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믿는다는 것 : 더 큰 사랑이 돌아온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믿음 속에서 성장한다. 부모가 자식을 믿어주는 만큼 그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부모의 불신은 자식을 불행 속에 밀어 넣기도 한다.
10년 동안 학원을 운영하며, 수많은 아이와 부모를 만났다. 상담을 해보면, 불안한 아이들의 뒤에는 대부분 심신이 불편한 부모님이 있었다.
어느 아이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소리를 지르곤 했다. 한번은 그 아이와 동생, 그리고 우리 아이들과 키즈카페에 간 적이 있다. 트램플린에 조명이 꺼지고 나이트 장 같은 조명 불빛으로 바뀌자, 아이들은 신나게 환호했다.
그때, 그 아이는 어둠을 틈타 여동생의 머리채를 잡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너무 놀라 소리치자, 나를 보고 그 행동을 멈췄다.
이유는 평시에 부모님이 여동생을 더 좋아하는 게 싫었단다. 부모님만 없으면 동생을 물고 때리며 학대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언제나 첫째보다 똑똑하고 말 잘 듣는 동생만 눈에 띄게 이뻐했다.
또 다른 초등 5학년 남학생은 학원에 오면 조용하고 노력형으로 보였다. 내 앞에서는 화를 내거나 자신의 성품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서는 엄마를 때리는 파렴치한 아이로 성장하고 있었다.
엄마와 상담하고자 했으나, 그 엄마는 언제나 아들 칭찬에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아이들의 문제행동은 부모의 잘못된 가치관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학원을 운영하며, 많은 아이를 보면서 나는 다짐했다. 엄마의 사랑과 믿음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았기에 나는 내 아이들을 믿어주었다. 또한 약속한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다.
나의 잘못된 행동으로 아이들에게 피해 갈까 봐, 어디서든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남편에게도 무슨 일을 하던 남의 눈에서 눈물 나는 일은 하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이들에게 나는 공부보다 “삶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침 인사도
“우리 멋쟁이, 이쁘니!
오늘도 많이 웃고 행복한 날 돼야 해. 공부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 멋쟁이와 이쁘니가 즐거워야 하는 거야. 친구들과 잘 지내고. 맛난 거 먹으며 오늘도 후회 없는 날이 되길.”
나는 항상 나가는 아이들을 포옹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웃으며, “엄마도!”라고 답해 주었다.
그런 아이들이 이젠 다 자라 성인이 되었다. 아들은 올해 수능을 치렀다. 기대만큼 결과가 안 좋았다. 순간적으로 나를 억제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심한 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 스스로를 먼저 다독이고, 다시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그래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학벌은 중요하더라.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니?”
“군대부터 신청할게. 군대에서 공부 다시 해볼게.”
“군대에서 어떻게 공부할 건데?”
“공군으로 가면 좀 편하데. 거기서 다시 준비해 보려고.”
“대학 하나는 어디든 붙어놓고 가야 해. 군대 다녀와서도 공부가 아니다 싶으면 다른 길을 찾아보더라도. 세상엔 할 일도 많고, 먹고 사는 방법도 다양하니 엄마와 함께 고민하자.
앞으로 3개월은 어쩌면 우리 아들에게 다시는 오지 않는 보너스 기간일 수 있어. 하고 싶은 걸 고민해 봐. 엄마는 운동을 했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하자, 아들은
“우선 운전 연수받고 차 몰고 싶어. 다음은 공군에 가려면 지게차 자격증과 토익 점수가 필요해. 그걸 준비할게.”
아들은 올 초 생일이 지나자, 즉시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내 차를 바로 운전하고 싶다는 아들에게 도로 연수를 받으라고 하자, 아들은 4시간의 연수를 받고 왔다.
나는 2번 더 받기를 원했지만, 아들은 더 이상 안 와도 된다는 교육자의 말을 자랑스럽게 했다. 나의 눈치를 살피던 아들은 누나와 “대전 성심당”에 가기로 했다며 보험 가입을 부탁했다.
4시간 연수한 아들에게 차를 주려니 내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반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들이 살면서 사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게 거의 없었다. 그런 아들에게 첫 도전부터 위험해서 안 된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토요일에 누나와 강남에서 만나 성심당으로 간다는 아들을 위해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아들은 금요일 날 기대에 부풀어 기분 좋게 병원으로 왔다. 아들을 보자, 토요일만 보험에 가입한 걸 후회했다.
