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편집자의 책장 #01] 인터뷰집을 읽는다는 것

by 문장산책자

이번 연휴 기간 동안 개인적으로 가장 잘한 것은 김지수의 인터뷰집 <의젓한 사람들>을 읽은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첫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제목의 ‘의젓한’이라든지, 부제에 담긴 ‘다정함’, ‘책임’이라는 단어는 제 앞가림하기에도 벅찬 내게 너무나 먼 단어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나를 멀리 밀어내지 않았다.


김지수 작가는 ‘언어로 세상을 잇는 대한민국 대표 인터뷰어’다. 인터뷰 시리즈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로 지난 10년간 국내외 석학들의 사유를 전해 왔다. 그는 인터뷰이와의 대화 속에서 우리 시대에 필요한 보석 같은 언어를 채취해 낸다. <의젓한 사람들>에는 배우 박정민, 시인 나태주, 경제학자 러셀 로버츠, 작가 마크 맨슨 등 국내외 14인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이 책은 ‘타인에게 의젓한 존재가 되어보라’는 김기석 목사의 말에서 출발한다. 그는 고통받는 타자에게 다가서는 것이 곧 의젓한 마음이며, 그것은 나의 불안을 해소하는 동시에 타자를 구하는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이 직면한 기본 정서는 불안과 암담함이지만, 관계 속에서 선한 영향을 주고받으면 ‘불안의 악력’이 현저히 약해져요. 반대로 삶에 보람이 없으면 운명의 손아귀에 붙들리고 수순처럼 우울의 늪에 빠집니다. 그래서 신은 권유합니다. 단 한 번이라도 타자에게 의젓한 존재가 되어보라고.”


인터뷰집의 미덕은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다. 요즘 출판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인 박정민의 인터뷰가 궁금했다. 그는 열심히 할수록 성장한다고 느끼냐는 저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열심히 한다고 좋아지진 않아요. 열심히 하는 건 순전히 제 스스로 안정되기 위해서예요. 준비하지 못했다는 불안감을 없애려고요.” 그러면서도 그는 “‘열심히 했으니 재밌게 봐주세요’라는 말은 좀 창피해요. 열심은 제 몫이고, 관객은 좋은 결과물을 봐야줘”라고 말한다. 불안은 열심을 낳고, 열심은 결과를 낳는다. “배우는 한 역할을 연기하면서, 영화적으로 사건을 만나 크고 작은 메시지를 전하게 돼요. 감독의 디렉션과 관객의 정서 사이에서 선을 지키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하죠.” 불안과 열심이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 넘어가는 지점을 나는 이 문장에서 발견했다. 다음은 나머지 인터뷰에서 길어 올린 의젓한 문장들.


“클레식 작곡가는 대중의 마음에 들기 위해 쓰지 않아요. 경험의 수치가 다 다른 대중을 맞추려는 노력은 쉽게 망하는 지름길이죠. 접근도를 높여주는 노력은 하지만, 결국 작곡가는 자기 이상향을 믿고 갈 수밖에 없어요.” (작곡가 진은숙)
“부모의 사랑과 신뢰는 부와 무관해요. 만약 부유한 부모가 제게 신뢰를 주지 않았다면, 저는 허들을 넘어서는 힘을 키우지 못했을 겁니다.” (정치인·기업가 플뢰르 펠르랭)
“내 시의 기본이 너와 나의 이야기예요. 약한 건 마이너스가 아니에요. 나 혼다 자력갱생이 안 되니 네가 필요하다는 호소죠. 사회학적으로 자력과 타력!” (시인 나태주)
“‘완벽한 결정’은 없습니다.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을 뿐이죠. 인생은 어차피 지도 없이 하는 여행이기에 완벽함의 반대는 ‘엉성함’이 아니라 ‘그럭저럭 괜찮음’입니다.” (경제학자 러셀 로버츠)
“이미 세상에 내보내면 내 것이 아닙니다. 알아서 자라고 퍼지고 성숙해져 돌아오길 기다려야죠. 결정권이 나한테 없을 때 최선은, 신경을 끄고 할 일을 하는 겁니다.” (작가 마크 맨슨)
“알츠하이머병을 진단받았다고 해도 삶은 계속됩니다. 기억이 없어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감정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사랑과 기쁨을 이해하는 능력은 더 예민해집니다.” (신경과학자 리사 제노바)


2.jpg


인터뷰의 깊이와 밀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김지수의 질문들에는 시대를 향한 섬세한 윤리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인터뷰집이 아니라, 인생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한 권의 인문서로 읽힌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의젓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부담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해’라는 통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는 의젓하고, 책임감 있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을 오랫동안 바람직한 남자상으로 여겨 왔다.


그런 면에서 <의젓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책임이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X축으로 나보다 큰 공동체, Y축으로 더 먼 시간을 상상해 본 의젓한 사람의 위치 에너지는 얼마나 높은가”라는 표지 카피가 함의하듯, 의젓한 사람들은 완성형 인간이 아니며,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터뷰이들이 항상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들 또한 오늘도 어딘가에서 우리와 똑같이 또 하나의 ‘불안의 고개’를 넘으며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힘들지, 나도 힘들어,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작년에 김지수 작가와 김기석 목사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만났을 때 나는 갓 출간된 <고백의 언어들>의 편집자로 현장에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두 팔을 크게 흔들며 걸어가는 김지수 작가의 모습을 보고 김기석 목사가 말했다. “굉장히 씩씩하게 걸으시네요.” 어쩌면 그 순간 그는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품위와 지성, 지향의 극한”을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3.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