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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골든 트랙

방부의 세계를 노래하다

「POWER ANDRE 99」 | Silica Gel

by 사각예술
POWER ANDRE 99rr

「POWER ANDRE 99」 | Silica Gel

2023 · 얼터너티브 · 74분


세상은 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높게 쌓인 빌딩들과 그것들을 세우기 위해 피칠갑이 되었던 언젠가의 총칼들, 심지어는 실리카겔이 연주하는 기타, 드럼, 건반의 일부도 그렇습니다.


실리카겔의 「POWER ANDRE 99」 은 사이키델릭, 슈게이징, 노이즈락, 얼터너티브, 팝,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의 사운드로 1시간이 넘는 볼륨을 채우는데요. 그 속에서 트랙과 트랙을 질주하며 들려주는 '머신 보이'에 관한 이야기, 비릿한 쇠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위로들.


무엇보다 실리카겔이 중요시 여겼고, 한계까지 다듬어낸 '사운드'가 이 앨범의 최고 강점이라고 소개하고 싶은데요. 청각이란 팔레트에 그들이 짜주는 물감의 형형색색을 느껴보는 경험. 우리는 소리가 인도해 주는 상상의 공간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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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앨범의 세계관

· 아토와 머신 보이



*우선 「POWER ANDRE 99」 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가사도 소리와 운율에 비중을 둔 부분이 있기에 모든 것은 주관적인 의견이며 온전히 필자의 청취감과 MV 등에서 단서를 얻었음을 밝힙니다.


앨범의 중심에는 두 인물, 촉수괴물 외형의 '아토'와 기계로 된 '머신 보이'가 있습니다. 생김새만큼이나 두 사람은 다르지만 사실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은데요.

"Ryudejakeiru"에 등장하는 아토의 모습

뮤직 비디오의 내용대로라면 아토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며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전쟁에 징집됩니다. 평범한 소시민은 그 목적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살육의 현장은 아토를 속에서부터 천천히 갉아먹는데요.

Let's be brave soldiers, yeah
용맹한 병사가 되어라
Let's be huge greedy pig
탐욕스러운 거대한 돼지가 되자

「Jusxtaposition」


불길이 대지를 휩쓸고 병사들은 무쇠 갑옷을 두른 채 혈투를 벌이지만 누구도 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후에 나를 덮쳐오는 건 자기혐오뿐인데요. 결국 앞서 말한 아토와 동일인물이자 현재 시점의 아토인 '머신 보이'는 자신의 혐오스러운 과거를 잊으려고 합니다.

스스로를 죽이다
지금 널 잊어 줄게
혼자 무섭지만 이런 것쯤 견뎌볼게
부끄러운 모습들만 이렇게
다시 돌아갈 순 없을 거라 생각해

「Realize」


아마도 '머신 보이'라는 존재는 영혼이 없는 인간을 상징하지 않나 싶습니다. 인간이라는 이유로 자행되는 공격과 부조리, 고통에 대한 몰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기계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현실의 관점에서 비추어보면, 가사대로 '애석하지만 승자는 없는' 세상에 우리는 던져집니다. 바쁜 사회 속 전쟁처럼 원인불명의 전투와 고통이 매일같이 벌어지기에 점점 기계처럼 무던해지고만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겐 인간답게 사랑하고 숨 쉬고 싶은 의지가 있잖아요.

애석하겠지만 승자는 없어
세상엔 아름답지 않은
사건들만 알려지고 있다고

「Mercurial」

백만 가지 재앙 속에서도
성실하게 지킬 뿐이라고

「Ryudejakeiru」


실리카겔

이를 반영하듯 기계가 된 '머신 보이'는 번뇌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그럼에도 인간처럼 사랑하고 실수하고픈 마음이 솟아납니다. MV에서는 어떤 여성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죠.


17번 트랙「Machineboy空」 왈츠를 연상시키는 피아노 연주는 완벽한 듯 들리지만 속도가 빨라지며 엇나가고 불협화음이 생깁니다. 연주자가 제목처럼 머신 보이라고 생각했을 때 이는 실수와 오차 따위 없는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변해가는 듯한 모습을 연상시키는데요.


반면 앨범 커버를 장식하는 머신 보이의 모습은 서글픈 표정을 지은 채 분쇄기에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피아노를 치다 찰나지만 인간의 모습을 보였던 그에게 내려진 형벌일까요?


엔딩크레딧처럼 흘러나오며 먼지 쌓인 클래식의 감성을 주는 마지막 트랙 「PH-1004」는 머신 보이의 말로를 지켜본 우리를 진정시키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듯도 합니다.





II

총평



피와 무쇠, 기타와 나무, 음악과 평화는 같다


8번 트랙 이 다시 떠오릅니다. 피가 있으면 우리를 지켜주는 쇠가 있고, 나무가 있으니 오선지를 달리는 기타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리카겔이 만든 음악이 있으니 잠시 평화를 꿈꾼 것 같죠.

소외됐던 사람들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
NO PAIN NO FAIL
음악 없는 세상

NO 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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