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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최고의 낚시 작품

「지구를 지켜라!」, 2003

by 사각예술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꼭 먼저 작품을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찰칵 - Giriboy


줄거리


강사장.jpeg 첫 사진부터 죄송합니다

축축하고 으슥한 지하.


한 중년의 남자가 속옷 차림으로 의자에 결박된 채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남자는 자신을 가둔 괴한을 바라보며 이내 소리칩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돈 때문에 이래?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그러자 괴한은 대답합니다. 결박된 상대편과 달리 약간의 흥분감과 분노를 머금은 채로요.


내가 그깟 돈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 난 다 알아.
네가 더러운 외계인이라는 것도, 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도!


지구를지켜라!.jpeg '쏘우'가 생각나는 공간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사실 SF 코미디가 아닌 범죄스릴러 피카레스크 영화…, 일걸요?




주인공 병구(신하균)는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청년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정신 건강을 소모해 외계인 연구를 순차적으로 진행시키던 병구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조수 ‘순이(황정민)’와 함께 인간인 척 살아가는 외계인들을 잡아들이는데요. 그들의 고향, 안드로메다의 왕자를 불러오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찌나 그것들에 심취했는지, 병구는 외계인들의 이름과 특성 등 많은 것을 파악한 상태였는데요. 끝내 인간의 불행을 초래한 가해자가 외계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자 병구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외계인들을 추격하게 됩니다.


combi.jpg 순이와 병구

그런 병구의 지휘 아래 지구방위대 콤비는 악덕한 자본가, 아니 외계 행성의 시민으로 의심되는 강 사장(백윤식)을 납치해 모진 고문과 심문을 하는데요.


한편 지구인들의 연쇄적인 실종으로 경찰은 병구를 쫓기 시작하고, 누명을 썼지만 실력만큼은 전설적인 추 형사까지 행동을 개시하게 됩니다.


형사.jpeg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영웅이지만 병구는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의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 안드로메다의 왕자와 소통이 가능한 강 사장을 협박하여 이 모든 것을 정상화시키려고 합니다.


병구는 과연 지구를, 또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I

맨 인 블랙

작품에 대한 해석


「지구를 지켜라!」는 기본적으로 사회 전반에 깔린 계급의식과 불평등, 부조리함에 대한 우화입니다. 외계인을 쫓기 전 병구의 인생은 그야말로 대환장파티였는데요.


misfortune.jpg 불행이 뭔지 이해도 못할 나이부터

광부 아버지의 사고와 죽음, 이유 없는 학교폭력, 의도치 않은 감옥살이, 어머니의 투병, 파업 진압에 휘말린 연인의 죽음 등 인생에 한 가지만 일어나기에도 너무 끔찍한 것들이었습니다. 오히려 병구가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요.


그냥 화가 너무 났어요.
이걸 (외계인 서적) 읽지 않았다면, 전 계속 화만 내고 살았을 거예요.


갈 곳 없는 분노와 고통에 대해 병구는 결국 반쯤 미쳐서 만악의 근원이 ‘외계인’이라고 지목하게 됩니다. 와중에도 사람들과 유대하고 싶은, 또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내가 지구를 지키겠다’라는 목표가 되고요.


곧이어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을 납치해 외계인이라고 몰아세우며 복수를 행하게 되는 것이 영화의 중심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충격적인 반전은 엔딩에 숨어있지만요.)


2.jpg 병구의 아지트

‘외계’라는 것은 병구가 불행으로부터 도망쳤던 도피처이자 곧 병구의 삶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지구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고 살아있지만,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사람들. 사회의 사각지대 속에서 고통에 신음하던 병구는 지구인임에도 외계인처럼 고립되어 살아온 사람이니까요.


paracite.jpg 비슷한 예시

이유 없는 폭력과 고통에 소모되었던 병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꼬르(=)를 도출하고자 발버둥을 쳤을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해야 하지?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지?


직접적이진 않지만 병구의 불행에 영향을 주었던 강 사장은 이렇게 대답하죠.


그게 내 탓이야? 네 인생 망한 걸 왜 남 탓을 해?


