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우리는 부와 명예, 건강 등 많은 것을 원한다. 하지만 노력 없는 결과는 없다. 세상은 공짜로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99%의 노력과 1%의 운”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결과에는 과정과 노력, 인내, 그리고 믿음이 따라야 한다.
2024년 6월,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달이다. 병원에서 나는 공식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의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빠르면 두 달….”이라고.
사실상 **이제 죽음을 준비하라**라는 말을 돌려 “그래도 다행히 준비할 시간적 여유는 있다.”라는 사탕발림이었다. 그 당시 암의 크기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말기 암 환자로 내 몸은 이미 한계를 넘고 있었다.
딸과 함께 사형선고를 듣고, 진료실을 나서던 순간, 수많은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것도 믿기지 않았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눈물만 흘렀다. 주위에선 모든 해 보자고 했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라 여겼다.
그 순간에도 아이들이 제일 먼저 걱정되었다.
‘이제 대학생인 딸과 고등학생인 아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까? 산 사람은 잘 산다는데 내 오지랖은 어디까지일까? 그래도 엄마가 있어야 하는데!’
우선 나는 살기 위한 계산을 시작했다. 가진 자산을 정리했고, 얼마 되지 않는 연금 보험도 해약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딸에게 금을 사 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마저도 살고자 하는 본능의 신호였던 것 같다.
처음 통증은 2023년부터 시작됐다. 팔다리가 아팠지만, 단순히 허리가 안 좋아서, 나이가 들어 어깨가 아픈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게 암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방치한 암은 팔부터 심한 통증이 왔다.
아팠던 오른팔은 점점 심해져 겨드랑이에 붙이고 손가락 하나 제대로 펴질 못했다. 팔을 움직이는 게 급선무였다. 통증은 말만해도 온몸이 울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나를 지배했다.
처음 시작한 치료는 파라핀 요법이었다. 두 개의 파라핀으로 손과 팔목을 쉬지 않고 치료했다. 오른팔을 움직일 수 없었던 나는 왼팔로 오른 손목을 들어 뜨거운 파라핀 통에 담갔다.
1분 정도 지나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번개처럼 온몸으로 번졌다. 어쩔 땐 초가 찢어져 다시 담글 때 화상을 입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1시간 이상 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잠시 쉬었다가 이번에 팔꿈치를 최대한 넣어 어깨까지 촛농이 닿도록 담갔다. 반복적으로 1시간 이상 더하면, 몸의 모든 영양소와 기운이 소진되어 멀리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너무 힘들고 지쳤다. 파라핀을 할 때는 손목도 팔도 조금씩 움직여지지만, 끝나면 다시 원상 복귀였다. 점점 지쳐갔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 3번 이상, 5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했다. 병실 바닥은 떨어진 촛농으로 지저분했다.
청소 아주머니가 오기 전, 나는 그것을 긁어내며 혼잣말로 마법을 걸었다.
‘오늘의 아픔과 슬픔, 외로움과 고통을 이 촛농에 담아 버리자. 분명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은 나아질 거야. 한 번에 좋아지는 게 어디 있겠어? 암이 그렇게 만만했다면, 사람들이 왜 그리 무서워하고 죽겠어? 힘내자. 나는 분명 극복할 수 있을 거야. 얼마나 노력하며 열심히 살았는데, 이대로는 못 죽어.’
저녁이면 딸은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마사지를 3시간씩 해주었다. 암에는 마사지만큼 좋은 치료는 없다. 만병의 치료는 어쩌면 마사지일지 모른다. 혈액순환이 잘돼야 모든 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아도 일반 평민은 고가의 마시지를 매일 받을 순 없다. 나 또한 대학병원에서 매일 오일 마사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딸은 내가 사 놓은 근적외선 괄사형 기계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진심으로 해주었다.
고주파, 초음파, 미세전류 등 여러 기계를 사용해 보았지만, 통증 해소에는 지금 내가 사용하는 근적외선 괄사가 으뜸이다. 처음은 60도의 최고 온도에서 시작한다. 이때는 딸의 손놀림이 중요했다.
