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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성스러움과 속세 사이

루카스 크라나흐 & 피테르 브뤼헐

웬만한 셀럽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유명해진 '마르틴 루터'의 초상화입니다. 아내와 함께 있는 초상화로 골라 봤습니다. 지금까지의 유명세가 분명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룬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렇다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얘기를 꺼내진 않을 겁니다. 작가님들 중에 혹시 ' 이 초상화를 그린이가 누구일까?'하고 궁금해하신 적이 있으실까요? 그렇다면, 오늘만큼은 엄지척 해 드리고 싶습니다.




'종교개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마르틴 루터'의 초상화!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역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도움을 준 이들이 많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억울한 죽음으로 씨앗이 된 이도 있고, 그 씨앗을 잘 틔워 전반적인 배경을 형성하도록 도운 이도 있습니다. 비록 자신의 시대에 혜택을 볼 수 없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자양분이 되어준 이들도 있지요. 이런 주변의 상황들이 아귀가 맞아떨어져 '혁명' 혹은 ‘개혁'이란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역사를 장식합니다.






Portrait Diptych of Martin Luther and his wife Katharina von Bora, 1529, / www. wga.hu.






이 이중 병풍은 마르틴 루터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를 그린 것으로, 1529년에 제작되었습니다. 오랜 친구인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 덕분이지요. 그는 루터의 오랜 친구이자 종교개혁의 협력자였습니다. 어쩌다 보니 루터와 카타리나 폰 보라 부부의 주요 초상화가가 되었고요. 오일과 템페라 기법으로 붉은 너도밤나무 판에 그려졌습니다. 현재 독일의 헤센 주립 박물관( Hessisches Lanesmuseum, Darmstadt)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 Katharina von Bora, 1499-1552)가 루터의 도움으로 12명의 수녀들과 함께 청어 통이 실린 마차에 숨어 비텐베르크로 탈출하게 됩니다. 루터는 탈출한 수녀들의 결혼을 주선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제안된 여러 혼담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1525년 26살의 카타리나와 41살의 루터는 결혼합니다.




카타리나는 살림살이를 도맡아 했습니다. 그들은 작센의 선제후 요한으로부터 결혼 선물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기숙사였던 '검은 수도원'(Black Cloister)을 거처로 받았습니다. 드넓은 토지를 관리하고 , 가축을 키워 팔았으며, 양조장을 운영하여 가족과 하숙하는 학생들, 손님들을 위해 식량을 조달했습니다. 전염병이 돌 때는 간호사들과 함께 병원을 운영하기도 했고요. 여섯 자녀를 낳았고, 네 명의 고아를 입양하여 키웠습니다.





줄스도르프의 여주인
비텐베르크의 새벽별
케이티, 나의 갈비뼈



Katharina von Bora/Pfarrbereich Sandersdorf-Brehna





고생했다는 듯 …그녀의 노고를 기억해 준 누군가의 센스 있는 마음을 지나칠 수 없어 가져와 봤습니다.



The Luther Family and Music/Musee protestant








오늘은 마르틴 루터의 친구이자 그의 커다란 조력자였던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와 농민의 생활상이나 서민의 풍속을 그렸던 피테르 브뤼헐(Pieter Brueghel the Elder , 1527-1569)의 그림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tumblr_nxanfzePN51qc6wuio1_1280.jpg Signature of Lucas Cranach the Elder from 1508/Tumbir:a winged snake with rubyring





먼저 루카스 크라나흐의 독특한 서명을 한번 보실까요. 날개 달린 뱀이 루비 반지를 물고 있는 형태의 서명 말입니다. 1508년 1월 6일, 작센의 선제후 선명공 프리드리히( Frederick the Wise)로부터 날개 달린 뱀이 루비 반지를 물고 있는 형태의 문장( Kleinod)을 자신의 문장으로 부여받았습니다. 이 상징은 그의 작품에 1508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3401016723_4707d4fff1_z.jpg Cranach's Symbol/ferrebeekeeper-WordPress.com




이 날개 달린 뱀은 인본주의적이거나 상형문자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라틴어와 독일어로 그의 이름 크라나흐에 대한 말장난으로 그리스 신화의 시간의 신 크로노스( Kronos)를 나타낼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534년 이후에는 뱀의 날개가 새의 날개처럼 접힌 형태로 바뀝니다. 1537년부터는 그의 아들 한스의 사망과 관련하여 새로운 형태가 쓰이는데, 이는 그의 아들들의 작업과 구별하려는 시도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L6vRItWvSY




Kronach,Germany/Starforts.com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는 1472년 독일 크로나흐( Kronach)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출생지에서 유래했고요. 그의 부친 한스 말러( Hans Maler)도 화가였습니다. 크라나흐가 유년과 청소년 시절에 어떻게 훈련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화가였던 관계로 재료를 다루는 법에서 주제를 잡고 인물을 묘사하는 법까지 그림의 기초를 숙지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해봅니다.