이러한 ‘개인의 고통’에 관한 딜레마는 영화 내내 관객을 주제의식으로 이끕니다. 관객들은 병구를 부조리한 삶에 허덕이는, 우리와 닮은 소시민으로 인식하지만 신뢰하지 못합니다. 정작 관객들과 거리가 먼, 악덕 기업가이자 범상치 않은 언행을 보이는 강 사장에게 설득당하죠.


이는 병구와 비슷한 동기를 가졌던 「조커」의 아서 플렉의 대사로도 비춰볼 수 있습니다.


joker.jpeg 당신은 달랐다고 말할 수 있어?
왜, 토마스 웨인이 애도하니까 슬퍼해야 돼? 길바닥에서 죽은 게 나였으면 당신들은 밟고 지나갔을걸?
(자신을 진정시키는 형사에게) 내 맘을 다 안다고? 근데 내가 미쳐갈 때 어디 있었어? 왜 가만있었어?
- 병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병구는 그저 찾아온 결과에 책임을 지고 있을 뿐인 걸까요? 또 지구의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이 지구를 지키는 길일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 어딘가의 외계인을 만날 확률과

상상하기도 어려운 불행을 한가득 안고 살았던 대한민국의 누군가를 만날 확률.


여러분은 어느 쪽에 베팅하게 될까요? 왠지 모르게 더 얼굴을 찡그리고 놀라워할 쪽은 어디일까요?




II

대어를 낚았다

'최고의 낚시' 영화


본 글의 제목대로 「지구를 지켜라!」는 관객의 뒤통수를 거하게 치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내용과는 상반되는 코믹한 포스터와 어린이 특촬물 같은 제목, 무엇보다도 엔딩이 그렇습니다.


236050_235098_154.jpg 진짜 상상도 못 했다

결국 망상인 줄 알았던 병구의 말들이 모두 사실이었으며, 병구가 착각한 점이라면 강 사장은 평범한 외계 시민이 아닌 외계인 왕자였고, 결국 ‘이 행성엔 희망이 없다’며 지구를 멸망시켜 버리는 결말이죠.


굳이 엔딩을 한번 더 꼬아 황당함을 남길 필요가 있었냐는 불호 의견이 더러 있고, 필자 역시 어안이 벙벙해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개인적으로는 크레딧이 올라가며 오히려 병구의 불행한 삶을, 그와 닮은 우리의 부조리한 삶을 위로해 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doo.jpg 이 지구에서 병구가 행복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적어도 작품 내적으론 삶의 불행이 ‘외계인’의 탓이라는 게 드러나니까요. 결국 이를 모르고 멸종을 맞이한 지구인들 중 누군가는 병구처럼 마지막까지 고통에 발버둥 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요.


다만 병구의 범죄를 미화시키고 ‘남 탓’을 하며 모든 것을 외계인이라는 제3의 요소로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doo2.png 미치지 않고선 살 수가 없었던 거야

오히려 현재 지구의 시스템은 개인의 고통을 당사자의 탓으로 돌리거나 묵살해 버리기에 너무 손쉽다는 단점을 갖고 있거든요.


작품은 그 부분을 콕 집어 지적하고 과장시켜 우스꽝스럽게 만들곤, 갑자기 옆구리에 꽂힌 칼처럼 우화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lifeispain.jpeg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몰랐던 건 아니지만 안다고 피할 수도 없는걸요.




지구를지켜라!포스터.jpeg 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한줄평

세상을 상대로 한 '복수는 나의 것' - 4.0/5


몇몇 분들도 알다시피 장준환 감독의 장편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는 ‘비운의 명작’이냐, ‘허무한 B급 영화’냐로 평가가 갈리는 작품입니다.


작품성에 비해 포스터와 마케팅이 실패하여 흥행하지 못했다는 유명한 후일담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평가가 모두 해당되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말의 허무함이 오히려 작품의 주제의식과 유니크함을 돋보이게 하며 작품성은 흥행 성적에 비해 꽤나 심오하고 매력적이거든요.


kidnap.jpg
choo.jpg
이상하게 향수가 느껴진다

홍경표 촬영감독의 미학적인 촬영구도와 한정된 공간에서 내뿜는 각본의 긴장감, 지나가듯 흘려주는 복선과 2000년대 초반의 실험적이고 컬트적인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스타일.


오늘날 특유의 독특한 감성으로 다시 회자가 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서사와 주제의식을 첨가했으니, 20여 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지구를 지켜라!」에 충분히 매료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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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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