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라떼'가 아니라 '시대의 철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인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인천에서 '사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인천에서 살다보니 든 생각들을 나누어보려고 한다. 좀 진지하게, 좀 심각하게, 좀 어려울 수도 있지만 .. 일단 해보기로 했다.
인천에 산댔더니 바다를 매일 보고 사는 줄 안다. 어려서 아버지가 동생과 함께 연안부두에 대려간 일이 있다고 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교을 입학해서 처음 MT(membership training, 모꼬지)를 가면서 처음으로 월미도 바다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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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둘이 2024년 새해 이야기를 하다가 한 사람이 고민하던 제안을 던졌고, 냉큼 받아들었다. '인천을 쓰자!' .. 그런데 왜? 뭘? .. 그렇게 둘의 수다는 1월, 2월에 이어졌고 .. 뭔가 일단 내보자는 결심은 슬그머니 미뤄지고 있었다.
일단 시작하고 고치자!! 어차피 완벽도 없고, 완성도 없다. 부딪히며 채우고 바꿔가자.
자, 그럼 발간사부터 쓰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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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천을 쓰는가?
충분히 이 사회를 경험한 이들이 각자의 경험을 통해 얻은 철학적 기준으로 역사를 가름하며 시대를, 사람을, 지역을 읽어주는 것들에 매혹을 느낀다.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다.
노인 누구나 그런 경험과 지식을 갖고 각자의 가치 기준이 정해져 있을지를 가늠해 보는 것은 다른 문제이긴 하다. 그들에게 그럴 기회와 이유-필요성이 있었는지도 생각해보게 되지만, 그런데도 한 개인의 시간에 축적은 당연히 그렇다고 확신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닐지라도 그렇다. 그 인생을 관통한 무엇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인천의 어떤 것들을 큐레이션 해보자는 제안에 나는 ‘통찰’이 떠올랐다. 물론 석학의 통찰, 철학자의 통찰과는 다를지라도 각자 만나는 사람과 공간, 사건들을 통해 가지게 된 수많은 생각과 고민과 이야기들이 정리되고 고찰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스, 미디어, 기사 등등으로 불리는 것들은 지금, 이 순간을 그저 흘러가며 진실과 사실, 거짓과 참, 오해 등이 혼재하며 혼란스러움을 준다. 정제된 문장 한 줄을 만나는 것이 어렵다. 너무 빠르게 흐르기도 하고, 너무 많은 정보와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판단, 같은-유사한 사건에 대해서도 달라지는 개인들을 말과 태도를 보면 당혹스럽다.
'본다.'는 것은 늘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지점이다.
인천인권영화제, 진보정당 운동, 일상 속의 문화예술, 지역공동체문화예술활동 등에 접점이 있는 시간을 30여 년 보냈다. 문화예술의 힘을 믿고, 도시 속의 공동체에 대한 고민과 기대를 하고, 새로운 시대 흐름과 소통하며 인권을 넘어 생명과 지구의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부디 모두가 ‘다행’이길 바라며 한 귀퉁이에서 나름의 고군분투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지낸다.
고작 쉰이 넘었을 뿐인데 한 생을 다 살아본 듯 다 ‘아는 느낌’이 든다. 물론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른다.’라는 걸 알게 된 것뿐인 것도 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생각한다고 생각하다가, 세대를 떠나 ‘당연(當然)’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아니구나!’ 하며 끊임없이 환기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런 웹진을 하자는 제안에 같이하게 된 것은 ‘시작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천의 다양한 영역에 관한 생각과 고민, 정답을 알 수 없는 궁금증이 많다. 물어볼 곳도 없고,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상황, 사건을 통해 추측하고 가늠할 뿐이다. 그것은 때로 맞기도 하고 당연히 틀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내 주위의 사람과 공간과 사건들에 끊임없이 관심과 애정, 비판과 평가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중에 관심과 호기심, 궁금증을 드러내면 이를 ‘시작’으로 관련된 다양한 시선과 경험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웹진의 글은 결국 개인의 의견일 뿐이지만 지향하는 바는 ‘인천’이라는 오래된 도시의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시선들과 함께 더 멋진 인천을 꿈꿔보는 일이다. 이래저래 다 연결된 관계들이라 불편한 말을 삼가다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나쁜 것, 싫은 것을 감추고 덮다 보니 좋은 것도 멋진 것도 그 가치가 줄어든다.
중학교 때인가 그즈음 내가 태어난 인천에 대해 자랑하고 싶었고, 자부심을 품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무엇을 자랑해야 할지 몰랐고, 자부심을 품을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 삶이 자유롭고 멋진 무엇이길 바라게 되었다. 인천은 어쩔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마음먹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우연히 태어나 자라고 살아오는 인천일 뿐이지만 좀 멋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억지춘향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그런 자부심 말이다.
어찌 보면 스물다섯 살 이후의 내 삶은 좀 더 멋있는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려는 시간이었다. 그것이 인간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말이다. 계속 이게 맞나, 이게 옳은가, 이건 무엇인가 물음과 흔들림 속에서 그래도 놓지 않고 싶은 무엇이었다.
이것도 또 하나의 시도다. 정확한, 믿을만한 정보를 획득하기 어려운 시대에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것들 또는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지금의 눈으로 읽어보는 시도다. ‘새로운 시선’은 아니다. 그저 글쓴이의 시선이다. 다만, 타인의 생각을 오롯이 들을, 읽을 시간이나 마음이 없는 시대에 한 타인의 생각을 만날 순간을 기대하며 쓰는 글이다. 진지한 글을 담아보자는 제안에 동의한다.
SNS에서 수많은 이들의 사진과 글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시대에 ‘통섭(統攝)의 혜안(慧眼)’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한 생을 살아온 이들이 그 생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眼目)과 식견(識見), 취향(趣向)을 담아 쓰는 글과 말을 만나고 싶다. 섣부르고 얕고 부족한 글을 그런 누군가 읽고 한 수 가르쳐줄 시대의 어른을 만나고 싶다. 그런 마음을 담은 시도다.
‘옛날에는 ...’, ‘우리 때는 ...’, ‘그 시절엔 ..’ 하며 하는 이야기도 지금의 현실을 녹여낸 글로 ‘꼰대의 라떼’가 아니라 ‘시대의 철학’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 이야기를 삶의 지혜를 안에서 녹여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갈 아들일 수 있는 미래의 어른과도 만나고 싶다. 넓게 보고 깊게 보며 다양한 색깔과 모양으로 멋있는 이들과 만나고 싶다.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계속 배우고 공부하려는 한 사람의 또 하나의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