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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 : 암 환자의 마지막 욕심

by 김인경


‘사람은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라고 말하지만, 모든 죽음이 “생로병사”의 순서를 따르는 건 아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삶이기에, 자다가 혹은 예기치 못한 사고 등으로 떠나는 이들도 많다. 또한 나처럼 늙지 않았어도 병들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암 투병 12년 동안 수많은 환자를 만났다. 그중 많은 이들이 마지막까지 죽음을 거부했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작 나 역시 죽음 앞에선 똑같이 거부하는 사람이라는 걸 부인하지 못한다.

작년 6월, 처음 의사에게 “빠르면 2달”이라는 사형선고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머릿속에선 ‘곧 죽는다’라는 문장이 계속 울렸지만, 마음속 갚은 곳에선 “설마?”라는 단어가 나의 모든 감정을 누르고 있었다. 딸 앞에선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무서웠고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마지막 선택이라며 항암치료를 권유했지만, 죽음 앞에서 독한 약물에 몸을 맡기고 싶진 않았다. 마지막만큼은 평온하고 이쁜 엄마의 모습으로 아이들 가슴에 남고 싶었다. 하지만 통증을 제어하지 못하는 내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아무리 참아도 저절로 나오는 괴성과 몸부림, 처절한 눈물 등 나의 강한 의지력과 인내도 암 통증을 이기지 못했다. 너무 아파 안락사까지 생각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허용되지 않는 길이었다.


그런 고비가 올 때마다, 나에게 말했다. ‘이 순간만 지나면 다시 좋아질 거야!’라는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었다. 그렇게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내가 이 정도로 죽을 거라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주위의 시각은 달랐다. 담당 교수님도, 요양병원 원장님도, 간호사도 심지어 내 이쁜 딸까지도 엄마가 마지막이라 여기고 최선을 다해주었다.




지난 10월, 본병원에서 조직검사를 받던 날이었다. 나는 통증을 견딜 수 없었다. 아플 때마다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해도, 몰핀 주사를 혈관에 직접 주입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사를 맞으면 잠시 정신을 잃었다. 내 몸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엄청난 아픔에 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병원의 작은 침대에서 누워 있는 걸 확인하고 또다시 원망했다.


“왜? 눈을 또 뜬 거야? 나 다시 살아난 거야?”라며 혼자 중얼거리며 고통의 눈물을 흘렸다. 옆에서 어쩔 줄 모르는 딸을 보며 “엄마!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어!”라는 그 말이 지금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조직검사가 끝나고 의사는 다음날 퇴원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 밤에 요양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가셔서 잘 마무리하세요.”라며 퇴원 시켜주었다. 딸과 함께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오는 동안 나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병원에 도착하자, 간호에 지친 딸은 제대로 먹지 못한 저녁을 내 눈치 보며 겨우 먹었다. 계속 아파하는 내 모습에 딸은 옆에서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내 몸짓 하나하나에 반응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기적처럼 암 염증이 잡히기 시작했다.


비싼 물과 항생제, 아미그달린, 주열기, 파라핀 등 여러 치료 덕에, 3주가 지나자, 혼자 화장실은 다닐 정도가 되었다. 식사도 조금씩 하면서 몸의 움직임이 나아지는 모습을 보며, 딸은


“엄마! 이젠 좀 살만하지? 모두가 엄마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더라고. 근데 엄마만 몰랐던 것 같아.”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 내가 그리 심각했어? 나야 너무 아파서 죽고 싶긴 했지만, 이걸로 죽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라고 말하자,


“엄만 정말 모르는 거 같더라고. 의료진들은 엄마를 마지막으로 여기고, 엄마가 원하는 걸 다 해주더구먼! 엄만 정말 몰랐어?”라며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심한 암 통증은 마지막을 알리는 신호라는 걸 나만 몰랐던 거다. 많은 암 환자들이 마지막에 통증에 못 이겨 몰핀주사로 생명을 연장한다. 나는 그 몰핀주사조차도 반응하지 않았는데 죽음은 인정하지 못했다니? 얼마나 어리석단 말인가?


큰 고비 4~5번, 매달 생리 때마다 오는 크고 작은 고비들을 넘기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통증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든 감당할 수 없는 통증이 오면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 통증은 어느 정도일지 가름이 되진 않는다.



얼마 전 새로 입원한 언니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 언니는 말 그대로 ‘버티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적적으로 좋아진 내 모습을 보고 뭘 했는지 궁금해하며 물었다. 마침, 난 또 한 번의 고비를 새로운 수소수 물로 넘긴 직후였다.


언니와 몇몇 환자들이 그 기계를 사달라고 했지만, 나도 잘 모르는 거라 개발자와 연결해 주었다. 주문을 해주었지만, 언니를 사주는 게 잘하는 건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언니의 확고한 의지에 주문해 주었다.


1주 정도 물을 마신 언니를 식당에서 만났다. 정말 기적같이 좋아졌다. 언니는 나에게 이렇게 좋은 기계를 알려주어 감사하다며 식사하자고 했다. 그때부터 언니와 나는 자주 식사도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언니는 몸이 조금 좋아지자, 또다시 독성 항암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나는 반대했다.


“지금 좋아졌어도 항암 독이 몸에 많으니, 이 물로 독을 좀 더 빼고 기운이 지금보다 올라오면 그때 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라고 진심으로 말렸지만, 언니는 “의사가 하라 했다”라며 망설임 없이 밀어붙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렇게 2번 항암치료를 하고 언니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언니는 마지막까지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본병원 의사가 호스피스를 권유했지만,


“나는 암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됩니다.”라고 말하며 거부했다.


언니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나에겐 장어 먹으러 가자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렇게 1달 정도 치료를 이어가다 며칠 전, 하늘나라로 떠났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마지막에 언니가 조금만 빨리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면…. 언니의 마지막은 덜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나라면 어땠을까? 똑같았겠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우리에게 미련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넘나드는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진다. 머리로 인정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요즘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도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죽을 거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면 어쩌지?’


지금 나는 매일 기적 속에 살아있지만, 죽음이 내 옆에 있다는 걸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나는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귀한 오늘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


많이 웃으며 행복하게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생각만 하면서 오늘 하루도 감사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202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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