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 기획자가 커리어 찾다가
나는 아주 운이 좋게도 상위 N%에 들어 미국 경제의 중심부로 발령을 받으신 유능한 공무원 아버지 덕분에어린 시절 중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미국의 초등학교를다녔다. 다행히 별다른 인종차별을 경험하진 않았고, 만약 했었다면 기억에 남기지 못할 정도로 맑고 순수했던 그 시절의 기억력에 감사한다. 인생에서 어느 한 시절만큼은 되돌이켜보았을 때, 어느 곳하나 때 묻은 자국 없이 그 시간의 풍경이 오롯이 나의 '인생한컷'처럼 남는 일은 참 축복과도 같은 일 같다.
미국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친절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나서서 손을 건네줄 수 있는 따스한 오지랖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일이나 시간을 침해받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했다. 길거리를 지나는 낯선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받는 일에 인색하지 않은 것에서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도 언제나 필요하다면 건넬 수 있는 한 마디가 준비된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신나게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가야 할 때가 되면, 정중히 끊고 가야 할 때를 알고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친절에 있어선 F이고, 책임에 있어서는 T인 사람들. 참 그 중간이 잘 어우러진 사람들. 참 다행인 것 같다. 그 반대가 됐더라면 미국은 그렇게까지 크게 발전하지 못했으리라. (라는 조바심 나는 판단을 해본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즈음 때의 일임에도 선명히 기억하는 날이 있다. 집으로 학생부 리포트가 날아온 날이었다. 담임교사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의 성향이나 성격 등을 유심히 관찰하여 두었다가 성적뿐만이 아니더라도 학생에게 특별히 칭찬할 말 등을 comment란에 적어주셨었다. 필기체인지 예술인지 모를 정도로 쓰여 있던 그 선생님의 리포트를 한참 바라보던 아빠가 영어를 읽거나 이해하진 못하셨던 엄마에게 이것 좀 보라면서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우리 딸이 어떤 말을 들었을지 무척 궁금해진 엄마는 집안일을 하다가도 토끼눈이 되선 아빠한테 그걸 여과 없이 잘 통역해 보라고 주문했다. 아빠는 그 즉시 엄마를 위한 통역을 시작했다.
"애한테 책임감이 너무 많대." 그 말을 들은 엄마가 이게 웃어야 할 칭찬인 건지 걱정을 해야 할 악평인건지를 머릿속으로 해석을 해보고 있던 찰나, 뼈 때리는 자세한 의역이 이어졌다. 아빠는 “한마디로, 애가 여기저기 오지랖이 너무 넓다는 거야." 하고 박장대소했다.
그랬다. 나는 숙제를 제대로 못한 와중에도 다른 친구들이 숙제를 못했다고 하면 그 곁을 지키며 자기 숙제는 거들떠도 안보는 아이였다. 다른 아이의 숙제에는 열과 성을 다하던. 안 풀리는 문제들도 남을 위해서라면 척척박사처럼 풀어내던. 그 아이는 한국에선 정이 많다며 인심 좋은 어른들이 애쓴다며 쓰다듬어 줄 수 있었겠지만, 미국에선 "She is too much responsible for everything.(그녀는 모든 방면에 있어 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해요.)" 라는 평을 받았다. 어린 나는 그 글자를 정확히 읽어낼 수도, 아빠의 눈으로 읽은 엉문장의 내용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지만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직감은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too(너무, 지나치게)'와 'so(정말)'이라는 단어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떤 용도와 목적으로 쓰이는 지를 알고 나서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이렇게 날 때부터 K-장녀로 태어나 외국에서 말아주는눈칫밥까지 먹어가며 키워왔던 '반 책임감 반 오지랖'의 증상은 어른이 된 이후에도 무의식 속 잔존해 있었다. 나는 항상 내가 잘되는 것보다 남의 잘됨을 바라보는 일에서 힘을 얻었다. 이런 알 수 없는 찐 오지랖은 서른이 되기까지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날 집어삼켰다.
