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도입부와 음악
책.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여든 날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 처음 사십 일 동안은 소년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사십 일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는 그에게 이제 노인이 누가 뭐래도 틀림 없이 '살라오'가 되었다고 말했다. '살라오'란 스페인 말로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소년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다른 배로 옮겨 타게 되었는데, 그 배는 첫 주에 큼직한 고기를 세 마리나 잡았다. 소년은 날마다 노인이 빈 배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늘 노인을 마중 나가 노인이 사려 놓은 낚싯줄이며 갈고리며 작살이며 돛대에 둘둘 말아 놓은 돛 따위를 나르는 일을 도와주었다. 돛은 여기저기 밀가루 부대 조각으로 지워져 있어서 돛대를 높이 펼쳐 올리면 마치 영원한 패배를 상징하는 깃발처럼 보였다.
...
두 눈을 제외하면 노인의 것은 하나같이 노쇠해 있었다. 오직 두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띠었으며 기운차고 지칠 줄 몰랐다.
나.
도입부를 필사한 건 관념적인 이유 때문이자 굳어진 습관 때문이다. 책의 도입부가 중요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나는 책의 도입부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집착하곤 한다. 도입부는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는 예고이다 부탁이다. 앞으로 전개될 책의 공기를 맡아보라는 예고, 당신이 첫 장을 넘긴다면 작가의 고뇌와 시간들을 당신에게 주겠노라 하는 약속, 그리고 작가의 사색과 호흡이 당신의 일상을 차지하게 해달라는 부탁이다. 그렇기에 나는 책의 저자에게 예를 갖춘다는 심정으로 도입부를 타자 혹은 수기로 필사하는 행위를 즐긴다.
나.
숙련되지 않은 현대인 독자에게 글자 투성이 종이를 내미는 건 효과적이지 못하다. 나도 그 '숙련되지 않은 현대인 독자'의 범주에 속한다. 우리에겐 음악이 필요하다. 책의 공기로 호흡할 수 있는, 가사가 없는 음악. <노인과 바다>는 세계적인 문학답게 전용 플레이리스트가 있어서 별도로 음악을 수소문하지 않아도 된다. 음악을 찾는 건 아주 쉽다. 유튜브에 검색하면 된다. 노인과 바다 플레이리스트. 선택, 그리고 클릭.
세팅 끝. 읽을 준비 완료.
심장이 기분 좋게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