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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넘는 질문들

맞다고, 아니라고?

by 사각예술

Shape Of My Heart - Sting


영화는 근본적으로 작가주의적인 예술입니다. 마이너한 예술영화부터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상업영화까지 모든 영화에는 감독의 성향이나 메시지, 혹은 대중에게 던져질 '미끼'를 품곤 합니다.


저명한 프랑스 영화 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예술이다.
그 재현은 단순히 사진이나 그림과 같은 기술적인 게 아니라,
인간 경험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주관적인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지기에 때때로 대중에게 약속되지 않은 정서의 작품들이 탄생하곤 합니다. 일례로 "영화 「레옹」은 소아성애 영화인가?" 같은 질문이 있을 수 있겠죠. 그 질문의 전제가 되는 영화에는 분명 대중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소녀 마틸다와 성인 레옹의 복잡 미묘한 관계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은 타일러 더든의 언변과 행동으로 '사회 혁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쟁을 낳았고,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반유대주의 영화라는 논란에 휩싸인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뜨거운 논쟁, 건조한 의미의 '선 넘는' 질문들은 오히려 영화계의 건강함에 이바지하곤 합니다. 관객들은 단순한 감상의 경계를 넘어 영화의 본질에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대화의 장을 만드니까요.


오늘은 여러 영화들에 얽힌 '선 넘는 질문'과 개인적인 해설을 덧붙여 설명해 보겠습니다.



레옹

Q. 「레옹」은 소아성애 영화인가?


뤽 베송 감독의 영화 「레옹」은 어린 나이에 불운한 삶을 살게 된 소녀 '마틸다'와 전문 킬러로 일하는 과묵한 남성 '레옹'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작품은 산전수전 다 겪은 두 캐릭터 마틸다와 레옹의 관계를 어딘가 미묘하게 에로스적인 감성을 담아 표현하기도 하고, 실제로 마틸다를 연기한 아역 나탈리 포트만은 영화 개봉 이후 수많은 성희롱과 수치심에 시달렸다고 하죠.


결국 레옹은 오늘날까지도 '소아성애 영화'라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그럴까요?


내 약 어디에 숨겼어?

마틸다는 참 거지 같은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폭력적인 삼류 마약상 아버지와 창부 어머니, 우애 따위는 없는 형제들과 부비며 살았으나 작품의 메인 빌런 스탠스필드의 약을 빼돌린 아버지로 인해 마틸다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하는데요.


그나마 자신이 아끼던 막내동생까지 죽으며 복수심만이 남은 마틸다는 레옹에게 기적적으로 구제받은 이후로도 오로지 스탠스필드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레옹과 동거하며 그에게 암살 기술을 배웁니다.


그 과정에서 가까워진 두 사람. 이 지점에서 부성애라는 것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마틸다는 자신이 보고 배웠던, 거실 TV에서 나오던 방식대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아빠 힘내세요'를 배우지 못했기에 싸구려 멜로영화처럼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로 튀어나오는 것이죠.


사랑 아니면 죽음이에요

의도적으로 배치된 마틸다의 아이스러운 모습들 역시 그녀가 기댈 곳 없어 성숙함을 연기하는 것뿐 아직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어른인 척하는 마틸다지만 제대로 된 어른이 없던 그녀의 인생 속 레옹은 따뜻한 아버지가 되어주고, 제대로 된 '타인'이 드물었던 레옹에게는 마틸다가 또다른 구원자가 되어주죠.


화분 속 뿌리와 화분 밖 식물은 서로를 볼 수 없지만 필연적으로 알고는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줬다는 사실을요.



헤어질 결심

Q. 「헤어질 결심」은 '불륜미화' 영화인가?


'불륜'이라는 표현이 나왔으니 일단 주인공 부부를 살펴볼까요.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 해준은 유부남입니다. 주말부부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와 가정에 충실한 남자. 그의 아내 정안은 원자력발전소에 근무하는 연구원인데요.

가정적인 해준

작품 속 표현을 빌리자면 정안은 이과형 인간입니다. 해준이 먹는 것, 해준과의 생활, 심지어는 해준과의 성관계로부터 오는 리스크와 이점까지 계산하는 사람이죠. 그녀의 이름처럼 '안정'이 최우선인 인물입니다.