흑백요리사에서 감명 깊게 봤던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리 요리사님의 정체성 혼란과 같은 일이었다. "나는한국 사람인가? 미국 사람인가? 나는, 비빔인간입니다."라고 인생요리를 만들라는 미션에 내놓았던 비빔밥을 소개하며 여러 가지 색깔의 음식이 섞였지만 한 가지 맛을 낸다고 말씀하시던. 나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비빌 수 있을까? 아니, 비빈다고 하더라도 그 맛은 도대체 내 인생에서 어떤 맛을 낸단 말인가.
하지만 굉장히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에이전시 대행사에서 AE로 일을 하던 당시에 내가 담당하고 있는 브랜드사를 위해서 서포트하고 대행하던 일을 하면서는 이런 남을 위한 친절한? 오지랖이 쉽게 발동되지 않았다. 조금씩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오지랖은 피로감으로 덮여갔다.
1) 내가 (이렇게 자기 고집만 강한) 이들을 위해 다른 의견을 피력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싸워야? 하는 일에 피로를 느껴갔다. 주체성과 해야 할 일이 반비례하는 느낌. 여러 클라이언트를 동시에 관리하면서, 모든 클라이언트들에게 받는 비용, 상대 광고주의 나이스한 친절함.... 등과 전혀 관계없이 모두 주인의식을 갖고 나의 사업을 하듯 일하라는 건 차등 없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영역으로 느껴지곤 했다.
2) '잘되면 내 탓, 안되면 너의 탓'이 되는 클라이언트에게 신물을 느껴갔다. 특히나 다른 복잡한 요인들 중에서도 매출이 감소한 요인 중, 대행사의 역할 중 하나만 콕! 짚어서 목을 죄여오는 분들에게.
3) 내가 한 일에 대한 결과를 정확하게 집계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내가 대행한 일에 대해서 집계할 수 있는 모든 정량화 또는 정성화된 수치를 총동원해서 월 말마다 리포트를 쓴다고 하더라도 (피력하고 유리한 부분만이 교묘히 더 잘 드러나게 하는 요령만 늘 뿐... 이기도 했고) 그 성과가 프로젝트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는 Back (관리자) 단에서의 중요 고객 데이터를 보며 어떤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지는 간접적으로 상상, 가늠 정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러다 보니 큰 동기부여를 받는다기 보단 나의 일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 자체에 에너지를 많이 썼던 것 같다. 물론 나를 정말 좋게 평가해 주던 광고주 분들이나 밤샘 제안서를 작업하고 수주를 성공시킨 프로젝트들 중에 모든 애정을 쏟았던 일은 아주 뼛속 깊게까지 남아있었지만.
그렇게 시작되었었다. 서른이 되기까지 총 5-6번의 회사 경험, 아니 퇴사 경험이 생기게 됐던 이 여정은.
그렇게 진짜 원하는 것을 찾으려고 애쓰며 알게 되었다. 나의 문제해결력과 창의력은 누군가를 직접 돕는다고 생각이 들 때 가장 극대화된다는 것을. '나만 잘되는 일'도 싫고, '너만 잘되는 일'로 인해, 내가 성장하는 일이 없는 것도 싫다면 너와 내가 모두 잘되어야 한다. 가끔 만나는 친구들이 그다음 커리어와 진로를 결정하는 일과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큰 힌트가 되어주기도 했다. "너는 네가 좋아하는 걸 누군가에게 전달할 때, 눈빛이 반짝거리고 일렁여."
첫 번째 직장에서 온라인 마케팅 대행사 AE로, 인하우스에서 온. 오프라인 마케터로, IT 웹/앱 기획자로,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화장품 뷰티브랜드의 모회사에서 PM이자 운영관리자로, 구독자 20만이 넘던 유튜브 채널 운영하는 일을 총괄하던 TF팀장 일과 웹 기획, 마케팅 그 경계 없는 범주의 일을 하던 기획자로 일했다.
