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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음 Oct 27. 2024

금쪽이 어머님,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초등 영어 강사의 삶

  중.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는 강의를 많이 해봤고 그들의 중2병은 사회생활을 통해 나를 단련시켜 줬던 고마운 빌런들에 의해 아주 귀여운 수준의 애교 증상이었기에 그들과 함께 배우고 지내는 일에는 남다른 여유가 있었다. 


  이런 청소년들의 마음을 정말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소설 중, <아몬드>는 내게 지침서 같은 역할을 했었다. 아이들의 행동발달적 측면보다도 더 중요한 본질을 놓치지 않게 해 주었다. 보이는 대로만 믿으려는 어른들에게 보이지 않는 그들의 속마음은 금쪽이에게서 터져 나오는 증상에 시선을 뺏겨 없어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난제가 탄생한 배경보다는 그 난제가 보이고 있는 증상 자체에 관심이 많아 보였으니까.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쉬이 사도세자의 난폭함과 영조의 잔혹함에 조명되는 듯 하지만, 영조의 자녀교육법에서 잘못된 점이나 사도세자가 겪고 있던 정신병 혹은 그를 야기했을 법한 요인들을 떠올리며 교훈을 삼는 이들은 적은 것 같다. 


  특성화고등학교를 다니는 여러 학생들을 만나다 보니, 참 개성 있는 아이들 중에서도 유난히 빛을 잃어버린 친구들이 그 빛을 모두 연소해버리고 나서 양초처럼 겨우 연기를 피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런 친구들에게 건넨 한 마디는 그들에게 잠식되어 있던 애정받고자 하는 욕구에 기름을 부어 폭발해 버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물론 건강하게 폭발할 때도 있지만, 가끔은 옳고 그름에 대해서 판별하지 못한 채로 폭발을 해버리기도 한다. "선생님을 좋아해 주고 하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지만 금쪽아, 그건 선생님께 예의가 없는 행동이야."라고 가르쳐 줄 수 있던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처음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동굴 밖으로 끌어내 주는 일은 나의 일이지만,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는 계속해서 그 곁을 지켜주며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주어야 하는 일은 부모님이나 가족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 마음이 아려오기도 했다. 


  학원에서 초등학생들을 지도하는 강사가 되기 전에는, 초등학생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말이나 통하는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아닌데 내가 과연 그들과 잘 소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초등학생들도 알만한 건 다 안다. 저 선생님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지금 애정을 달라고 표현하는 이 액션을 알아봐 주는지, 내가 어느 정도 때를 써야 원하는 일을 해주는지 말이다. 조금 더 고도화된 친구들은 어느 정도가 그 선생님이 화를 안내는 범위인지를 알아채고 그 선에서 한 줄 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놀기도 한다. 


  학원의 한 금쪽이는 (금쪽이라 불렀다 해서 애정이 없는 건 절대 아니다!)  완벽주의라는 멋진 증상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 실상은 생각과 같지 않다. 자신이 100점을 맞을 수 있을 것처럼 공부를 해온 날에는 얌전히 공부해 온 내용을 적어낸다. 


  하지만 자신이 공부를 하지 않은 날엔, 공부를 안 한 자신이 아니라 공부를 안 해서 60점 밖에 못 맞을 자신을 향해 부모가 쏟아질 비난과 질책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 부모에 대한 역정을 거친 언행과 함께 책상에 그대로 토해낸다. "어차피 60점 밖에 못 맞을 건데, 나는 집에 가면 엄마한테 XX다.(혼난다, 죽는다...)"는 매일 하는 그의 유행어다. 아이가 수업을 잘 마치기만 하면 주는 간식도 바닥에 던져버리거나 안 받겠다고 한다. 나는 이 아이의 증상을 '혼자 싸우고 있는 외로운 사투'라고 표현하고 싶어져 마음이 쓰렸다.


  스스로 완벽하지 못하면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걸, 그리고 그 인정을 못 받는다면 간식 따위는 중요한 것도 얻고 싶은 것도 아닌 것이다. "이런 화요일을 만든 사람을 X이고 싶다. 세상의 모든 시험이란 시험지는 다 찢어버리고 싶다." 심지어는 부모를 어떻게 하고 싶다고까지 한다. 부모님이 붕어빵을 안 사주셔서 서운했는지 "우리 집만 돈이 없는 것 같아요! 돈 없다고 붕어빵도 못 사준대요! 세상에서 나만 맨날 돈이 없어!"라고 한 날에는 내가 어릴 적 하던 생각과도 닮아있었어서 순간 향수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아, 그 시절엔 나도 그런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어른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잘 헤아려 보지 못하듯이 어른이 돼본 적이 없는 아이가 그 어른들의 언어와 사정을 헤아릴 리가 만무했다. "안돼"만 듣다 보니, "왜 안돼"가 되게 되고 모든 전제가 '안된다'에서 출발하다 보니, 엄마의 마음보다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아쉬움에만 도착하게 되었던 대화와 싸움의 여정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엄마가 아이에게 항상 "안돼!" 하기보다, 붕어빵이 사주고 싶었지만 너무 살이 찌는 식습관이 걱정됐던 그 마음과 다음번에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걸 아이의 언어로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편의점 알바를 하다가 카운터 앞에 놓인 장난감 캔디를 사달라고 했던 아이에게 아빠가 되시는 분께서 해주었던 말이 모범적인 예시로 떠올랐다. 