이는 원전을 관리한다는 직업적인 특성과 닮아있습니다. 우리에게 무한한 에너지와 가능성을 주지만, 이는 언제까지나 '안정적인 관리 하'에만 해당할 뿐. 삐끗하면 후쿠시마나 체르노빌처럼 돌이킬 수 없는 대재앙을 낳으니까요.

석류를 먹으면 중년 남성 우울증에 좋대

어느새 부부간의 사랑마저 '안정을 위한 관리' 아래에 놓는 정안은 어쩌면 해준과의 결혼마저 철저한 미래 계획 중 일부로써 실행했을지도 모릅니다. 형사니까 정의롭고 성실하겠지, 체력은 좋겠지, 얼굴도 봐줄 만 하지. 공무원이니까 노후도 괜찮겠지.


이제 제목을 볼까요. 사랑을 주제로 담은 영화의 제목이 다름 아닌 '헤어질 결심'입니다. 헤어짐은 관계의 붕괴죠. 꼭 나쁜 뜻으로 사용된 워딩은 아니지만요.


즉 제목부터 작품은 [상대를 위해 파멸, 붕괴를 감수 = 사랑]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 붕괴만을 막아내려 고군분투하는 '정안'의 완전한 대척점에 위치한 가치라고 설명합니다.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영화는 '사랑은 어차피 불안정하고 위험하니까, 불륜이어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걸까요?


해준이 정안을 두고 서래와 사랑에 빠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는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사랑'에 뛰어드는 우리를 관조하는 것뿐입니다.


붕괴를 감수할 만한 진정한 사랑을 만난다면,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그럴 거예요. 넘실거리는 파도에 몸을 던지는, 사랑을 하는 우리의 모습은 언제나 '이런 모습'이라고요.




케빈에 대하여

Q. 「케빈에 대하여」는 반출생주의 영화일까?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원치 않게 임신을 해 엄마가 된 여자, 에바와 그런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혼란을 겪는 소년인 케빈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혹자는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평합니다.


사랑하는 척하는 엄마와 사랑하지 않는 척하는 아들


울음소리가 묻힐 만큼 시끄러운 공사장의 굉음. 그 가운데서 잠시나마 평안을 찾는다는 듯한 에바의 모습이 유명한 장면이죠.


이게 더 낫다

「케빈에 대하여」 는 이후 '딩크족이 되어야 하는 이유', '사이코패스를 낳은 여자'라는 말들이 뒤 따라붙게 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오독에 가까우나 감독이 그런 감상을 노리지 않았던 건 아니기에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겼는데요.


영화 내적으로 봤을 때 케빈의 탄생이 결과적으론 온 가족과 무고한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가져왔다는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에바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이 애정결핍과 자의식 과잉으로 이어져 종반부 말 그대로 학살을 자행한 케빈은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연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관객들에게 그저 사이코패스, 괴물로 그려졌던 케빈이 정상적으로 길러지지 않았다는 또 다른 사실을 엿볼 수 있는데요.


어린아이들도 느끼는 '편애'를 어릴 적부터 대놓고 받아왔고, 면전에서 에바에게 '널 낳기 전이 더 행복했다'는 말을 듣는 등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보여왔던 케빈의 기행이 설명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날 사랑해줘

특히 엄마의 방을 꾸준히 어지럽히는 케빈과 설령 자식일지라도 자신의 영역을 허용하지 않는 에바의 모습은 필사적으로 '엄마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자식과 '엄마'라는 말이 '나'를 대체하도록 두고 싶지 않은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출이 됩니다.


당신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익숙해진 것뿐이야.
- 어린 시절의 케빈 -

‘케빈에 대하여’는 모성애와 인간의 탄생 그 자체에 질문을 던집니다. 모성애가 강하기로 유명한 동물인 고양이조차 길거리 생활이 녹록지 않을 경우 새끼를 버리기도 한다죠.


과연 이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걸까요? '이러니까 낳지 말아라'라는 메시지보다는 "이렇게 낳은 어머니와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없을 것 같나요?"라는 금기를 깨는 질문에 가깝습니다.