그렇다고 내일 아침 바로 차 키를 줄 수는 없었다. 나는 아들에게 점심 먹고, 파주 스타디움과 마트, 은행 등을 돌자고 했다. 아들에게 키를 주면서 주차장을 향하는 내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했지만, 아들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시동을 걸고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데, 나는 첫 번째 소리를 질렀다. 비탈길에서 액셀을 밟으며, 핸들을 과하게 꺾어 주차된 차를 칠 뻔했다. 차를 피하면서 벽을 치려 하자,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며 차 문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차도에 끼어들 때도 핸들을 90도 이상 돌리는 기분이었다. 커브나 좌회전, 우회전 시 나는 또 한 번 큰 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달리는 차의 오른쪽 바뀌는 차선을 밟고 있었다.
스타디움에 도착한 우리는 나눠주는 생수를 받고, 주차 연습을 위해 넓은 주차장으로 갔다. 몇 번 헤매던 아들은 어느 순간 주차가 자연스러웠다. 역시 젊어서 그런지 각도 조절이 좋았다.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감이 넘친 아들은 놀랄 만큼 빠르게 안정되었고, 도로에서도 여유가 생겼다. 핸들과 차선 변경, 차간거리 등을 설명하면서 아들의 첫 운전에 나를 맡겼다.
우체국에 주차하는 아들을 보며 나의 마음은 조금씩 편안함을 느꼈다. 그렇게 2시간을 돌아다녔지만, 내일 바로 강남을 들려, 대전 성심당까지 간다는 게 안심되진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아들과 다시 한번 스타디움에 갔다. 주차도 더 연습시키고 파주 시내도 다시 돌았다. 어제보다 훨씬 안정적이었지만, 강남을 혼자 보내려니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딸에게 전화하자, 걱정하지 말라며 그냥 보내라고 했다.
딸과 강남에서 만났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 고속도로도 탔고, 가장 혼잡한 테헤란로도 뚫고 나온 아들이 이젠 어디를 간다고 해도 걱정이 덜됐다. 마음 편히 아이들 올 때까지 이런저런 치료를 하다 보니 어느새 6시가 넘었다.
밖이 어두워지자, 밤 운전이 처음인 아들이 다시 걱정되었다. 몸도 약한 아이가 아침 9시 반부터 지금까지 운전하며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졸음운전이라도 하면 어쩌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딸에게 연락하자, 먹을 거 먹고 좀 있다 출발한다고 했다. 어두운데 조심하라고 말하자,
“엄마 아들 주차가 완전 베스트 드라이버야. 걱정하지 마!”라고 말하며 나를 안심시켰지만, 처음 운전을 너무 멀리까지 보낸 것 같았다.
중간중간 연락하며 상황을 물어보자, 11시 도착 예정이란다. 나는 10분 전부터 병원 주차장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1시 정각이 되자, 나의 차가 병원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주차하고 내리는 아이들의 얼굴엔 뿌듯함과 행복이 가득했다.
두 명의 양손에 가득 든 성심당 빵과 케이크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딸은 아빠가 준 100,000원 모두 빵을 샀다며 자랑했다.
“빵을 십만 원어치나 샀다고? 이걸 다 언제 먹어?”라며 눈이 동그래진 나에게
“엄마! 케이크만 사만 원이 넘어. 집에 가져 가면 금방 먹어. 걱정하지 마!”라는 딸의 얼굴엔 기쁨과 만족감이 가득했다.
마음졸인 하루였지만, 믿은 만큼 조심히 다녀 온 아들딸이 너무 대견했다. 항상 누나에 눌리면서도 제일 좋아하는 누나와의 여행에 행복해하는 아들을 보며 잘 자란 아이들이 자랑스러웠다.
‘공부 좀 못하면 어때? 이렇게 착하고 성실하게 잘 자라 주었는데. 세상인 먹고 사는 길이 얼마나 많은데. 아들이 좀 부족하면 내가 채워주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자, 아들이 더욱 든든해 보였다.
“딸! 방학하면 우리 2박 3일로 놀러 가자, 엄마는 이제 운전 안 해도 되니까 너무 좋은데!”
“정말! 알았어.”라며 두 아이가 행복하게 웃어주는 모습에 나는 세상의 모든 걸 다 얻은 듯했다.
어릴 때부터 사랑으로 안아주며 키운 아이들이, 이제는 나를 사랑해 주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2025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