그는 1505년부터 비텐베르크로 이주했고, 그의 작품 대부분이 이곳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교수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황과 교회에 반대하는 글과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크라나흐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고요. 개인적으로 1520년 루터가 크라나흐의 딸 안나의 대부가 됐고, 반대로 크라나흐는 루터의 장남 요하네스( Johannes)의 대부가 되는 등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90VGzOpMw








크라나흐는 비텐베르크에 규모 있는 스튜디오와 인쇄소를 경영하였습니다. 전에는 비텐베르크 사람들이 책을 펴내려면 다른 지역에 가야 했으나, 크라나흐의 인쇄소가 생기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크라나흐는 루터의 성경 삽화용 목판을 비롯해 각종 설교집, 기도서, 찬송가 등을 찍어냈고, 필요한 경우 삽화를 넣어 종교개혁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분주한 가운데서도 그는 쉼 없이 작품을 제작했고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마르틴 루터가 정기적으로 설교했던 비텐베르크 시 교회의 제단화입니다. 이 작품은 크라나흐가 시작하여 그의 아들 (Lucas Cranach the Younger)이 마무리 한 작품입니다.







루카스 크라나흐, 비텐베르크 제단화, 패널에 유채 , 1547/주간조선




"루터가 종교개혁을 글로 표현했다면,
크라나흐는 신앙을 그림으로 해석하고 표현해서 확산시켰다.
-독일 신학자 모르고트 캐스만( Martot KaBmann)-





이 대형 제단화는 정면 중앙에 최후의 만찬 장면이 보이고 그 좌우로 세례와 신앙고백, 교회에서의 설교 장면과 회중이 등장합니다. 루터의 신학을 충실하게 따랐다 해서 '종교개혁의 제단화'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화면 중앙의 <최후의 만찬>(1547)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모습을 줄거리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인물을 요한 사도, 예수님의 오른쪽 인물은 가롯 유다입니다. 그는 표면적으로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지만 다른 제자들의 발이 가려져 있는데 반해 그의 발은 바깥으로 나와 있어 일탈행위, 즉 '배신'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무언가 비장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사람은 사도 베드로로,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 (마 26: 33)"고 맹세하는 듯한 포즈를 취한 모습입니다. 크라나흐는 식탁 위에 올라온 양의 이미지를 통해 희생양 되신 그리스도를 표현했습니다.









그림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오른쪽의 포도주를 건네는 장면입니다. 사도들 가운데 루터가 앉아있는데, 루터는 검은 망토 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뿌리를 잊은 공동체에서 성경의 진리를 외치다 되레 미움을 사 교회로부터 축출됐을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크라나흐는 이 그림을 보며 감상자들이 루터가 얼마나 탄식하며 분노하는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을 회복하고 지키기 힘썼는지 알아볼 수 있도록, 복장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림의 핵심은 아닙니다. 루터는 몸을 돌려 옆에 있는 청년(크라나흐의 아들로 추정)에게 가득 찬 포도주를 넘겨주고 있습니다. 포도주를 받는 인물은 의외라는 듯 약간 놀란 표정이고요.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찬은 사도들과 사제들에게만 돌아가는 특권이 아니라는 사실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가 교황이나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이중 성찬 '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깨우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림에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가톨릭 정신을 구현한 것인데 비해, 크라나흐의 '최후의 만찬'에는 종교개혁 사상이 투영되어 있습니다.(분위기를 한번 비교해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위키백과





루카스 크라나흐는 1505년부터 1550년까지 작센 선제후의 궁정 화가로 비텐베르크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저명한 시민이 되었고, 1519-1520년에는 시의회 의원으로, 1537-1544년에는 세 차례 시장으로 역임했습니다. 그의 스튜디오와 인쇄소는 비텐베르크의 예술 중심지 역할을 했고요.









브라만트 공국 /위키백과





피터르 브뤼헬( Pieter Brueghel the Elder , 1527-1569)은 1525년경(일부에서는 1527년경으로 추정) 브라반트 공국 브레다 근처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로, 북유럽 르네상스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특히 풍경화와 농민 생활을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은 당대 네덜란드의 일상과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고요. 브뤼헬은 장르 회화와 풍경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화가입니다.




