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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긴 한데 무너질 듯한 젠가 : 「미키 17」 리뷰

스포일러 주의!

by 사각예술

MUSIC!

완성본.png 범작과 수작 사이

「미키 17」 , 2025

・ 봉준호 감독 / 로버트 패틴슨 외


봉감독의 거대한 귀환,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미키 17」이 개봉했습니다. 영화는 원작 소설인 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 7"보다 무려 10번을 더 죽이는 각색을 거치며 큰 기대를 모았는데요. 이미 「설국열차」라는 좋은 영화화 업적이 있기도 하거니와, 봉감독 특유의 상상력과 디테일한 연출, 흥미로운 스토리가 한번 더 SF를 만났으니 말 다했죠.


과연 기대감을 품은 관객들은 과연 「미키 17」에서 어떤 이야기를 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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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복제 기술을 통한 철학적 SF? 새로운 행성에 발을 믿는 인류의 군상극?


어떻게 보면 다 들어가 있긴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부터 다른 원주민과의 분쟁, 실존 인물을 보는 듯한 풍자와 반파시즘. 다만 그 결과가 개인적으로는 기대만큼 알차지 않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아쉬움을 표하는 다른 분들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완급 조절의 문제와 몇몇 평면적인 캐릭터, 약해진 주제 등이 그렇습니다. 이전부터 엿볼 수 있던 봉감독님의 생각과 풍자들이 젠가처럼 높게 쌓여있지만, 중간중간 빠진 조각이 많아 아슬아슬한 느낌입니다. 그마저도 위기감보다는 피로함이 느껴지고요.


개인적으로 봉준호 감독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살인의 추억」에서의 절제미, 풍자하고 싶은 지점을 우의적으로 숨기면서도 서사를 따라가는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완급조절이 이번 작품에는 흐려진 듯해 더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부분은 많습니다. 후술할 미키의 삶과 모순, "소스"에 집착하는 일파 등 제가 주관적으로 해석한 부분들과 아쉬웠던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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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불교에서 등장하는 가르침입니다. 여러 해석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다음의 뜻으로 풀이되곤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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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키의 윤회

미키의 존재는 이 원리를 따라가면서도 역설적인 면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일종의 윤회를 경험하지만 미키의 몸은 죽을 때마다 다시 프린트되고, 기억과 성격도 백업에서 복원되죠.


즉 이 과정은 완벽한 '컨티뉴'가 아니라, 세이브 & 로드에 가깝습니다.


계속 복제되는 신체는 분명 미키와 똑 닮은, 고유한 불변의 실체(색)이지만, 지금 이 순간의 미키는 한 번 사라지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후 복제된 미키들의 모습은 실체가 없는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MV5BMjNjNDM4OTMtODg1Yi00OTIzLWEzNDgtMzQwZjkzNDcxNzM5XkEyXkFqcGc@._V1_.jpg 복제품과의 만남

또 역설적으로 복제된 그의 신체는 기억을 물려받습니다. 그렇다고 이전의 미키와 같은 존재라고 보긴 어려운데요. 모든 미키는 각자의 죽음을 거치며 곧 고유한 경험을 가진 개체가 되니까요. 이 경우에는 반대로, 모든 미키는 고유한 불변의 실체(색)를 갖습니다.


모순이죠. 영원한 존재이면서도 매번 다른 존재로 살아가니까요.




・ 죽어가는 느낌

또 미키의 주변인들은 계속해서 묻습니다.

죽는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이 질문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면이 있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에게는 해당 느낌과 감각이 내재되어있거든요. 철갑덩어리 우주선에 의지해 외계 행성에 발을 딛은 그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 무서워 미키를 앞세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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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어야 우리가 살아

자신들은 그 느낌을 어렴풋이나마 알기에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하고, 이를 대신해줄 미키를 죽음에 무뎌지도록 유도하면서도 집착합니다. 오히려 개구리 해부하듯 미키의 목숨을 점점 하찮게 여기기도 하죠.


모순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미키의 죽음을 탐닉하는 오만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 너도 두려운 거지?

해당 관점에서 본다면 매 죽음을 미키가 두려워했다는 것도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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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금 전 미키의 윤회는 세이브 & 로드라고 비유했죠. 미키의 실존적인 공포는 단순한 죽음이 아닌 게임을 갑자기 꺼버리듯,


저장하지 않은 진행 데이터는 삭제됩니다.

였을지도 모릅니다.