"금쪽아, 아빠가 이 캔디를 사주고 싶은데 딱 100원이 모자라네? 아빠가 사주고는 싶은데 우리 집에도 이런 게 많으니까 집에서 오늘은 그거 먹고 다 먹으면, 아빠가 100원 챙겨 와서 금쪽이 사줄게!~ 금쪽이가 아빠랑 한 약속 기억하면, 아빠도 지킬 테니까 그러면 괜찮지?" 


  오은영 선생님의 설루션을 많이 챙겨보지도 않았을뿐더러 육아에 대해서는 심리학을 통해 글로만 접해봤었다. 아이를 교사로서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과 엄마가 되어 '키우고 양육하는 일'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


  그런데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한 번도 뵌 적도 없는 정말 존경스러운 어머님과 아버님들의 얼굴이 보일 때가 많다. 아이가 평소 쓰는 언어에서 그리고 행동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평소 습관이 그대로 보인다. 그리고 쉽게 성향과 성품까지도 어렴풋하게 유추가 된다. 어릴 때 '엄마 얼굴에 먹칠을 한다.'라고 하기 전에 엄마도 거울에 자신이 아이를 향했던 얼굴이 어땠는지는 비춰봐야 한다. 엄마가 아이에게 뱉어낸 먹물이 다른 곳에 옮겨 튀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딱 하나는 알겠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인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 

어딜 가나 "참 예쁘다."라는 말을 듣는 아이들은 내가 아는 선에서 적어도 딱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감사합니다!"를 시키지 않아도 할 줄 아는 아이다. 인사가 몸에 베인 아이들이다.

사탕 하나를 주더라도 한 손으로 날 쳐다보지도 않으며 받아 채가는 아이가 있는 반면, "감사합니다!" 하는 아이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던 아이들은 그냥 존재로도 사랑스러운데 정말 이상하게, 꼭 성적마저 우수하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물컵을 쏟아 선생님의 컴퓨터와 무릎이 젖었음에도 그 자리에서 멀뚱히 날 쳐다보던 아이에게 "금쪽아, 선생님이 여기에 물컵을 놓은 잘못도 있지만 금쪽이가 교실에서 뛰지 않고 조금만 조심히 해줬더라면 물이 엎질러져 선생님 물건이랑 옷에 물이 쏟아지지 않았을 거야. 그럴 땐 죄송하다고 하는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순간.... 그런 거까지 내가 왜 (부모가 해줄 고생을 사서) 해줘야 하나 싶은 생각이 그 무심한 아이의 무표정에 결심처럼 굳어져 버렸다. 나 또한 사람인지라 마음이 가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어디까지가 나의 교육의 의무인지가 헷갈릴 때가 많다. 


 학원에서 돌아온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학원에 보낼 때 엄마는 무슨 심정이었어? 학원 가면 내 모습이 안 보였을 텐데, 내가 가면 어떻게 행동할지 엄만 알았어? 아니 그 애들의 엄마들은 애들이 학원 와서 이렇게 행동하고 말한다는 걸 알까? 안다면 너무 속상하지 않을까?" 물음표를 쉼 없이 쏟아내던 내게 엄마는 말했다. 


"당연히 다 알았지, 엄마는 알지. 눈에 훤하지. 안 그렇다면 진짜 문제가 있는 거야. 나의 부족함도 있겠지만 아이를 믿기도 하는 거고 그리고 선생님이라는 새로운 자극을 만나면서 조금씩 확장된 가는 세계를 만나기를 바랄 뿐이지. 너무 심할 때라면 안 되는 것만 확실히 알려주면 돼." 부모는 자식에게 원하는 걸 말해야 할 의무보다 하지 않아야 할걸 정확히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다 큰 어른의 성숙함을 볼 때도, 그 "감사의 법칙"을 척도로 사용하곤 한다. 타인의 베풂에 대하여 무심한 사람은 그 입장으로 살아봤거나 건넸던 적이 없던 사람이다. 혹은 건넬 것이 없는 사람, 내지는 건넬 수 없는 사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차를 운전해 봤던 사람이 기름값을 알고 거리다 들어가는 기름의 양을 안다. 그렇기에 다른 이를 태워주고 데려다주는 일에 담기는 수고와 정성을 깊이 공감할 수 있다. 받기 전에 주었던 사람은 제대로 감사할 줄 안다. 그걸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깊이를 느낄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세계가 그만큼 넓고 깊다는 뜻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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