그는 1551년에 안트베르펜의 성 루카 길드의 자유 장인이 되었고, 이후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 1553년에는 로마에서 미니어처 화가 줄리오 클로비오와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 중 알프스 산맥을 묘사한 드로잉들은 그의 풍경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들 중 < The Winters in the Snow> 속 병풍처럼 둘러친 산의 모습이 그 예입니다. 평지만 있는 네덜란드에서 보기 드문 산의 모습이 웅장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555년부터 1563년까지 안트베르펜에서 판화 출판업자 히에로니무스 콕( Hieronymus Cock)을 위해 주로 판화 디자인 작업을 했습니다(40점 이상의 판화).




1563년, 그는 스승이었던 피터르 코에케 판 알스트( Pieter Coecke van Aelst)의 딸인 마이켄 코에케와 결혼하여 브뤼셀로 이주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주로 회화에 집중했으며,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erS3qHBO3E



Florida, USA/wikipedia




The Betrayal and Capture of Christ, 1515, the R.H. Norton Trust/wikimedia commons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의 <그리스도의 배신과 체포 The Betrayal and Capture of Christ>(1515) 작품입니다. 종교적 주제의 작품들 중 그의 초기 작품에 속합니다. 유화로 제작한 나무 패널 작품으로 현재 미국 플로리다주 팜 비치에 위치한 노턴 미술관(Norton Muserum of Art)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동일한 화면 안에 여러 시간대의 사건들을 담아내는 '연속 서사(continuous narrative)'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유럽 예술가들이 종교적 이야기나 고대 신화를 묘사할 때 흔히 사용했던 기법입니다. 작품에는 예수님의 삶에서 중요한 두 가지 에피소드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장면과 체포되는 순간이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의 왼쪽 상단에는 두 팔을 벌린 채 기도 중인 예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예고하며 십자가를 들고 나타나는 천사의 모습도 보이고요. 그의 뒤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이 그날 밤의 중요성을 모른 채 평온하게 잠들어 있습니다.





그림의 중앙 부분은 같은 날 밤 이후의 순간을 나타내는 데, 유다가 예수님의 뺨에 입맞춤으로 인사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유다가 동행한 병사들에게 누가 체포될 사람인지 알려주기로 약속했던 신호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다의 배신적인 입맞춤을 받으면서 병사들이 다가와 그를 체포하는 장면이지요. 군중은 창과 등불을 들고 있고, 예수님 뒤에 있는 두 개의 들린 손은 밧줄을 예수님의 목에 묶으려는 의도를 암시합니다. 이 그림은 유다의 배신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이 시작되는 중대한 순간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흑인 노예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A Miracle in three scene, an the death of Saint Zenobius, Dresden/wikipedia




'연속 서사( Continuous marrative)'기법은 동일한 그림 안에 여러 시간대의 사건들을 함께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 기법은 단일한 시각적 공간 안에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함께 보여줍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인물의 반복적인 등장을 통해 나타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위 작품은 한 인물의 전기적 에피소드를 단일 장면에 함께 담아낸 산드로 보티첼리 ( Sandro Botticelli)의 "성 제노비우스의 어린 시절 네 장면 ( Four Scenes fron the Early Life of Saint Zenobius)입니다. 성인의 여러 생애 단계를 하나의 엄격한 원근법 도시 풍경 안에 담아냈습니다.






연속 서사 기법은 미술사에서 아주 초기에 나타났으며, 중세 후기부터 16세기까지 유럽 예술이 특징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나르메르 팔레트( Narmer Palette)나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원주( TraJan's Column)와 같은 작품에서 연속 서사의 가장 잘 알려진 예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초기 회화에서도 자주 사용되었지만, 이후 단일 원근법의 발전과 함께 점차 사라졌습니다.





Narmer Palette/wikipeidia



Trajan's Column/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OuQRUhSi600









https://www.youtube.com/watch?v=NkbxK3xhOYk




Berlin in Europe/wikimedia commons




The Dutch Proverbs, 1559/wikipedia




피터르 브뤼헐( Pieter Bruegel the Elder, 1527-1569)의 < 네덜란드 속담 The Dutch Proverbs>(1559) 작품입니다. 유화 패널 작품으로, 당시 네덜란드 사회를 풍자적으로 표현했습니다. 100개 이상의 속담을 담고 있어 인간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드러내는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현재 독일 베를린의 슈타틀리히 박물관( Staatliche Museum in Berlin)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인간과 동물, 사물이 네덜란드어 속담과 관용구를 글자 그대로 묘사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에는 약 112개의 식별 가능한 속담과 관용구가 포함되어 있으며, 언어 변화로 인해 현재는 파악하기 어려운 다른 속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속담들은 건물의 일부나 풍경 속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고요.




