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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만화경

전쟁을 미워한 일본인 예술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붉은 돼지」

by 사각예술

Michelle - The Beatles

참호전.jpeg 1차 대전 참호전

인류 전쟁사에는 빼놓을 수 없는 두 전쟁이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인데요. 당시의 국방력이란 곧 '얼마나 많은 병사를 투입시킬 수 있는가'였기에 매일같이 사람이 목숨을 잃던 참혹함과 종전 이후의 공허함은 전 세계를 신음하게 했습니다.


역사를 뒤흔든 당시의 혼란을 두고 전쟁을 겪은 수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가족의, 나라의 상처를 담아 평화주의, 반전反戰을 전파하는 작품을 만들곤 했는데요.


특히나 인류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원폭 투하로 항복한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2차 대전의 추축국이었던 일본에서도 그때의 참상을 다루며 수많은 예술가들이 쓰라린 걸작을 남기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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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옥쇄하라.jpeg
대표적인 두 작품

「맨발의 겐」이나 「전원 옥쇄하라!」 같은 만화 역시 반전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데요. 혹자는 이것을 두고 전쟁 이후 일본의 작품들에 대해 이렇게 평하곤 합니다.


자국을 너무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오늘날에도 일부 일본인들은 히로시마 원폭 사건을 두고 미국에 사과를 요구하는 등 전쟁 반대의 기저심리에 '일본은 피해자'라는 논조가 깔려있기도 합니다.


다만 앞서 나열한 작품들, '맨발의 겐'이나 '전원 옥쇄하라!'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의 예술가들은 말합니다. 진정 지옥을 만들었던 것은 다름아닌 광기로 물들었던 자국의 제국주의, 파시즘이었다고요.


미즈키시게루.jpeg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은 미즈키 시게루,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을 그리는 만화계 거장이 되었다

‘전원, 옥쇄하라!’라는 만화의 제목 역시 수세에 몰린 자국 병사들에게 죽창을 들고 마지막까지 명예롭게 전사하라는, 한 마디로 자살행위를 강요했던 정부의 명령에서 따온 것입니다. 또한 작가이자 실제 전쟁에 참전했던 미즈키 시게루는 직접 목도했던 일본 위안부에 관련해서도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전설이자 국내에도 익히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반파시즘을 작품에 녹여내는 예술가는 또 있었는데요. 스튜디오 지브리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입니다.


전쟁을 겪었던 미야자키 역시 전쟁 중 자국 일본의 모습에 큰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작품들에 풍자적 요소를 넣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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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돼지」에서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를 교활한 파충류 괴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최고의 마법사 하울을 오직 ‘승전을 위해’ 징집하려는 정부가 나오며

최근작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주인공의 전쟁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묘사합니다.




I

붉은 돼지의 이야기



특히나 미야자키 스스로를 투영시킨 작품 ‘붉은 돼지’에서는 그 조소가 더욱 신랄해지고 차가워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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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코와 인간 마르코

1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 공군의 자타공인 에이스 파일럿이었으나 모종의 마법에 걸려 돼지가 되어버린 주인공 포르코(이탈리아어로 돼지라는 뜻). 다만 작품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포르코의 마법을 풀기 위한 여정 따위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금씩 보여주는 떡밥으로 봐선 그가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거나 돼지가 된 것도 자신의 의지였다는 것이 드러나는데요. '돼지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전쟁을 멈추지 않는 인류에 회의를 느낀 주인공이 그들과 분리되려고 한다는 은유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포르코는 작품의 시작과 중간과 끝 모두에서 한 번도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 않습니다. 현상금 사냥꾼 생활을 관두고 공군에 복귀하라는 옛 친구의 조언에도 단호하게 거부하는데요.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가 되는 게 나아.


포르코의 유일한 변화라고 함은 돼지가 된 그가 어떻게 다시 인간성을 되찾게 되느냐는 지점입니다. 플라톤의 ‘오직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볼 수 있다’는 말처럼 포르코는 욕망 덩어리로서 전쟁을 절대 멈추지 않을 인류 그 자체를 혐오하는데요.


포르코는 미국인 파일럿 '커티스'와 혈투를 벌이고도 마지막까지 이탈리아 공군을 따돌린 채 도주하며 무법자 생활을 청산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미야자키처럼 직접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그의 시선에서 ‘무법’이자 혼돈이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인류라는 군집체에 소속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II

한 병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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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와 피오

그럼에도 포르코는 지나와 피오라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두 여성 캐릭터를 만나며 변화해 갑니다. 오래된 소꿉친구이자 언제나 자신을 걱정하는 아드리아 호텔의 마담 지나, 그리고 비행기 정비사라는 꿈을 갖고 있는 천재 명랑소녀 피오.


포르코가 마르코였던, 인간 시절의 모습이 드러났던 장면들을 생각해 볼까요. 작중 내내 두세 번 정도밖에 볼 수 없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가 인간으로 돌아가거나 타인에게 잠시 인간으로 보이는 순간에는 항상 ‘사랑’이 있습니다. 공주에게 키스를 받아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개구리 왕자 이야기처럼요.


포르코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피오가 잠시 인간 마르코의 모습을 보았던 것처럼, (지나와 달리 피오는 포르코의 인간시절 모습을 본 적이 없음에도) 포르코를 사랑하는 지나 역시 포르코가 그녀의 눈에는 항상 여전히 ‘인간’ 마르코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엔딩 부분 피오에게 입맞춤을 받자 포르코가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도 마찬가지. 종합해 보면 사랑과 평화라는, 자칫 과도하게 이상적인 가치를 전달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뼛속부터 인간을 혐오하던 철옹성 같은 포르코조차 변화하게 만드는 강력한 것이라고 전달합니다.




미야자키의 이야기


미야자키 하야오는 스스로 ‘붉은 돼지’가 설정부터 캐릭터까지 자신의 취향을 한껏 반영했기에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자조하기도 했으나 일부 관객들은 ‘붉은 돼지’를 미야자키 최고작으로 꼽기도 합니다.


붉은 돼지.jpeg 포르코와 그를 상징하는 비행기

보기만 해도 아련해지는 유럽의 여름과 시끄러운 무전기 따위 없는, 잠시나마 하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경비행기들.


미야자키.jpeg 거장

따뜻하고 포근한 색채로 평화를 외치는 그의 작품과 다르게 미야자키는 특유의 까칠함과 완벽주의, 직접적인 발언들로 오만한 천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미야자키의 복잡한 내면세계는 아직도 완벽히 갈무리가 되지 않았는데요.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주제의식의 「모노노케 히메」를 만드는가 하면 그의 가치관과 다르게 뜬금없이 국내에서 '우익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죠.


다만 미야자키 자신을 투영한 포르코의 가치관과 전쟁을 혐오하면서도 비행기와 무기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그의 모습에 대해 단순히 위험한 무정부주의자쯤으로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낭만주의자일 뿐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아지트에서 홀로 휴양을 즐기고 민간인을 약탈하는 도적들을 소탕하며 생을 이어갈 뿐, 인간끼리의 사랑 따위 언제나 국가의 이익 아래 있었다고 회고할 뿐.


포르코는 커티스와의 전투 후 구사일생 끝에 지나에게 말합니다.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



그럼 하늘을 나는 돼지는? 사랑과 평화로 가득한 이상을 꿈꾸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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