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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살아남기 — 「김씨표류기」

김씨표류기 (2009) | 리뷰 & 해석

by 사각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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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모든 게 녹아내리는 ‘액체 근대’라 불렀습니다. 공동체가 개인을 보호하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우리는 홀로 끊임없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불안한 세계에 던져진 처지라고요.


영국은 외로움을 ‘전염병’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고, 국내 연구 결과 외로움은 아동·청소년부터 노인까지 전 연령이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연결된 듯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단절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죠.


이러한 사회적 단절과 개인의 파편화, 그로부터 오는 수많은 절망들을 담아낸 영화가 있습니다. 냉철한 사회비판 속 아방가르드한 신념을 가진 주인공의 정치 스릴러를⋯ 아니요, 한강에서 떨어져 죽으려다 밤섬에 표류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김씨표류기』, 2009

감독 이해준 | 정재영, 정려원 주연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 김씨. 그래서 우리는 익숙하게 ‘김아무개’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름 없는 익명의 존재,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 현대인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세상과 단절된 채 각자의 방식으로 표류하며 발버둥 치는데요.


이해준 감독의 작품 『김씨표류기』는 우스꽝스러운 포스터와 독특한 줄거리 때문에 그 심오함과 주제의식이 가려지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제, 유머, 결말까지 모두 챙긴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표류합니다. 피로사회 속에서, 연결망이 끊긴 채, 외로움이라는 사회적 질병을 안고서요. 마치 영화에 등장하는 두 명의 김씨처럼요.


미래에 닿지 못해 표류해버린 김씨와

과거를 놓지 못해 표류해버린 김씨.



목차 ¬

I. 남자 '김씨'의 표류기

II. 여자 '김씨'의 표류기

III. 서울, 서울, 서울



I

남자 '김씨'의 표류기

진정한 완성은 자유


사지 멀쩡한 남자가

'김'성근은 실패자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죠. 너무 바쁘고 힘겨워 어머니와 통화하기도 어려운 삶이었을 테지만요.


재기의 가능성이 없던 그는 목숨을 끊을 생각으로 한강에 몸을 던졌지만,

"X신, 죽는 것도 못합니다."


강물에 '밤섬'이라는 작은 섬으로 떠밀려온 성근. 구조를 위해 여러 곳에 전화해 보지만 그들은 믿지 않거나, 이젠 궁금하지 않거나, 그래서 구매할 것인지 궁금해할 뿐입니다.

119 : 무인도에 조난당하셨다고요? (한숨)⋯ 나오세요.
전 여자친구 : 오빠, 우리 이런 식으로 통화하지 않기로 했잖아. 끊을게.
상담사 : 네. 고객님! 무인도에서도 빵빵 잘 터지는 광속 인터넷을⋯.

사회로부터 낙오한 그의 슬픔은 죽음조차 외면당한다는 분노로, 또 그 분노는 점차 '네들 없이도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오기로 변합니다.


참고로 성근이 잠시 급똥을 해결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사루비아의 꽃말은 불타는 열정, 꺾이지 않는 마음이죠.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오래도록 종을 보전한 몇 안 되는 동물이지만, 이미 퇴화해 버린 성근의 생존 DNA는 그를 다시 새로운 사회의 초년생으로 만들었습니다. 성근은 이전에 꿈꿨던 모든 목표와 계획 대신,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살만한데?

그럼에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요. 점점 밤섬에서의 표류가 체류가 되고, 성근은 제2의 삶에 행복을 느껴가기 시작합니다.


어류보다 조류가 맛있습니다. 진화라는 것은 어쩌면, 맛있어져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다만 성근의 일상에는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졸라, 심심합니다.


의식주의 해결에서 '심심함을 달랜다'는, 두 번째 목표가 생긴 그는 <캐스트어웨이>처럼 무생물 친구를 만들거나 취미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해 보지만 모두 반나절이면 질릴 놀이쯤으로 끝납니다.


