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들어간 브런치 스토리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나를 위해 항상 기도해 주시는 분의 글에서, 남경 작가님의 부고 소식을 들은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경 작가님 프로필에 들어가 보니, 그간의 글과 마지막에 남자 친구분이 올린 글이 남아 있었다. 장례식장에 올라온 사진을 보자, 마음이 술렁였다. 젊고 이뻤다. 연예인보다 더 곱고 아름다웠다.
이제 막 세상에 빛을 보고 행복해야 할 젊은 아가씨가 왜 암으로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문득 ‘곧 나도 그렇겠지?’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아, 무섭다. 겁이 난다. 하지만 정말 살고 싶다. 이대로 세상과 등지고 싶지 않았다.
3주 전, 또 한 번 큰 통증이 몰려와 목숨을 위협받는 순간을 맞이했다. 통증이 시작되자, 지금의 병원도 본병원도 모두 나를 외면했다. 결국 혼자만의 싸움이 또 시작되었다. 이걸 이겨내지 못하면 통증 속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작년부터 벌써 네 번째 고비였다.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본병원에 가면, 교수님은 담담하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고만 하셨다. 작년 6월 처음으로 미칠듯한 팔 통증으로 입원했을 때 나는 교수님께 매달렸었다.
“이건 인간이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에요!”라고 절규하는 내 말에 교수님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선 뭘 원하냐고만 물었다. 난 할 수 있는 모든 검사와 처방을 요청했다.
모든 걸 끝이라고 생각한 교수님은 담담하게 PET CT 하나만 보면 된다며 피검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좋게 말해 “빠르면 두 달”이라는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나는 계속 살아남았다. 검사를 받기 위해 3개월 만에 다시 찾아갔을 때, 교수님은 살아서 돌아온 나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9월에 갔을 땐 조직검사를 해야만 산정 특례를 연장할 수 있다고 했다. 의료파업으로 뼈에 있는 조직검사를 해 주실 의사를 찾기 어려웠지만, 결국 10월에 검사 날짜를 잡았다.
검사 날이 장날이라고, 검사 전날 극심한 통증이 다리로 몰려왔다. 검사 일정을 미루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아픔의 고통을 참으며 검사하러 갔다. 검사는 마쳤지만, 죽을 것 같은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통증은 점점 심해져 몇 시간 간격으로 마약을 먹고, 정맥 주사도 맞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검사 다음 날 퇴원하라고 했지만, 혼자 본병원에서 밤을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밤중에 요양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본 교수님은 더 이상 해 줄 게 없다며, “원하는 곳으로 가세요.”라며 가퇴원 처리를 해 주었다.
딸과 함께 택시를 타고 오면서, 나는 통증을 꾹 참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소리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힘든 고비를 넘기고 다음 달 본병원에 갔을 때, 교수님의 얼굴은 놀람으로 가득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몇 달을 지났다. 올해 1월, 또 한 번 큰 통증으로 다리를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비참하지만 살고 싶어 전동휠체어를 샀다. 하지만 휠체어가 있는 곳까지 걸어갈 수가 없어 한 달 이상 사용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노력 덕분에 결국 혼자 전동휠제어를 타고 병원 치료를 받으러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는 마음에 더 없이 감사했다. 그렇게 순간순간 짧은 고비들을 넘기며 잘 지내고 있었다.
8월 말, 그 무서운 통증이 또 온 것이다. 새로운 약을 투여하면서 문제가 생긴 듯했다. 모두가 좋다는 줄기세포 주사를 맞은 뒤 염증 수치가 치솟았다. 또다시 참을 수 없는 이 무시한 통증을 느끼면서 나는 다짐 했다.
‘난 절대 이런 걸로 죽지 않을 거야! 벌써 3번의 고비를 넘겼는데 이깟 걸로 죽지 않아. 난 오뚜기야. 다시 일어날 거야.’라고 속으론 외쳤지만, 통증 앞에선 모든 게 무너졌다.
미칠 것만 같았다. 숨을 한 번 쉬면 다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온몸에 힘을 얼마나 주었는지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어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식사 시간의 음식 냄새도 역겨웠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내 모습에 옆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딸의 모습이 더 가슴 아팠다.
