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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미정 Oct 29. 2024

꽃이란 글자에 넘어지다


허리까지 자란 진홍색 꽃 안에

보일 듯 말 듯, 사라질 듯 말 듯

그녀가 누워 있었다

 

벽에 걸린 밀짚모자의 띠처럼

건너편 오렌지색 지붕의 배경처럼 붉어진 그녀가 

    

잘린 줄기도 속눈썹 하나 보이지 않는 레테강이 흐르는 잠의 망각

풀려나온 환각이 한 잎씩 벌어졌다    

 

이곳은 양귀비 암실

통증과 불면의 밤에 핀 그녀는 중독된 감정

입술을 깨물면 하얀 진액이 흘렀다

암실은 그녀였다가, 잎이였다가, 환영이였다  

   

붉은 잎으로 들어가면 눈이 내렸고 흔들렸고 

가장 아픈 형식으로 계절이 졌다  

   

환각의 그림자에 생긴 검은 벌레들은 그녀의 잎부터 파먹었다

     

그녀가 자신의 입술을 뜯어내고 사라졌을 때 

나는 마지막 꽃잎이 닫히는 소릴 들었다  

   

습관처럼 모퉁이를 돌면 꽃에 걸려 자주 넘어졌다

바닥은 그녀의 행방을 묻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화분에 묻고 다시 피길 오랫동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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