그 심심함의 기저에는 타인과 소통하고 싶다는 욕구가 자리합니다. 누가 내 말 좀 들어줘. 나 잘 이겨냈으니까, 얘기 좀 하자.


그런 성근에게로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합니다. 와인병에 담긴 A4 용지 한 장.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빌딩들로부터요.

안녕하세요


성근은 기성품을 거부합니다. 모든 기성품은 자신이 도망쳐왔던 도시의 한 조각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식량, 주거, 의류, 심지어는 취미까지. 성근이 밤섬에서 쟁취하는 그 모든 것들에는 '완성'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 말고는 누구도 중요하지 않은, '자유'가 있을 뿐이죠.


번듯한 벽과 천장이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은 깔끔해야 하고, 음식은 소스와 간이 있어야 하고.
항상 타인의 눈치를 보며 실체조차 모호한 '완성'이자 완벽의 형태를 평생 쫓아온 이전의 삶.


반대로 모든 것이 미완성이지만 소중한 순간순간에 행복해하는 삶. 밤섬에서의 성근의 삶이 진정한 '완성'과 닮아있는 느낌입니다. 이는 정연이 배달해 준 짜장면을 거부하고 끝내 짜장면을 손수 만들어 행복감을 만끽하는 성근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멀끔한 정장과 넥타이, 누구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휴대폰을 가졌던 시절에는 느낄 수 없었던 만족감이겠죠.


우린 삶에 허우적거리며 소통이란 허상을 겉돈다

나아가 얼굴도 이름도 아무것도 모르는 정연과의 조우는 성근이 안정 끝에 갈망하던 '외로움'을 달래는 계기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관계에서도 꼭 뭔가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렇게 잠깐의 무료함을 달래고 설렘을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요?


그러나 세상은 성근을 다시 사회로 끌어들입니다. 그를 내쫓았던 것도 사회지만, 사회는 반사회적인 행복을 두고 보지 않습니다.


구교환 배우 맞습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쑥대밭이 된 밤섬. 성근은 결국 한강 정화 작업을 돌던 공무원들에게 발각됩니다. 한바탕 난리가 나는 그 모습은 <멋진 신세계> 속 야만인 '존'을 연상케도 하죠.


'계급'을 표현하는 명찰이 떼이자 얻어맞는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토록 멀어 보였던 도시에 내던져진 성근. 모든 인프라가 갖춰진 도시로 돌아왔지만 성근은 다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제 무엇을 쫓아야 할까요? 전화 한 통이면 달려오는 짜장면일까요? 아니면 누군가와의 조건 없는 깊은 교감일까요?



II

'김'정연의 표류기

도망친 곳엔 외로움이



김정연

'김'정연은 도망자입니다. 나름대로 스스로를 사랑하려 노력했지만 눈코입보다 먼저 보이는 흉터와 학창 시절 집단 따돌림이라는 트라우마로 방문을 걸어 잠근 지 벌써 삼 년입니다.


실수로라도 열리는 일 없게 문에 단단히 박힌 자물쇠, 정연은 그 너머의 엄마에게조차 말 한마디 없이 문자로 소통을 합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는 하지만, 이제는 사랑해 줄 사람조차 곁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규칙적인 삶

다만 히키코모리 정연의 삶은 그렇게 피폐하지만은 않습니다. 매일매일 만보기 만 번. 식사량은 정확하게 칼로리를 따져서, '미니홈피 출근'은 언제나 워라밸 우선. 퇴근한 뒤에는 '달 관찰'이라는 소소하지만 행복한 취미까지 — 이러한 삶을 보전시켜 줄 부유한 집안은 덤이죠.


그러나 정연의 영혼 깊은 곳에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본능이기도 한, '교류'에 대한 욕구인데요. 정연은 매일같이 미니홈피로 출퇴근을 하며 사진을 도용하고 사칭하며 얻는 관심들로 스스로를 달래곤 합니다.