눈을 감은 뒤에도 내일의 나는 다시 프린트되겠지만, 어디에도 백업되지 않은 지금의 나는 싸늘하게 죽거나 사이클러에 던져질테니까요. 그럼 미키는 다시 태어나는 걸까요? 아닐까요? 그는 '윤회하는 존재'이지만, 윤회의 본질을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모든 것은 변화하며 실체가 없다.


다시, 미키는 다시 태어날까요? 아니면 완전히 사라질까요? 어쩌면 그 질문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윤회의 굴레 속에서도, 미키는 단 한 번도 같은 존재였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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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스에 의한, 소스를 위한

선민의식 관심종자 독재자, 어딘가 감독이 바라보는 실존 인물의 모습을 표현한 듯한 케네스 마샬. 그의 아내이자 도찐개인 일파 마샬이 유달리 집착하는 것은 바로 소스입니다.


항상 자신의 음식을 먹는 이들에게 '소스' 맛이 어떤지 물어보는가 하면, 크리퍼의 꼬리로 소스를 만드려는 기행을 벌이는 등 소스를 단순한 음식 재료 이상으로 떠받드는데요. 이는 전작 「설국열차」에서 엔진을 신처럼 떠받드는 인물들과 닮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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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단순한 기능적 요소를 초월적인 존재로 신격화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죠.


이처럼 「미키 17」의 소스는 단순한 양념이 아닙니다. 소스의 특성을 생각해보자면 본질을 덮어버리고, 모든 것을 자기 입맛대로 바꾸는 힘을 가진다고 과장되게 표현할 수 있겠는데요.


소스는 종류에 따라 무슨 고기든 비슷한 맛이 나게 할 수 있고 같은 고기도 다른 맛이 나게 할 수 있습니다. 고기 그 자체의 본질을 뛰어넘는 인공적인 무언가죠. 개인적으로 이는 계급의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스가 본래의 맛을 지우고 선택된 자만이 누리는 권력의 도구로 탈바꿈하는 것이죠. 생존과 균형을 운운하며 배식량을 줄이고 본능을 조종하면서도 자신들은 호화로운 음식에 각양각색의 소스를 뿌려먹는 모습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dinner.jpeg 반면 미키는 이 구조를 소화시키지 못한다

일파는 단순히 소스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소스를 떠받듭니다. 이는 곧 자신이 군림하는 계급 질서를 숭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죠. 당첨된 노동자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며 선민의식을 느끼는 등 그녀에게 소스는 절대적인 힘이며 통제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조지 오웰의 말을 연상시킵니다. 일파 마샬과 케네스가 '균형'을 외치면서도 권력층의 특권을 유지하는 모습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듯 하죠.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더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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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다'고 감상을 정리한 것과 같이 미키 17는 총체적으로 얕다고 느껴집니다. 너무 주제가 많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주제가 과하게 치고 올라오는 반면 어떤 주제는 존재만 드러낼 뿐 서사에 크게 기능하지 못합니다.


살인의 추억 13.jpg 명작

제가 살인의 추억을 좋아하는 이유는 작품 내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실화, 두 형사의 고군분투라는 픽션, 그리고 당시 시대상에 대한 풍자가 완벽한 비율로 배합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절제된 호흡으로 보여주는 감독의 생각들은 서로를 조금씩 뒷받침하고 연관성을 각인시키기에 서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아주 무관하다고는 말 못하는 것처럼요.


미키 17에서는 앞서 말한 인간의 존엄성, 계급의식, 파시즘, 인종 / 국가 간의 충돌, 생명윤리 등 정말 다양한 주제가 세계관을 꾸미고 있지만 각각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해 쉽게 부러질 것만 같습니다.


미키4.jpeg 나는 누구인가?

서사는 그 뒤로 가려져 지루함을 유발하기도 했으며 설명 과다 대사라던지 평면적인 빌런 등 부수적인 요소들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변수 요소인 멀티플도 큰 위기인 척하다 결국 형량 추가에 누가 나샤한테 쭈물러질 것인지가 끝..


그럼에도 이 작품의 등장은 감사한 작품입니다. 평소엔 파리 날리던 동네 영화관이 사람으로 꽉꽉 가득찬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봤거든요. 매듭 짓는 것이 조금 아쉬웠을 뿐이지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천상계 감독의 작품이니 아쉬운 부분이 두드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별 생각 없이 보면 괜찮은 블록버스터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같이 본 사람은 되게 재밌었다고 했던 게 기억나네요. 내조왕 미키는 저도 좋았습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이처럼 주목받는 한국 SF 작품이 세상에 나와 주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봉감독님의 차기작은 한국 영화이길 개인적으로 바라며.

다음 작품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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