/My Modern Met




단순히 속담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을 넘어, 인간의 보편적인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이성을 뒤집어 행동의 부조리함을 보여줍니다. 어리석음이 죄로 이어지는 위험을 경고하는 도덕적인 메시지역할도 하고요. 그림 중앙에 위치한 남편에게 파란 망토를 씌워주는 아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다른 이를 속이고 싶었던 모양인데, 파란 망토 아래 숨지만 숨길수록 더욱 눈에 띈다는 점입니다.






Tweleve Proverbs, 1558



이 일상적인 장면들은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조언을 제공하고
인간의 행동을 교묘하게 비판한다.
-그림 상단 중앙의 라틴어 비문 내용-





이 유화 작품은 브뤼헐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원래 12개의 독립적인 나무 접시에 각각 다른 네덜란드 속담을 묘사한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이후 하나의 패널로 결합되고 각 그림 아래에 속담 텍스트가 추가되었죠. 우의화( allegorical painting)로, 상징적인 인물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행동을 풍자와 해학으로 표현한 12가지 속담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브뤼헐은 이러한 주제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도 예리하고 밀도 있는 형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림 왼쪽 윗부분부터 시작합니다.


1. " 와플 장수가 마시고 노는 모습"( A seller of waffles who drinks and plays): 사업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부적절한 시기에 도박과 음주를 하는 것이 가난과 평판 하락을 초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 "옷을 바람에 맞게 걸다"( To hang one's cloak into the wind):상황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바꾸는 기회주의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3. "한 손에는 불을, 다른 손에는 물을 들고 있다."(To carry fire in one hand and water in the other): 위선적이거나 이중적인 사람을 나타냅니다.


4. " 두 의자 사이에 앉다."( To sit between two chairs):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 유부단하여 둘 다 놓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5. "송아지가 빠져 죽은 후에 우물을 메우다"(To fill the well after the calf is drowned): 문제가 발생한 후에야 조치를 취하는 것을 비유합니다.


6.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다"( Casting pearls before): 가치 없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낭비하거나 노력하는 것이 소용없음을 의미합니다.


7. " 고양이에게 방울을 달다"(To bell the cat): 위험하거나 비현실적인 계획을 시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8. "물 위에서 해가 빛나는 것을 보지 못하다."(To be unable to see the sun shine on the water): 타인의 성공을 질투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9. "머리를 벽에 부딪히다"(To bang one's head against a wall): 불가능한 것을 달성하려 하거나, 고집스럽게 자멸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0. "그물 뒤에서 낚시하다"(To fish behind the net): 기회를 놓치거나 항상 뒤처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11. "파란 망토를 두르다"( To wear a blue cloak/To hide under a blue mantle):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위선을 떨려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12. "달을 향해 오줌을 누다 "( Pissing against the moon):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he Blue Cloak by Frans Hogenberg/PubHist




프란츠 호겐베르크 (Frans Hogenberg)의 1558년 작품인 '푸른 두건 '(The Blue Cloak)은 43개의 속담을 담고 있는 판화입니다. 이 작품은 브뤼헐의 <네덜란드 속담 >이 제작되기 1년 전에 완성되었습니다. 피터 브뤼헐의 <네덜란드 속담> 그림의 기초가 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SPumIx85l8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res.1530/The MET






루카스 크라나흐 ( 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의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 Judith with the Head of Holoderness>(1530) 작품입니다. 구약 외경 중 유딧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묘사한 작품으로, 여러 버전이 존재합니다. 이 작품은 유디트가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들고 있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유디트는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자신의 도시를 위협하자, 그를 유혹하여 술에 취하게 한 뒤 그의 칼로 목을 베어 백성을 구하는 영웅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림 속 유디트의 모습을 한번 볼까요? 그녀는 우아한 벨벳 드레스, 모자, 장갑까지 착용한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화려하고 값비싼 의상을 입고 있고요. 드레스 상단의 자수, 소매의 바느질, 목걸이, 늘어진 진주 등 섬세한 장신구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특정 공주를 나타낸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는 15세기 작센 왕실에서 입었을 법한 의상이라고 설명됩니다.





유디트의 얼굴은 침착하고 수동적인 표정을 띠고 있어,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머리의 섬뜩함과 그녀의 화려한 의상 사이에 흥미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 값비싸고 유행하는 의상, 섬세한 손동작은 적장의 머리와 그녀가 들고 있는 칼과 긴장감을 형성하며 약간의 에로티시즘도 드러냅니다. 크라나흐는 유디트의 의상과 태도에서 귀족적인 면모를 특히 더 강조했습니다.






