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매일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다. 같은 시간을 일해도 수익은 모두 다르고, 그 돈을 어떻게 운영하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도 달라진다.
내가 태어날 때 우리 집은 쫄딱 망해 천막 속에서 살았다. 엄마는 수술을 여러 번 했고, 아버지는 잘못된 보증으로 모든 재산을 날렸다. 언니와 오빠는 친척 집에 얹혀살며 눈칫밥을 먹었다며, 가끔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다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영양분이 부족해 학창 시절 자주 아팠다고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말씀하셨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를 더 아프게 만든 건 가난도 싫었지만, 알코올 중독과 폭력으로 얼룩진 집안 분위기였다.
밤만 되면 늘 두려웠다.
'오늘을 어떻게 지나갈까?
아버지는 얼마나 술에 취해 들어오실까?
누굴 때릴까?
엄마는 또 얼마나 날카로울까?'
이 집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니와 오빠도 각자 살아내기에 바빴다.
이 가난한 집안을 벗어나고 싶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했지만, 한 곳을 오래 다니지 못했다. 내 성격에 문제가 많았고, 항상 불안했다. 20대를 떠돌던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자리를 잡을 때, 나는 비로소 대학에 들어갔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는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4년간 장학금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대학원까지 같지만, 나와 맞지 않는 전공은 오직 학벌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배운 건 내가 얼마나 잘못 살았는지, 그리고 왜 내 성격에 문제가 있었는지 알았다. 이런 나를 고쳐가며 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딸과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단단히 맹세했다.
‘절대로 내 자식들은 나처럼 살지 않게 하리라. 아들딸 구분하며 키우지 않으리라. 가난은 죄악이다. 난 절대로 아이들에게 가난이란 지옥을 겪게 하지 않겠다.’
결혼 초, 망해가는 학원을 인수한 남편은 매일 힘들어했다. 나는 딸을 낳고 바로 학원 운영에 투입되었다. 남편은 고등부만 담당하고 나는 초중을 맡았다. 나의 복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자인 학원은 금방 자리를 잡았다.
1년이 지나자, 나의 수익은 웬만한 중소기업 연봉을 한 달에 벌었다. 하지만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자기 고등부 수업료만 따로 챙겼다. 나는 수익을 함께 관리하자고 여러 번 제안했지만, 남편은 단호히 거절했다.
우리는 무늬만 부부가 되었다. 각자가 경제를 관리했다. 나는 우리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 않았기에 남편에게 자주 부탁했다. 모든 걸 함께하자고. 누나 보이인 남편은 나의 어떤 제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들을 낳을 때, 남편은 내 통장을 보았다. 그 뒤로 누나와 투자한다며, 여러 번 자신의 몫을 요구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누나와 투자한다고 하자, 나는 남편을 달래고 설득해 가며 거절했다.
이때 싸웠던 기억들이 나에겐 아직도 많은 상처로 남아있다. 고인이 된 남편 누나가 지금까지 용서되지 않는다.
남편에게 돈밖에 모르는 독한 년이란 소리까지 들으며 모은 돈을 주식에서 한번, 사기꾼에게 한번 거의 날렸다.
한곳에 몰방하는 남편과 달리 나는 분산투자를 했다. 다행히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많은 돈을 날리고 마음에 상처가 커지면서 힘이 없어졌다. 내 삶의 고통은 44살에 유방암으로 모든 걸 보여주었다.
신기한 건, 학원을 운영하면서, 나는 보험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들었다. 내 걸 먼저 가입하고 나자, 남편이 걱정되었다.
‘나야 아프면 병원 가면 되지만, 남편이 아프면 어쩌지?’
이쁘지 않은 남편 병간호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나 또한 남편에게 병간호를 부탁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돈이 있어야 했다. 아니면 아이들이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을 위한 실비 보험부터 몇 개의 건강보험을 계약했다.
피보험자가 남편이기에 보험회사에서 남편 본인 확인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남편은 “병원에 안 갈 건데 왜 이렇게 가입해?”라며 짜증 냈다. 속으론 나도 밉고 들어주고 싶지 않았지만,
“본인 확인만 해. 내가 돈 내고 내가 보험료 타 먹을 거니깐!”
남편은 자신의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확답을 받고, 본인 확인을 했다. 그러자, 이젠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우리가 죽으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부실했던 아이들을 위해 나는 가능한 여러 보험에 가입했다.
그 당시, 선생님 월급을 100~150만 원을 줄 때였다. 우리 집 한 달 보험료가 300만 원 이상이었다. 친정 식구들은 “건물을 사야지, 왜 쓸데없는 보험만 가입하냐?”라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빚을 지고 건물을 산다는 건 내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은행을 이용해 레버리지로 재산을 증식한다고 했지만, 내 성격에 은행 빚이 있음, 편히 잠을 잘 수 없을 거 같았다.
