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 다니엘스 감독작
2022년 개봉한 다니엘스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멀티버스 설정을 B급 감성으로 풀어낸 SF 가족 영화입니다. 독창적인 연출과 따뜻한 메시지를 담아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았으며, 아카데미 주요 5개 부문 중 4개를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양자경의 할리우드 첫 주연작이자 키 호이 콴의 복귀작으로도 주목받았으며, 같은 컨셉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저예산 영화임에도 강렬한 비주얼과 감동적인 스토리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SF적 상상력, 철학적 질문, 그리고 가족과 개인의 고통을 섬세하게 담아낸 이 작품은 영화적 맥시멀리즘의 좋은 예시로 평가됩니다.
세탁소를 운영하며 평범하게(=고달프게) 살던 에블린 왕. 구닥다리 세탁기가 줄지어 모여있는 허름한 세탁소와 천진난만한 남편, 자신을 한껏 무시하던 가부장적인 홀아버지와 반항이 일상인 딸.
안 그래도 팍팍한 인생에 세금 문제까지 겪고 있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의 몸을 빌린 다른 차원의 웨이먼드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당신이 다중우주의 유일한 희망이야. 이 우주의 악과 맞서 싸워야 해.
그렇게 그녀는 무술 고수, 영화배우, 핫도그 손가락 인간(!) 등 온갖 버전의 자신을 만나며 차원을 넘나드는 싸움에 뛰어들게 됩니다. 에블린의 숙적이자 빌런인 조부 투바키, 그녀는 또 다른 우주인 '알파 유니버스' 속 에블린의 딸 조이였죠.
그녀는 '버스 점프' 기술을 개발한 또 다른 알파 유니버스의 에블린에게 쉴 새 없이 쪼임 당한 나머지 다중우주를 초월하는 능력을 얻고, 결국 극단적 허무주의에 빠져버립니다.
엄마, 어차피 다 의미 없는 거 아님?
이제 에블린은 조이를 막아야 합니다. 아니, 막을 필요가 있을까요? 살면서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고,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의 삶이면 또 어떠하리.
앞서 말했듯 본 작품은 영화적 맥시멀리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례로 무협 서사의 전통적인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독창적인 설정과 연출로 관람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데요.
"별 볼 일 없는 주인공이 특별한 스승(다른 차원의 남편)을 만나 각성하고, 원한을 품은 강력한 적(딸)과 맞선다.” 무공 대신 버스 점프를 하지만 기본 골자는 무협물인 셈입니다. 동시에 심각한 이야기지만 장면 장면에 B급 감성이 가득하죠. 경비원들과 팬티 싸움을 벌이는 조부, 핫도그 손가락 우주...
동시에 작품은 진지할 때면 진지해지는, 오직 트리플 A급이 제대로 된 B급을 만든다는 것을 다시 증명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멀티버스' 설정에 구멍이 많아 저평가를 당했던 다른 영화들과 달리 완벽하다곤 못하지만 나름 촘촘한 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우주마다 다른 선택을 한 ‘또 다른 나’가 존재하고, 그 우주와 접속해 능력을 가져올 수 있다.]
알파 유니버스의 에블린은 다른 평행 우주의 자신과 접촉할 수 있는 기술, '버스 점프'를 개발한다. 헬스 대신 복싱을 수련했던 또 다른 나, 일찍이 회사를 그만두고 꿈을 찾아 무모한 도전을 했지만 성공한 나 등.
다만 버스 점프를 하기 위한 조건은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것. 목숨을 건 혈투 도중 상대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던가 칼로 서로를 베고 베이는 순간에 바닥에 오줌을 싸야 한다던가 등. 에블린의 기술은 이 '예측 불가능한 행동의 목록'까지 보여주는 발전을 거듭한다.
초반부 에블린은 흉폭해진 또 다른 우주의 디어드리와 맞서기 위해 그녀에게 사랑고백을 했고, 쿵푸를 연마해 액션배우로 성공한 또 다른 자신의 전투 능력을 가져와 디어드리를 물리친다.
빌런으로 등장한 "조부 투바키" 역시 단순한 악당이 아닙니다. 조부 투바키(조이)는 그냥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게 아닙니다. 그녀의 목표는 다름 아닌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죠.
극단적인 버스 점프의 결과로 모든 평행우주와 접촉하게 된 그녀는 수많은 갈래의 자신의 인생 속 모든 곳에 고통과 상처가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곧 거대하고 거대한 우주의 관점에서 봤을 땐 모든 것이 무의미하며 먼지와도 같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됩니다. 즉, ‘사는 것이 부질없다’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것이죠.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이해해 줄 어딘가의 ‘에블린’을 찾아다닙니다. 너무 많은 고통을 겪어서 모든 걸 없애고 싶은 존재이자 허무주의 끝판왕이지만, 결국 이해받고 싶었던 것. 사춘기 소녀처럼 작품 내내 그녀는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윗 세대와의 마찰로 인한 현세대의 방황과 고통을 보여주는 듯도 하죠.
에블린도 결국 조부와 같은 깨달음에 도달하지만, 결이 조금 다릅니다.
그래, 우리 삶이 먼지 같고, 결국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야 해.
모든 것을 저버리고 죽음을 택한다고 한들, 결국 먼지가 먼지로 돌아가는 것. 에블린 역시 버스 점프의 한계를 넘어 조부 투바키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양한 우주 속 나의 몸부림도 우주적 관점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또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일에 평생을 고통스러워하는 먼지의 숙명. 입김만 불어도 하염없이 나뒹구는 창틀의 먼지의 운명.
하지만 그녀는 "내가 없었으면 굶어 죽었을 것이다"며 말하던 남편 웨이먼드가 국세청과의 위기를 항상 해결하던 것을 떠올립니다. 언제나 친절하고 천진난만하며 긍정적으로. 밝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웨이먼드가 자신의 운명과 맞서 싸우는 길인 것입니다.
결국 내가 되돌릴 수 없는 삶의 선택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죠. 후회해 봤자.. "부질없으니까"
에블린은 모든 깨달음을 얻고 딸 조이와의 갈등, 아버지로부터의 상처, 남편 웨이먼드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면, 오히려 부담 없이 사랑하고, 이해하고, 웃고, 행복하면 되는 것. 웨이먼드처럼 친절하게, 지금 이 순간을 값지게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