유디트 이야기는 종교 개혁 시대에 특히 인기를 얻었습니다. 일부 미술사가들은 크라나흐가 여러 차례 그린 유디트 이야기가 가톨릭 전통,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중요했다고 주장합니다. 유디트는 적에 대한 저항과 용기, 즉 가톨릭에 대항하는 신교도의 저항이라는 정치적 개념을 나타내는 동시에 위험하고 성적인 여성이라는 다른 해석도 내포합니다.




Judith slaying Holofernes by Artemisia Gentileschi, 1620, Uffizi, Florence/wikipedia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이야기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많은 예술 작품에서 다루어져 왔습니다. 카라바조( Caravaggio, 1571-1610),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 1593-1653), 도나텔로 (Donatello, 1386-1466) 등 많은 예술가들이 이 주제를 그렸습니다.



루카스 크라나흐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비교해 봅니다. 크라나흐의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젠틸레스키는 목을 베는 순간을 묘사하여 더 강렬하고 잔인한 장면을 연출합니다. 젠틸레스키는 피가 쏟아지는 모습을 의학적으로 더 정확하게 묘사하는 반면, 크라나흐의 작품에는 피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젠틸레스키는 크라나흐와 달리 유디트가 머리 덮게 없이 등장하며, 하녀도 함께 등장시킵니다.





Judith and Holofernes by Donatello, 1457-1464, Palazzo Vecchio, Florence/wikipedia






루카스 크라나흐와 도나텔로의 작품도 살펴볼까요. 도나텔로의 조각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Judith and Holoferness>에서는 유디트가 홀로페로네스의 위에 우뚝 서서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몸은 축 늘어져 있고 머리는 여전히 몸에 붙어 있습니다. 도나텔로의 작품은 홀로페르네스의 교만을 상징하며 메디치 가문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nxA293u8cs










The Harvesters, August & September, 1565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
"최초의 근대적 풍경화"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피테르 브뤼헐( Pieter Brugel the Elder, 1527-1569)의 <추수하는 사람들 The Harvesters>(1565) 작품입니다. 나무 패널에 유화 작품이고요. 이 작품은 네덜란드 르네상스 시대의 풍경화를 대표하며 , 여름의 풍요로움과 농부들이 밀을 수확하는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브뤼헐은 이 연작에서 계절별 노동보다는 주조색을 통해 계절의 변화 자체를 그려냈으며, '밀수확'에서는 노란색이 흐리고 무더운 여름날의 분위기를 표현합니다.





8월과 9월 또는 늦여름의 수확 시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요. 앤트워프의 출신의 상인 은행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니콜라스 용헬링크( Nicolaes Jonghelinck, 1517-1570)가 의뢰한 연중 계절의 변화를 묘사하는 여섯 점의 연작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농민과 그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당시 풍경화에서 흔했던 종교적 주제를 배제했고요. 그림은 늦여름 벨기에의 수확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낮은 언덕과 계곡을 배경으로 40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림 전경 오른쪽에는 배나무 아래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고요. 일부 농부들은 여전히 밭에서 일하거나 작품을 수확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림의 중심에는 노동 후 휴식을 취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담겨 있어, 초기 네덜란드 예술가들이 종교적 모티프에서 세속적인 주제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detail /The Electic Light Company



detail/Painters' Table



브뤼헐의 '계절'연작 중 하나로, 원래 여섯 점(또는 열두 점)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연작 중 현재 다섯 점이 남아 있습니다. '음울한 날', ' 눈 속의 사냥꾼', '소 떼의 귀환'은 빈 미술사 박물관에 , '건초 수확'은 프라하의 롭코비츠 궁전에, 그리고 '추수하는 사람들'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g3w6abuMyc



The hunters in the Sonw, December & January The Gloomy Day, February & March
The Return of the Herd,October& November



1280px-Pieter_Bruegel_the_Elder_-_Spring%2C_1565_-_Google_Art_Project.jpg High Spring/April& May/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cKIa6KK1oL8





Haymaking, June&July,1565

Lobkowicz Palace at Prague Castle, Prague





https://www.youtube.com/watch?v=OFTpwOTt4DA










https://www.youtube.com/watch?v=dkiLZxX1S_U










The Ill-matched couple, 1530, Museum Kunstpalast, Dusseldorf/wikipeidia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의 1530년 작품으로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팔라스트 미술관( Museum Kunstpalast)에 소장되어 있는 유화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어울리지 않는 결혼의 결과를 다루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묘사합니다.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이유로 노인과 젊은 여성의 결혼을 주제로 합니다. 이러한 주제는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특히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와 쿠엔틴 마시스( Quentin Matsys, 1466-1530)와 같은 예술가들에게 인기 있는 소재였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나이와 외모가 현저하게 다른 두 인물을 묘사합니다. 젊은 여성이 탐욕스러운 노인을 속이는 장면을 통해 도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요(색욕과 탐욕). 그림은 젊은 여성이 노인의 수염을 간지럽히는 동안, 노인은 음탕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장면은 종종 노인이 젊음과 아름다움에 홀려 젊은 여성에게 돈을 빼앗기는 상황으로 묘사될 때도 있습니다 . 캔버스에 가까이 다가가 클로즈업된 시선은 두 인물 간의 두드러진 대조로 눈을 뗄 수없게 만듭니다.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요.