주식이나 사기로 돈을 날리기 전에 건물을 샀으면 성공했을 텐데, 남편이 원하지 않았다. 몇 번의 기회가 있어 남편과 상의할 때마다, 남편은 그 돈으로 주식을 하자고 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남편을 믿어주고 싶었다. 어떻게든 좋은 관계로 살고 싶었다.
그게 얼마나 큰 기대이고 실수였는지, 모든 걸 잃고 나서야 알았다. 이제는 내 재산을 남편에게 주지 않는다. 트럭 일을 한 후, 남편도 더 이상 달라고 하지 않았다.
빚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일하는 남편을 보자, 마음이 짠했다. 나는 남편에게 제안했다.
“한 달에 얼마씩 갚고 있는 거야?”
“300만 원 정도.”
“그 돈 내가 갚아줄게. 나에게 300만 원씩 줄래?”라는 내 말에 남편은 잠시 고민하다,
“아니. 그냥 내가 갚을게.”라는 대답에 딸은
“아빠! 준다면 받아야지. 왜 싫다고 해?”라며 흥분했다.
“딸! 왜 그래? 아빠가 싫다는데. 엄마도 돈 없어.”라고 말하자,
“내가 당신에게 받으면, 또 주다 말 거 같아. 그냥 내가 갚을게”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변한 남편의 모습이 고마웠다. 나는 그 돈으로 금을 샀다. 내 생전에 해보지 못한 다이아 목걸이와 팔지, 반지 등도 마련했다.
지금 나는 남들이 바보라고 비웃으며 말리던 보험들이 나를 경제적 걱정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있다. 암이라는 병은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돈과 정보, 노력이 있으면 이길 수 있다.
나는 살면서 명품 옷이나 백 등 사치품은 거의 사지 않았다. 하지만 암이 내 몸을 지배한 후부터, 치료에 필요한 의료기기, 좋은 물, 영양제 등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한 가지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나는 좋다는 건 꾸준히 바꿔가며 사들였다. 치료 또한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병원 치료는 기본이고, 내가 산 기계들로 자면서까지 치료를 이어갔다.
나도 다른 환자들처럼 놀러 다니고, 누워있고 싶을 때가 많았다. 글도 더 많이 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내 직업은 ‘암을 치료하는 환자’라는 걸 잊지 않았다. 모든 시간을 암 통증을 줄이는 데 집중했다.
지금의 내 모습은 기적이 아니다. 내가 버티고 노력한 대가이다. 나는 암 환자라고 누워서 슬퍼하지 않았다. 오직 병원에서 해주는 것에만 의지하지 않았다. 아끼며 사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기에, 나도 많은 기계나 비싼 약을 살 때 돈이 아까워 많이 망설였다.
내가 돈이 많아서 그렇다고 말하며 비웃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솔직히 ‘여유’가 아니라 오직 ‘살기 위해’ 쓴 돈이었다. 누군가는 사치라고 말하지만, 내게는 생명과 직결된 필수였다.
대부분의 암 환자들은 실비로만 해결하려고 한다. 운동이라며 하루 종일 걷기만 하면서 병이 낫기를 바란다. 암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는 게 답답했다.
내가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세상에 돈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 같은 게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암 앞에서 나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포기하든지, 살아내든지.’ 나는 살아내기를 선택했을 뿐이다.
암이 나에게 왔을 땐, 내 몸과 마음을 그만 괴롭히고 휴식을 취하며, 아끼고 사랑해 주라는 뜻이라 여겼다. 12년 동안 나는 치료에만 집중하며 버텼다. 수없이 울었고, 수없이 무너졌지만,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다.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은 날보다 괴롭고 힘든 날이 더 많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껴주기 위해 계속 움직였다. 항암이나 방사선 같은 독약만 넣어 괴롭히지 말고, 지난 세월 힘들게 한 만큼 보상을 원하는 게 암이다.
지금 있는 병원의 환자들은 나의 좋아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가 마시는 수소수 기계도 자신의 돈을 들여 사려고 하지 않는다. 남에게 조금씩 얻어 마시며, 왜 자신들은 나처럼 좋아지지 않냐며, 나를 기적의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나는 기적이 와서 살아 있는 게 아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나 자신의 결과물이다. 돈도, 환경도, 고통도, 사람도 나를 대신해 주지 않았다. 나를 살린 건, 포기하지 않은 마음과, 내 삶을 지키려는 끈질긴 선택들이었다.
살면서 가난과 폭력, 상처, 아픔과 고통, 암 등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때마다 나는 그것들을 피해 간 적이 없었다. 정면으로 맞섰다. 때로는 울며 매달렸고, 때로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삶의 기적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날 만큼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과정이라는 걸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그 시간들의 증거다. 나는 앞으로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어려운 삶이 기다리고 남아있든, 나는 끝까지 싸워 이길 것이다. 나처럼 암으로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무리 힘들어도 웃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죽음을 앞두고 돈을 아끼지 말라고. 아픈 몸을 사랑하고 이뻐해 주며 귀히 여기라고.
2025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