이때 가장 중요한 건 혈액순환이다. 딸은 내 모든 옷을 벗기고 마사지를 시작했다. 이 순간에 나는 잠시 숨도 돌리고 잠도 잠깐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마사지도 계속할 순 없다. 3시간이란 긴 시간을 엄마의 몸에 집중한 딸은 허리도 아플 거다. 쉬어야 했다. 통증은 마사지가 끝나면 어찌 알고 급물살을 타고 나에게 달려온다. 이런 상태에서 본 병원에 갔다.
나는 교수님께 간청했다.
“교수님 암에 염증이 올라와 너무 아파요. 항생제가 맞는 게 있으면 맞을 수 있을까요? 지금 있는 병원의 항생제는 스킨 테스트에서 안 좋게 나와 못하고 있어요.”
그러나 교수님은 “항생제론 암 통증은 줄일 수 없어요. 함부로 쓸 수도 없고요.”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너무 아파요!”
“글쎄요.”라고 말하는 얼굴은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항암제라도 처방해 주세요. 지금 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라고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말했다. 교수님은,
“항암제 처방을 위해선 CT도 찍고 피검사도 해야 하는데 그때까지.”라고 말씀하시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호르몬 제도 힘들다 하셨는데, 항암제를 견딜 수 있겠어요?”
“마지막인데 뭐든 해 봐야지요.”
“그렇지요. 마지막인데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요.”라고 말씀하시는 교수님은 '2주 후 CT 검사에 올 수 있을까?'라는 의문의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 요청이라 생각하고 처방해 주셨다.
나는 다음 검사 날을 정하고 딸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왔다. 찜질방에 누워 있자, 딸이 왔다. 딸은 더워서 싫다던 찜질방에서 나를 지키고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던 나는 딸이 쿠팡이츠에서 빙수를 보는 모습을 보고,
“이쁘나! 엄마 빙수 좀 시켜 주라. 단 게 먹고 싶네.”라고 말하자, 딸은 내가 좋아하는 인절미 빙수와 망고 빙수를 주문했다.
찜질방에서 먹는 빙수는 그야말로 나의 속을 식혀주었다. 생각보다 맛있었다.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딸을 보며,
“딸! 왜 병원은 가기만 하면 희망이 없다며 죽는다고 하지? 엄만 죽지 않아. 엄만 오뚜기야. 엄만 보란 듯이 2주 후에 CT 찍으러 갈 거야. 알지?”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곧 괜찮아 질 거야.”라고 말하며 나의 먹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난 죽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난 너무 행복하다. 평생에서 가장 편안한 시기이다. 오랜 병원 생활은 지겹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하는 가족과 내가 사랑해 주어야 하는 아이들이 있다.
나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았다. 아플 때마다 어떻게 통증을 멈추게 했는지! 우선 비싼 물이 가장 큰 역할을 해 주었다. 다행히 냉장고에 비싼 물이 몇 병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 물을 열심히 마셨다. 통증이 조금씩 약해졌다.
은물도 만들었다. 은물에 비싼 물을 타서 마시기도 하고, 비싼 노랑물을 쉬지 않고 마셨다.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아픔으로 경도가 조금씩 낮아졌다. 물의 중요성을 안 나는 다시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물을 찾고 있었다.
산화질소, 수소수, 알칼리 수 등 그때 새로운 물을 발견했다. 몇 년 전에 사기꾼에게서 속아서 산 기계가 나왔다. 깜짝 놀랐다. 그 기계가 지금은 3백만 원 가까이 하고 있었다.
그 기계는 일반 물을 수소수 물로 바꿔주는 거다. 하지만 일반 수소수와 다른 건 H3O로 바뀌어 그 효과가 1달 이상 지속된다는 거다. 일반 수소수는 H2O이고 바꾼 물을 1분에서 20분에 안에 마셔야 효과가 있다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기계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 물을 마시고부터 하루가 다르게 몸이 편해졌다. 다리의 통증도 매일매일 좋아졌다. 물도 달고 맛있었다. 하루에 2리터 이상씩 마셨다.
며칠 전 나는 CT 검사를 하고 왔다. 나는 다시 살아났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해결책을 주셨다. 나는 다시 웃으며 매일 치료에 집중하며 기적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의사들은 나에게 기적이라고 말한다. 매일 살아 있는 내가 신기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처럼 오뚜기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 속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오늘도 나는 치료를 게을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감사하며 살아간다.
2025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