800px-Lucas_Cranach_d._%C3%84._-_Amorous_Old_Woman_and_Young_Man_-_WGA05715.jpg The Ill-matched couple, 1520-1522/Museum of Fine Arts,Budapest/wikipedia




< The ill-Matched Couple>이라는 주제는 크라나흐 작업실에서 즐겨 다루던 소재로, 40가지 이상의 버전이 알려져 있습니다. 크라나흐는 이 주제를 자주 다루었으며, 때로는 젊은 남편과 늙은 아내의 관계로 역할을 바꾸어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zQPk9EEum4



쿠엔틴 마시스( Quentin Matsys, 1466-1530)의 < ill-Matched Lovers> 작품도 한번 감상해 보시죠.


1280px-Quentin_Massys_-_Ill-Matched_Lovers%2C_c._1520-25.jpg ill-Matched Lovers by Quentin Matsys, 1520-1525, National Gallery, Washington DC/wikipedia








Peasant Wedding, 1566-69/wikipeida






피테르 브뤼헐( Pieter Bruegel the Elder)의 <농민의 결혼식 The Peasant Wedding>(1566-69)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6세기 플랑드르 농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으로, 브뤼헐의 세밀한 관찰력과 풍부한 상징성이 돋보입니다. 브뤼헐은 이 작품을 통해 '농부 브뤼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열리는 결혼 잔치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잔치가 벌어지는 곳은 헛간으로 보이며, 벽에는 추수 후 쌓아놓은 짚단이 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 부유한 지주의 연회장을 풍자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고급 태피스트리 대신 낡은 담요가 벽에 걸려 있고, 거친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낡은 문짝이 음식 쟁반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요 음식은 빵, 죽, 스푸 등으로 보이며, 벽에 걸린 두 개의 옥수수 이삭과 갈퀴는 농민들의 힘든 삶을 상기시킵니다.





그림 중앙에는 신부가 초록색 배경 앞에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전통적인 종이 왕관이 걸려 있고요. 일부 학자들은 신부의 두 조각으로 된 왕관이 그녀가 이미 임신 중임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신부의 왼쪽에는 공증인으로 추정되는 백발의 남자가 앉아 있고, 그 옆에는 프란체스코 스도승이 땅 주인으로 보이는 잘 차려입은 남자와 대화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신랑의 정체가 불분명하다는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신랑은 신부와 가족을 시중들어야 했기 때문에, 문짝으로 음식을 나르는 겸손한 젊은이가 신랑일 수 있다는 설과, 전경에서 와인을 더 달라고 외치는 깔끔한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신랑일 수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플랑드르 풍습에 따르면 신랑은 저녁까지 축제에 참여할 수 없었고, 신부 또한 신랑이 오기 전까지는 먹거나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으로 농민 생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브뤼헐은 여기에 분명한 도덕적 판단을 주입하여, 결혼 축제가 폭식과 방종으로 변질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림은 음식과 음료의 소비에 집중되어 있으며, 신부, 신부의 부모, 그리고 두 특별 손님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하객들이 먹는 것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두 음악가 중 한 명조차 음식을 기대하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구도 결혼식의 영적인 본질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수도승이 신사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암시될 수 있습니다.





왼쪽 전경에서는 한 남자가 끝없이 와인 주전자를 채우고 있습니다. 손가락을 빠는 아이는 전통적인 굶주림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플랑드르에서 발생했던 기근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일 수도 있고요. 오늘날까지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일부는 도덕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고 보지만, 다른 이들은 농민 생활에 대한 풍자적인 요소가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해석이든, 브뤼헐은 <농민의 결혼식>을 통해 16세기 네덜란드 농촌의 삶과 풍습을 현대인뿐만 아니라 당시 도시 거주자들에게도 엿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The Wedding Dance by Pieter Bruegel the Elder,1566, Detroit Institute of Arts, Detroit/ wikipedia




작품 속 인물들은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밀집되어 춤을 춥니다. 약 125명의 남녀가 중세 복장을 하고 야외 결혼식에 참석하여 신랑 신부를 축하하고 있습니다. 신부는 당시 관습에 따라 검은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고 있으며, 팔다리가 다소 과장되게 표현되어 서투르고 다듬어지지 않은 춤 동작을 강조합니다.



