도 어렵게 상호대차로 대출해서 봤는데, 거기에도 딱히 원하는 내용이 없었다.
그 때 번뜩 떠오른 인자한 미소를 가진 런던 월 워킹투어의 폴 링컨 아저씨.
그 분에게 이게 뭔지 아시나요 메일을 보냈는데 바로 다음날 바로 '나도 모르지만 한번 알아볼게. 그동안 투어하면서 몰랐던 부분인데 흥미롭네.' 라고 답장해주셨다. 손 안대고 코푸는 느낌이긴 했지만 답장은 이러했다. Paul 에 따르면, 자기도 몰라서 세인트 자일 성당의 잭 노블 신부님에게 여쭤보았고, 그 신부님께서 답해주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0년 이전에 이 교회의 마당에는 비석들이 세워져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현장 전체가 폭파되었고 그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의 유해가 잔해로 뒤섞여있었다. 그래서 저 돌들은 비석들의 일부이며, 성당 건물 아래 묻힌 밀턴과 그의 아버지 정도로 추정한다. 바비칸의 건축가들은 대지를 벽돌로 포장하여 잔해를 덮어야했기에 그곳에 있었던 일에 대한 힌트를 보존하는 차원에서 저렇게 한 것이다.
전쟁으로 파괴된 장소가 남긴 유물마저 박제하다니. 살아있는 박물관이란 게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시내가 온통 팔만대장경이며 기록물 천지다. 이 연구를 계기로 내가 살고있는 런던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곳곳에 숨바꼭질하듯이 숨어있는 스폴리아 녀석들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런던은 정말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한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