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들의 파티에 초대합니다 '오픈 하우스 페스티벌'
나는 뭔가를 덕질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인정하지만 난 건축 덕후다. 덕업일치라서 지루한 인생일지 몰라도 어쩌겠나. 이거 말고 관심가는게 없는데. 그래서 나는 처음 런던에 왔을 때 정말 보러 갈 곳이 너무 많아서 행복했었다. 작년 9월, 정말 무지런히 오픈 하우스 페스티벌을 쫓아다녔는데 하루에 세 탕씩 뛰며 스무 군데 넘게 도장깨기 하듯이 보러 다녔다. 그래서 나처럼 디자인 러버, 특히 건축 덕후라면 무조건 좋아할 페스티벌 중 하나인 오픈하우스 페스티벌을 소개할까 한다.
오픈하우스 월드와이드 페스티벌
오픈하우스 월드와이드 페스티벌은 전 세계의 건축, 디자인, 도시에 대한 축제이며, 60개 단체의 네트워크들은 영국의 오픈 시티 Open City 가 관리한다. 건축에 대한 문턱을 낮춰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1992년부터 운영되어왔다. 런던, 뉴욕, 로마, 도쿄, 서울 등 대도시 위주로 진행된다.
https://www.openhouseworldwide.org/
런던은 대체적으로 9월 중순부터 2주 동안 열린다. 평소에 대중들에게 오픈이 안되는 공간을 페스티벌 기간 동안 무료로 개방하고 유명하고 인기있는 공간들은 가이드 투어를 예약할 수 있다. 한두달 전쯤부터 참여하는 공간들 리스트가 공개되고 예약하는 플랫폼이 열리니 관심 있는 곳은 미리 찜해두었다가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슈퍼 P인 나는 미리 예약하는 법이 없다... 하지만 무한 새로고침 손기술로 가고 싶은 곳은 다 가봤다. 미리 가서 대문 앞에서 불쌍한 표정으로 기다리면 들여보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건축 페스티벌을 추천하는 이유 중 하나는 평소에는 들어가보기 어려운 유명한 아파트의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가정집에도 들어가볼 수 있다는 점이다. 페스티벌 기간에 실제로 사람이 살고있는 공간 몇 군데를 가본 적이 있는데 그 건축가에 그 건축주라는 말이 있듯이, 어쩜 다들 센스가 넘치는지 정말 감동과 영광 그 자체였다.
이소콘 플라츠(Isokon Flats, 1934)
그 중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곳은 예약조차 되지 않았던 이소콘 플라츠였다. (비오는 날 2시간 동안 입장을 기다렸다.) 바우하우스 설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 등 당대의 힙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니 인기가 많을 수 밖에! 이소콘 플라츠는 1934년에 영국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Grade1) 첫번째 모더니즘 건축물로, 매끈하고 직선적인 외관에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모더니즘의 핵심 가치를 단번에 캐치할 수 있다. 어딘가 한국의 주공아파트가 생각나는 복도식 철근 콘크리트 주거용 건물인데, 이 구조는 거주자들이 사회적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소콘은 잭 & 몰리 프리차드(Jack & Molly Pritchard)와 건축가 웰스 코츠(Wells Coates)가 설립한 디자인 회사의 데뷔 프로젝트였다. 디자인을 전공 안한 사람들도 다 아는 바우하우스가 설립되기 이전에 젊은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을 논의하고 실험한 곳이니 모더니즘 건축, 인테리어, 가구디자인 역사상 정말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건물 앞에는 대중에게 상시 오픈되어있는 갤러리도 있지만 페스티벌 기간의 특전은 뭐니뭐니해도 바로 사람이 직접 살고있는 소형 플랫과 맨 꼭대기 층의 펜트하우스 내부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펜트 하우스는 펜트하우스 자체보다 더 넓은 전용 테라스를 가지고 있는데, 고즈넉한 헴스테드(Hamspead Heath)의 멋진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요즘에는 아파트가 있어서 이런 주거공간은 흔하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고층 주거 개념을 담고 있고, 거실에 빛을 최대한 끌어들일 수 있는 큰 창문이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이 펜트하우스는 당대 유명한 디자이너와 작가들의 문화적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그들의 모더니즘 철학을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장소였다.
이소콘 퍼니처
이소콘 가구 회사를 거쳐간 디자이너 중 가장 잘 알려진 마르셀 브로이어는 이소콘 하우스를 위해 디자인하고 합판을 구부려 롱 체어를 만들었다. 간결하면서도 구부러진 합판으로 힘을 지탱하는 기능적인 디자인은 지금 보아도 경이롭다. 1936년 처음 출시되었을 때 이소콘은 이 의자를 '신체의 모든 부분에 과학적 이완을 주어 즉시 웰빙의 느낌을 준다'고 설명했다.
에곤 리스는 이소콘에 살면서 잭 프리차드와 함께 Donkey, Gull, Bottleship 등의 가구를 얇은 합판으로 만들었다. 이소콘에서 살았던 유명인들 중 펭귄북의 창립자 엘런 레인(Allen Lane)의 요청에 따라 펭귄 북 사이즈에 맞춘 펭귄 덩키 책장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소콘하우스가 추구한 '모더니즘'과 '실용성'은 펭귄북이 추구한 '모든 사람에게 저렴하면서 양질의 책을 제공하자'는 출판 철학과도 연결된다.
롱 체어가 현재 £2,340 (한화 약 418만원) 이니 아무나 턱턱 살 수 있는 가구는 아닌데요?
- 그래서 우리에겐 이케아 포엥 의자가 있잖어.
그리고 세계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단 15개만 제작되었던 갈매기를 연상시키는 Isokon Gull 와인렉은 2020년에 다시 제작되기 시작하여 현재 Isokon Plus 웹사이트에서 판매 중이다.
완벽한 주거 공간을 위해 건축 설계에서부터 가구, 심지어 와인렉까지 디자인한 셈이니 이 건물 하나만 공부해도 모더니즘 건축, 인테리어, 가구, 산업디자인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