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와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공간감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ongdaemun Design Plaza, DDP)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 여성으로서 살아남기 힘든 건축 업계에서 2004년 여성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인 플리츠커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수장이다. 하지만 전무후무한 혁신적인 건축을 전개하며 찬란하게 살다가 안타깝게도 2016년에 하늘의 별이 되었다.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을 보고 나도 저런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한 학생들도 분명히 많으리라. 나 또한 대학생 때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비트라 소방서 (Vitra Fire Station,1993)의 조형미에 홀딱 반해 공간디자인의 늪에 아직 빠져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정도로 팬까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녀온 페이퍼 뮤지엄 전시에서 나는 다시 한번 이 건축가에 대한 존경심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다.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힘든 실험적인 디자인 때문에 도면만 있고 실제로 지어진 건축물이 없어서 웃지못할 '페이퍼 아키텍처'라는 별명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페이퍼 뮤지엄의 전시 소식을 들었을 때, 별명 때문에 페이퍼 뮤지엄인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페이퍼 뮤지엄 (Paper Museum)
페이퍼 뮤지엄은 런던 패링던역 근처에 있는 자하 하디드 재단에서 운영하는 작은 갤러리이다. 2024년 9월 19일에 오픈해서 11월 16일까지 목, 금, 토요일에만 대중들에게 오픈하고 목요일은 점심시간 투어를 제공한다. 이 전시회는 자하가 1990년대 후반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대표적인 세 뮤지엄 디자인에서 페이퍼 릴리프(Paper Relief)의 속성을 이용해 어떻게 급진적인 건축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발전시켰는지 보여준다. 전시된 프로젝트는 미국 신시내티 현대미술관(CAC, 2003), 이탈리아 로마 센추리 아트 박물관(2009), 제안 단계에서 그쳤던 카타르 도하 이슬람 미술 박물관(1997)이다.
종이와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놀라운 공간감
페이퍼 릴리프 (Paper Relief)
페이퍼 릴리프는 종이를 사용해 여러 층의 입체감을 형성하는 예술 기법으로, 종이를 자르고, 접고, 층층이 쌓아서 3차원의 깊이감을 만드는데 효과적이다.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니라서 누구나 학창 시절 미술 수업시간에 쉽게 접했을 것이다. 자하는 그녀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2차원적 드로잉으로 그려냈고, 이것을 3차원 공간으로 표현하는 단계에서 하얀 종이를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미국 신시내티 현대 미술관(CAC,2003) 프로젝트는 자하가 처음으로 공모전에 당선되어 실제로 지어진 첫 번째 작품으로, 초기 그녀의 건축에 대한 철학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위의 릴리프 모형은 공간을 진입할 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계단을 올라갈 때 등등의 공간감을 보여준다. 색채와 마감재는 배제된 오롯이 형태와 볼륨을 보여주는 부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공간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컨셉 다이어그램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작업도 인상깊었다. 하얀 종이가 주는 밋밋하면서 담백한 느낌이 다이나믹한 형태를 만나 정적인 배경에 생기를 불어넣고, 형태와 빛의 상호작용으로 새로운 깊이와 감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갤러리 안쪽에 위치한 가장 큰 작품은 MAXXI 의 조감 모형은 건축물 주변에 도시를 형성하고 있는 건물들과 도로들 사이에서 어떻게 흐름을 가지고 상호작용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큐레이터 말에 의하면 이 모형에는 세 가지 원근이 사용되었는데, 어딘가 추상적이면서 역동적인 느낌은 다양한 각도의 시선 때문이 아닐까. 주변 건물은 평면적인 각도로, 반대로 건축물은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만들어 건축물에 이목이 집중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특히 여러겹으로 표현된 건축의 유기적인 흐름은 정말 눈물나게 아름다웠다.
전시 공간의 조명 레이아웃
어떻게 이런 얇은 종이로 깊은 공간감을 표현할 수 있었냐고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조명에 정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했다. 그래서 천장을 올려다보니 어떤 조명도 작품을 향해 직접적으로 향해있지 않았다. 바닥이나 반대쪽 벽을 향해 있어서 종이 모형이 가지고 있는 직선적이고 평면적인 느낌을 입체적으로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었다.
https://www.zhfoundation.com/exhibitions/zaha-hadid-paper-museums/
문득 대학생 때 교수님께서 모형을 무조건 하얀색으로 만들라고 하셨던 게 생각났다. 하얀색 모형은 불필요한 시각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형태와 공간의 관계만을 드러내기에, 한눈에 본질을 전달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스케치업이나 라이노같은 컴퓨터 툴로 손쉽게 뚝딱 만들어내는 데 익숙해진 나는 이렇게 직접 시각적, 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종이가 가진 가치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제 아무리 화려한 3D 랜더링 뷰를 들이밀어도 모형이 주는 감동은 넘어서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