이런 그녀가 거짓 없는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달을 볼 때와, 민방위 훈련. 딱 두 가지입니다. 아무도 없는 달과 아무도 없는 도시를 보면,


나만 혼자가 아닌 것 같아 외롭지 않습니다.


마치 생명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 속에서 정연은 역설적으로 따뜻함을 느낍니다. 수많은 사람 중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보단 어딘가에 숨어 살아갈 외계인에 대한 호기심이 더 반갑습니다.


그리고 정연은, 외계인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인간사회의 상식과는 사뭇 다른 행동을 하는 외계인입니다. 무슨 목적으로 저곳에 불시착한 지는 모르지만 정연은 그가 분명 필사적으로 '심심해한다'는 것을 파악합니다.


정연은 외계인이 임시로 서식하는 땅을 향해 인사를 건넵니다. 답장을 건네받을 방법은 모르지만요.


HELLO의 발신자




정연에게 '실체'라는 것은 달갑지 않습니다. 그녀는 매일같이 인터넷을 돌며 비싼 구두, 화려한 드레스, 예쁜 얼굴을 [이미지 저장] 하여 [내 컴퓨터에서 불러오기] 를 합니다. 실제로 그것들을 가지진 않았지만, 아무렴 어떨까요. 실체 따위에 관심 없는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거든요.


일탈이자 몸부림

영화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흉터는 정연에게 깊게 새겨진 소통의 장애를 의미합니다. 지울 수 없는 결핍이 약점이 되고, 사람들은 약점을 살펴보고 보듬는 대신 따돌리고 못살게 굽니다. 모두가 하하호호 웃으며 사는 것과 달리 '진정 돈독한 관계' 따위는 없었던 것이죠.


성근의 오리배를 손가락으로 밀어주는 장면

이후로 망원경으로 도시를 관찰하다 성근을 발견한 정연은 그와 소통을 시작합니다. 거짓과 허울뿐이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모든 것을 오픈하고 사는 성근에게 호기심이 들었던 걸까요.


그러나 정연은 후반부 성근이 모래에 적은 "넌 누구야? (WHO ARE YOU?)" 라는 질문을 맞닥뜨리고, 고민에 빠집니다. 가족보다도 더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정연에게 실체라는 것은 곧 결핍, 과거의 상처를 의미했으니까요.


결국 정연은 다른 여성의 사진을 프린트해 던지려던 찰나, 내면에서 올라오는 욕구를 이기지 못합니다. 내 본모습으로 사랑받고 싶다는, 진정한 의미의 교류. 동시에 과거의 상처로부터 오는 공포는 그녀를 다시 잠식하는데요.

아이를 보는 듯한 연기가 압권

때맞춰 발각당한 그녀의 '사칭' 행위들은 정연이 억지로 쌓아 올렸던 모든 허상들을 무너뜨립니다. 거짓으로라도 사랑받을 수 없게 된 그녀의 불안은 매일같이 실천하던 루틴도, 달을 바라보던 설렘도, 지저분하지만 보금자리였던 방까지도 집어삼켜버립니다.


사랑받고자 했던 타인에 의해 다시 그림자로 돌아온 정연. 그저 사람들 사이를 부비며 살고 싶었던 정연은 다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제 무엇을 쫓아야 할까요? 더 치밀하고 완벽하게 훔칠 수 있는 사진들일까요? 아니면 누군가와의 조건 없는 깊은 교감일까요?



III

서울, 서울, 서울

'부유'를 쫓아



두 인물의 관계에 가려져 있지만 영화의 또 다른 주제는 '서울'이라는 도시, 그리고 그 속에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입니다. 성근이 조난당한 밤섬은 한강 서강대교에 걸쳐 있는 작은 섬이고, 정연의 집은 시대를 막론하고 서민들의 꿈과 같은 '한강뷰 고층 아파트'죠.