중앙에 있는 여성의 흰색 앞치마와 머리 장식이 눈길을 끕니다. 푸른색 옷을 입은 농부 여성은 흥에 겨워 호기롭게 속치마와 작은 지갑을 보여줍니다. 그녀들 주변으로 춤추는 두 남자는 과장되게 불룩 솟아 있는 코드피스(남성 생식기 부분을 덮는 주머니)가 달린 바지를 입고 있어 남성의 왕성한 성적 에너지를 통해 농민들의 건강하고 원초적인 삶의 활기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1Hs2GZKOhw&t=1s











https://www.youtube.com/watch?v=YHBhZ9g0Jd8




Saint Maurice-a Black Saint in the Renaissance, 1520-1525/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와 그의 작업실에서 제작된< 성 모리스 Saint Maurice>는 1520년에서 1525년 사이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초기 기독교 순교자 성 모리스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요. 원래 할레(Halle)의 마르크트키르헤( Marktkirche) 교회를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대형 제단화의 왼쪽 내부 날개 부분에 해당하고요. 그는 이 교회의 수호성인이었습니다.





성 모리스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은색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마치 왕처럼 말입니다. 금빛 검과 옆에는 단검과 깃발도 있고요. 붉은 타조 깃털 장식 모자와 펜던트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깃발에는 독수리가 그려져 있고 전체적으로 금빛으로 덮여 있습니다. 흉갑과 견갑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휘장인 황금양털 기사단의 금빛 배지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림 속 갑옷은 성 모리스의 유물을 담았던 성유물함에 있던 갑옷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이 성유물함은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성인의 갑옷은 은으로 만들어지고 보석과 진주로 장식된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성 모리스는 3세기 후반에 기독교인 박해를 거부하여 병사들과 함께 순교한 테반 군단의 지휘관이었습니다. 테반 군단은 그가 이끌었던 전 이집트인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 병사 부대였습니다. 현재의 스위스 지역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 모리스가 검은 피부를 갖게 된 것은 그의 이름이 '무어인 ( moor)'이라는 단어와 유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어인'은 무슬림, 흑인, 또는 북아프리카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게르만어 기원의 영어 단어입니다. 또한 , 당시에는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이집트인으로 여기는 지역적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호엔슈타우펜 황제 상징에서 검은 피부를 가진 인물들이 보편적인 주권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covered in grime prior to restoration /wikipedia






이 작품은 2005년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되어 복원되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작품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작가를 식별하기 위해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크라나흐가 그림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확인된 후, 미술관은 크라나흐 단독으로 완성된 부분과 그의 작업실의 도움으로 완성된 부분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위해 적외선 반사율 측정법을 사용하여 개별 붓놀림을 분석했고요.





이 분석을 통해 타조 깃털을 자유롭게 그려졌음이 밝혀졌습니다. 밑그림은 크라나흐 본인의 손으로 그려졌지만, 갑옷의 채색은 그의 견습생과 작업실에 맡겨졌습니다. 갑옷의 일부 세부 사항은 밑그림으로 계획되지 않았고, 제작 과정 중에 추가되었는데, 이는 이 시기 작품에서는 흔치 않은 방식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YOcsG0M4s4










The ( Great)Towel of Babel, Kunsthistorisches Museum, /Journal of Historians of Netherlandish Art




피테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의 "바벨탑 The Tower of Babel"은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그림입니다. 브뤼헐은 이 주제로 두 점의 현존하는 유화 작품과 한 점의 소실된 상아 미니어처 작품을 그렸습니다.





"바벨탑"은 성경의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소재로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통일된 언어를 사용하는 인류가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하고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늘에 닿는 탑을 건설하려 했습니다. 이에 대한 신의 징벌로 인간의 언어를 혼란시켜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탑의 건설은 중단되고 인류는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브뤼헐의 두 작품 모두 탑의 건설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징벌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브뤼헐은 탑의 건축 양식을 로마 콜로세움과 의도적으로 유사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1552년에서 1553년 사이에 로마를 방문했는데, 당시 콜로세움은 오만함과 박해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작품 속 탑은 원형 구조와 아치형 개구부 등을 통해 콜로세움의 건축적 특징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로마와 바벨의 평행성은 브뤼헐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데, 영원할 것이라 여겨졌던 로마의 쇠퇴와 폐허는 지상 노력의 헛됨과 덧없음을 상징했습니다.