만 서른밖에 안된 나이에 총 5~6번의 회사 경험, 아니 퇴사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건 분명한 욕심과 이유가 있었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면. 모두 다른 일을 했는데 소속된 팀이나 맡은 포지션에 '기획'이란 단어가 빠진 적이 없었다.
기획이라는 일 자체도 참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마치 사랑이라는 것을 각자 정의하기 나름이자, 정말 어려운 것처럼. 일을 할 때마다 허구한 날 '기획자는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인 거야? 잡일 시키기 제일 좋은 사람인가?! 왜 기획자의 책임이 9할이지?'라고 열을 냈다가 회의감에 빠졌다가 자아에까지 혼란이 오는 사춘기의 계절을 수도 없이 보냈었다.
마케팅의 정의는 경험으로 쉽게 이해도 되고 내 나름 정의가 있지만, 기획은 아직도 덧붙일 말이 많을 것 같이 ing라는 점에 매료되었다.
적어도 기획은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도 너무 다른 것들을. 그리고 모든 일에 시초가 된다. 모든 프로젝트의 출발은 기획에서 시작해, 그 모든 프로세스에서 빠질 일이 없었고 한번 벌어진 일의 마침표를 찍는 것까지. 심지어는 직인이 마르고 나서 까지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직군이다. 그러다 보니, 내공으로 인한 맷집이 생길수록 엄청난 책임감이 따라오지 않고서 매끄럽게 흘러갈 수가 없는 일이란 걸 단전에서부터 느끼며 환희할 때도, 때론 흐느끼고 있다.
나이 대비? 나름 많은 회사에서 '기획'이란 일을 하면서, 기획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내 나름대로 정의해보려고 했던 노력만으로 내게 큰 자산이 되었다. 기획의 가장 큰 앙꼬는 대화를 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발견해 낼 수 있다는 것을. 그 과정 속에서 만난 모든 것들을 애정하고 충분히 익혀주어야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향을 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얻은 인사이트가 있다면, 그 과정에서 나의 눈빛은 상대를 향해 반짝여야 가장 좋은 성과를 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통 성과는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정도곤 했다. 적당한 오지랖이 호기심과 깊은 공으로 넘실거리다 끝까지 해내려는 책임감을 만났을 때 원하던 세상이 열린다.
이런 기획자의 길을 걷다가 얻은 인생의 또 다른 큰 수확은, 나와의 대화를 많이 해보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그려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애초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면 곧 죽어도 하고 싶은 이유를 만들어 내고 나서야 발을 떼던 사람이고, 그게 또 남을 위하는 일이거나 순수히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버선발로라도 뛰어 나가려는 사람이다.
스스로 가장 좋을 때는, 설령 내가 준비한 아이스크림을 주는 일을 하더라도 그 위에 체리를 하나 더 얹어 상대에게 플러스 감동을 주었을 때다. 내 마음대로 붙이고 부르는 'cherry on top'의 법칙이다. 하나 숨겨둔 포인트가 있었는데 그게 내 진심이었어서 상대가 더없이 기뻐할 때 행복하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 애정하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다. 온전히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을 향해 있는 나의 마음을 모아 전하고, 또 그가 읽는 동안 서로는 참 좋은 대화를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 기획이 편지 쓰는 일과 닮아있다고 느꼈다. 이런 일은 비단 편지를 쓸 때뿐만 아니라 내 생각보단 훨씬 다양한 일로 이어질 수 있단 걸 깨달았다. 그 일은 회사란 울타리를 나와 있는 지금에도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꼭 모두가 풍족하고 만족할만한 수입으로 이어지진 않는 일이라도)
나의 남은 인생 진로를 잘 기획해가고 싶었다. 그 마저도 기획의 과정이자 앞으로도 계속 걸어가야 할 여정이기에. 지금은 이렇게 얻은 보물들을 모아서 또 다른 지도를 그리며 나아가고 있다. 또 다른 보물들은 순수 100% 책임감도, 오지랖도 아닌 그 애매한 지점에서 출발해 계속 기획하며 나가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보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