사람과 건물이 차고 넘치는 곳이지만 수많은 시민들은 서울이란 도시 속에서 필사적으로 헤맵니다. 두 사람의 우스꽝스럽고도 서글픈 모습은 사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김씨들, 곧 대한민국의 현대인들이 표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부조리한 사회에서 낙오자에게 두 번 찾아오지 않는 기회.
타인과 어울리기 위해 '나'라는 자아를 버려야 하는 현실.

자신의 두 번째 세상을 만들어 진정한 자유를 맛본 성근과
처음으로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내 교류에 성공한 정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 두 명의 김씨가 쟁취한, '자유'와 '소통'은 현실의 현대인들이 영혼 깊이 갈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이를 먹자 인생의 체크리스트에 두둥실 떠오른 경제적 자유를 위해, 내 자손을 먹여 살릴 '부유'를 위해. 또 그런 치열함을 견딜 깊은 감정적 교류와 돈독한 관계를 소망하죠.


다시 도시로 돌아온 성근은 허망함을 느끼며 버스에 탄 채 63 빌딩으로 향합니다. 확실히 죽을 수 있는 방법이었던 걸까요. 하지만 이번엔 우연이 아닌, 진정한 소통이 가져온 필연적인 타인의 관심이 성근의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가지마

정연은 밤섬에서 쫓겨난 성근을 쫓아 자신의 안식처였던 에서 뛰쳐나갑니다. 그리곤 성근이 탄 버스로 향합니다. 증기기관차처럼 숨이 가빠지고 오랜만에 도시의 매연을 삼킨 폐는 한껏 쪼그라들어 옆구리를 쿡쿡 찌르죠.


그러나 애처로운 뜀박질로 도로를 달리는 버스를 잡기는 역부족. 정연이 결국 성근이 탄 버스를 놓치는가 싶었지만, 그 순간 민방위 훈련이 시작됩니다. 버스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 멈춰 섰고, 정연은 새로운 별에 발을 딛는 우주비행사처럼 버스 안에 들어섭니다.


결국 두 사람은 재회합니다. 성근은 정연의 생김새를 몰랐지만, 수많은 사람 중 오로지 자신을 위해 달려온 누군가의 눈빛은 모를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다 정연이 한 마디를 꺼냅니다.


My name is 김정연


성근에게 하는 말 같기도,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외치는 말 같기도 합니다. 또 당연한 말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레 쑥스러워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표류 중의 구조 요청이 아닌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희망을 향한 안부 인사와도 같아서요.



『김씨표류기』 는 컬트적인 매력과 범대중적인 공감대를 동시에 갖고 있는 작품입니다. 난잡해 보이지만 여러 연출 포인트가 있는 정연의 방이라던지, 성근의 밤섬 생활 속 『캐스트어웨이』 를 패러디한 장면, 두 상처받은 남녀가 소통하며 각자의 희망을 키워가는 모습 등.


당시에 흥행하지 못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지구를 지켜라!』 처럼 실험적인 연출 + 공감대가 높은 메시지를 담고 있어 오히려 오늘날 꾸준히 재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영화의 스케일 치고 많이 투입됐던 제작비 역시 연출의 세세함을 보면 납득이 가기도 하죠.


특히나 어릴 적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커가며 색다르게 보이는 부분도 영화의 구조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구사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나이를 더 먹고 취업을 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집을 사거나, 서울에 살거나, 서울 사람들을 질투하게 된다면 다시 생각날 영화가 아닐까요.


도시의 랜드마크가 될 초고층 빌딩은 실패율 0%의 자살 수단이 되고, 꿈과 일자리가 가득한 국가의 수도는 전쟁터처럼 변해버렸습니다.


한 해의 서울 지하철 수송 인원은 약 26억 명. 서울 시민 약 2000명은 매 해 자살로 생을 마감. 실제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 혹은 아늑한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는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HELP를 외치던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HELLO, HOW ARE YOU?" 였을까요?


이해준 감독의 작품, 『김씨표류기』 였습니다.


★★★★☆ (4.5/5) - 살아남은 자가 아닌 살아가는 자들의 SOS


Edited by 사각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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