조금만 천천히 움직이면 화상의 위험이 도사렸다. 하지만, 암 환자인 나의 몸은 그 열을 10분도 안 돼 모두 흡수해 버렸다. 15분쯤 되면 기계의 온도는 43-44로 떨어진다. 그때부턴 딸은 기계가 다시 열이 올라가길 기다리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온몸 구석구석을 문질러 주었다.
“엄마, 조금만 참아. 팔다리만 좋아지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엄마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데 이런 걸로 죽는다고 그래? 절대로 그런 일 없으니깐 점쟁이 말처럼 백작 부인으로 살면 되는 거야.”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딸의 손끝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오직 엄마를 살리겠다는 딸의 의지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마사지를 받는 동안 하루 종일 통증에 시달린 나는 잠깐씩 잠이 들었다. 그때의 잠은 최고의 보약이었다.
밤에 잠을 잘 때도 나의 치료는 끊이질 않았다. 통증으로, 옆으로 누울 수 없어 똑바로 누워야만 했다. 팔다리의 찢어지고 칼로 베는 듯한 아픔은 나에게 잠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두 개의 주열기로 아픈 다리와 팔에 끼면 미묘한 통증이 왔다. 커다란 암은 살아 숨 쉬듯 계속 움직였다. 한 시간마다 멈추는 주열기를 눌러가며, 긴 밤을 지새우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2주 후, 본 병원을 나와 다른 한방병원으로 옮겼을 때, 한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이 큰 암이 좋아지기도 쉽진 않지만, 운이 좋아 호전되더라도 어깨를 다시 사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라고.
머리가 하얘졌다. '지금도 몸을 살짝만 움직여도, 숨을 쉴 때마다 오는 통증을 감당하기 힘든데 팔을 영영 못 쓴다고?' 상상만 해도 무서웠다. 믿고 싶지 않았다. 좋은 생각을 하려다 보니 몇 년 전 점쟁이 말이 떠올랐다.
‘딸과 종로에서 사주를 보았을 때, 55세부터 모든 게 잘된다고 했어. 분명 이 고통은 내년이면 끝날 거야. 1년만 참자. 난 할 수 있어. 나를 믿어보자.’라고 매일 중얼거리며, 지난 1년 3개월 동안 살기 위해 하루 24시간을 죽어라 노력했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마약도 듣지 않는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올 때마다 자살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없었다. 이 모든 과정을 나는 이겨냈다.
그 결과 지금 나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호전되었다.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나만의 치료 방법이 암을 이기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24시간 치료에만 집중한다. 오늘,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찜질방에서 암과 싸우며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다.
암이란 놈은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 똑같은 치료를 매번 같은 시간이나 간격을 두고 일정하게 한다거나 주사를 맞으면, 어느 순간 암은 그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땐 그 치료를 멈춰야 한다.
항암 하는 분들도 매번 같은 간격으로 같은 약을 투입하게 되면 어느 순간 암은 그 약을 이긴다. 그래서 어떤 치료든 암이 내성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나는 많은 의료기기와 약물을 사용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한 기구나 약물을 오래 사용하진 않았다. 호전되는 상황이 늦어지거나 뭔가 치료의 느낌이 달라지면 즉시 새로운 기계나 치료법을 찾았다.
처음 사용한 파라핀은 팔이 좋아질 때까지 거의 1년 가까이 매일 사용했다. 1년 3개월이 지난 현재 나는 파라핀을 잘 포장해 창고에 두었다.
지금은 좌훈기와 라파, 주열기, 발 고주파, 일 라이트 매트, 유리듬 등 새로운 것들을 상황에 맞게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암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나는 그 변화로 살아남았다.
이제 나는 감사함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화도 잘 나지 않지만, 열 받아도 금방 식는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 축복인데 뭐가 더 중요하겠는가? 오늘도 나는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분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2025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