The (Little) Tower of Babel, 1563,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Rotterdam /Artchive,








브뤼헐은 건축 절차와 기술을 매우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림 속에서는 건설 현장, 탑의 형태, 색채, 인물 등 다양한 요소가 웅장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탑은 거대한 벽돌 골조 위에 석재 마감으로 일부 지어져 있는데, 이는 콜로세움과 같은 로마의 거대한 건축물에서 사용된 전형적인 기술입니다. 또한 , 그림에서는 16세기의 다양한 기계식 호이스트와 크레인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 빈 버전의 탑은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지어졌으며, 로테르담 버전은 인간의 힘만으로 세워진 독립적인 탑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빈 버전의 탑은 밝은 색채를 사용한 반면, 로테르담 버전은 어둡고 강렬한 색조로 묘사되어 더욱 위협적인 느낌을 줍니다.






브뤼헐은 성경의 바벨탑이 '신아르 지방의 한 벌판'에 세워졌다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활동했던 16세기 벨기에 안트베르펜의 해안가에 우뚝 솟은 탑으로 묘사했습니다. 이는 탑이 위치한 도시 풍경이 안트베르펜과 시각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을 통해 더욱 강조됩니다. 브뤼헐의 그림이 제작될 당시 안트베르펜은 급격한 경제적, 인구학적 성장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민자 유입으로 인한 언어, 국적, 종교 등의 다양성을 동반했지요. 이러한 도시의 상황은 브뤼헐의 "바벨탑"이 소통의 부재와 사회적 통합의 필요성에 대한 담론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림은 1563년 당시 안트베르펜의 기업가 니클라스 용헬링크( Niclaes Jonghelinck)를 위해 그려졌으며, 그의 교외 별장에 전시되었습니다.




Kat_64_GG_1026-Detail1.jpg The Tower of Babel/Bruegel-once on A Lifetime






두 작품은 비슷한 구도를 가지고 있지만, 건축 양식, 색채, 탑의 건설 진행 상황, 그리고 인물 묘사 등에서 중요한 차이점을 보입니다. 빈 버전에서는 전경 왼쪽에 님로드 왕과 그의 수행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중요하게 배치되어 있지만, 로테르담 버전에서는 이 집단이 생략되었습니다.





빈 버전의 탑은 커다란 바위를 중심으로 지어졌지만, 로테르담 버전의 탑은 인간의 힘만으로 지어진 독립적인 탑으로 묘사됩니다. 브뤼헐은 이를 보여주기 위해 탑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그렸으며, 색상도 신중하게 선택했습니다. 빈 버전은 옅은 색채를 사용한 반면, 로테르담 버전은 강렬하고 어두운 색조로 더욱 위협적인 느낌을 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6BKDveCd9w&t=7s









https://www.youtube.com/watch?v=vzHH-O7l5Cg





Map of Ohio State,USA/Depostiphotos





Saint Helena with the Cross by Lucas Cranach the Elder, 1525, Cincinnati Art Museum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의 1525년 작품인 <십자가를 든 성 헬레나 Saint Helena with thr Cross>는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유화 작품으로, 현재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의 우아한 복식을 한 귀부인의 모습을 통해 성 헬레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유화로 제작한 패널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십자가를 똑바로 들고 있는 세련된 복장을 한 귀부인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쉽게 보는 크로스 형태가 아니라 'T' 자 형태의 십자가 모습이 인상적이고요. 십자가에는 못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며, 이는 그녀가 참된 십자가 ( True Cross),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십자가를 발견한 성 헬레나임을 나타냅니다. 그녀는 로마의 황후이자 초대 기독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인의 정교한 의상과 금 장신구는 그녀가 16세기 독일의 부유한 귀족임을 시사합니다. 그녀는 시대 복식을 입고 있으며, 풍부한 디테일과 패턴이 특징입니다. 코르셋과 넓은 소매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양식이며, 머리에는 화려한 모자나 머리 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목에는 독특한 금 체인이나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으며, 그녀의 표정과 태도는 고귀하고 위엄 있습니다.




The Dream of Saint Helena by Paolo Veronese, National Gallery





이 그림은 알레고리적 초상화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크라나흐가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화가로 재직했던 비텐베르크 궁정의 인물을 묘사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알레고리적 또는 역사화적인 초상화는 인물의 고귀함과 경건한 신념을 역사적 인물인 성 헬레나와 연결시키는 대중적인 방법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dPsRo7nk9M









https://www.youtube.com/watch?v=Kd8kxPa7SFM





https://www.youtube.com/watch?v=SDHL1bzKSQ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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