밀양

Q. 「밀양」은 반기독교적 영화일까?


이창동 감독의 작품 「밀양」 역시 종교라는 소재와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반기독교적 작품이라는 도마 위에 놓이곤 합니다.


연고도 없는 시골동네 밀양으로 이사 온 싱글맘 신애와 그녀의 아들 준. 전공을 살려 피아노 학원을 차린 뒤 아들과 소소하게 알콩달콩 사는 듯했으나, 신애는 아들이 유괴당한 후 살해되는 또 다른 불행을 겪게 됩니다.


그 무엇도 의미가 없어진 신애는 막연히 교회를 찾아갔다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요. 혼자 있을 때면 참을 수 없는 번뇌가 몰려와 무너지는 그녀였지만, 이웃들과 둘러앉아 찬송가를 경건하게 부르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종교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예수의 가장 큰 가르침인 사랑. '오른쪽 뺨을 맞거든 왼쪽 뺨 마저 돌려 대어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 등 자신이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배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신애는 감옥에 수감된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하는데요.


작품은 이 유괴범과 신애가 대면하는 장면에서 '용서란 무엇인가, 이해는 무엇이며 둘은 동행하는가?'라는 본격적인 메시지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떨리는 가슴으로 다른 신자들의 격려를 받으며 유괴범을 마주한 신애는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고통과 죄책감에 신음하는 남자가 아닌..


개새...

난 이미 신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며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남자를 마주하게 되죠. 남자의 모습은 분명 신애를 조롱하려는 의도도, 어딘가 불안정하게 연기하려는 낌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괴리를 신애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용서하러 간 자리에서 상대가 이미 용서받았음을 증명해 준 꼴이 되었으니까요.


어떻게 하나님이 그 자식을 먼저 용서할 수가 있어요?


광기

이후 신애는 삐뚤어지기 시작합니다. 정신질환은 심각해져 환청과 환각을 겪기에 이르고 심지어는 신에게 복수하겠다는 듯 일부러 하늘에 대고 보란 듯이 죄악을 저지르기도 하죠.


결국 자살기도 후 정신병원에 다녀온 신애는 아직 신을 미워하지만 작품 내내 시종일관 그녀를 따라다니던 종찬이 머리를 잘라주며 뭔가를 몸에서 떼어내며 흘려보낸다는 여운과 함께 막을 내립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창동 감독의 「밀양」 은 타인을 향한 인간의 얄팍한 이해,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주요 소재는 종교이나 이는 그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죠.


당장 자신조차 신의 가르침을 받아 유괴범을 용서하려던 신애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유괴범을 왜 이해할 수 없었을까요? 아니, 진정 유괴범이 신애를 '이해' 했다면 기도 몇 번으로 자신의 죄를 돌이키려고 했을까요?


종찬은 그저 신애를 사랑했을 뿐, 그녀의 상처를 완전히 이해했을까요? 어린 소년의 시체를 발견한 경찰들은 또 어떻고요.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뿐인 관객들은요.


주인공에게 이입하지 말라는 것

결국 끝까지 신애의 곁에 남아 그녀를 보살피는 종찬이 기독교 신자로 남았다는 점 역시 작품이 종교라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는 큰 예시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신이라면,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아들이 납치되었음에도 가짜 돈을 준비하던 신애의 아집을? 신애의 외모에 이끌렸던 종찬을? 어린아이를 납치해 돈을 요구하고 살해한 유괴범을? 신애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던 다른 기독교 신자들을?


근데 우리는 신이 아니잖아요. 그럼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이해한 사람은 몇이나 되죠?



오늘은 여러 영화들에게 남아있는 논란과 해석거리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이토록 영화에는 수많은 논쟁과 논란이 따라붙으며 뜨겁게 달궈지곤 하는데요.


어디까지나 개인의 해석에 맡길 뿐이지만 앞서 설명했듯 감상의 경계를 넘어 '선 넘는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는 작품을 더 풍부하게 만듦과 동시에 감상하는 우리의 생각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환경이 되어주니까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이상하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나요? 손을 뻗어서 이 불편함을 해소하려 영화를 헤집어본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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