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고장 논산에서 옛 선비와 함께 걷는 사색의 길-
벌써 한 해를 보냈다.
지난해 10월 이후 3개월을 쉬고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
코비드 시절의 우리는 암울한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크고 작은 대소사가 몰려 있기도 하고
각자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리의 걸음은 잠시 멈춤.
3개월의 걷기 부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찬바람 부는 겨울 다시 삼남길에 올랐다.
공주 터미널에서 논산시 노성면 주민센터까지의 걸음이다.
2월의 날씨는 생각보다 많이 춥다.
껴입고 또 껴입어서 몸은 둔하지만 마음만은 가볍다.
공주하면 밤을 연상하게 하는 지역답게
여기저기 군밤을 익히는 희미한 연기가 공기를 가른다.
아랫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은 언덕 위 군밤 아저씨를 부른다.
아저씨~군밤 주세요.
아저씨 왈, 지둘러 봐유~~~
언덕위에서 손을 뻗쳐 군밤 봉지를 건네주신다.
달달하고 따끈한 군밤이 얼어붙은 두 뺨을 녹여주며 잠시 위로가 된다.
하룻밤 머무를 숙소가 마땅치 않아 모텔에서 묵기로 했다.
생활의 달인에 나왔다는 중국집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동네 어귀 계룡양조장에 들려 막걸리 세 병을 사서 숙소로 향하던 길에
마침 하늘을 하얗게 덮으며 쏟아져 내리는 눈이 느긋한 발걸음을 붙잡는다.
예쁜 소품 감성이 돋보이는 호젓한 카페에서 따끈한 차 한 잔의 여유를 갖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숙소에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으리라.
막걸리 한 병을 넷이서 나눠 마시고 배낭에 한 병 챙겨 넣고
또 한 병은 모텔 사장님 드시라고 냉장고에 넣고 길을 나선다.
막걸리 한 병에 감동받으셨나 사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경천중학교에 도착했다.
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바람도 차갑고 휘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명재고택에 관한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눈발만큼 길다.
아름다운 조선집인 윤 증 생가에는 실제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단정한 한옥 마루 끝으로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간결한 아름다움으로 건축적 지혜가 엿보이는고택을 나와
공자의 영정을 모신 궐리사에 도착했다.
사당 옆 반쯤 열린 대문 문턱을 지나 좁은 툇마루에 나란히 앉은
수리와 감국 도반이 헐벗은 겨울나무 사이를 가르며 조용히 낙하하는 눈을 바라보고 있다.
핸드폰을 통해 나지막이 들려오는 배경음악이 최백호 님의 '겨울엔 떠나지 말아요~'라니
풍경과 섞이며 흐르는 음률이 사람의 따뜻한 교감과 일치하니 나 또한 울컥한다.
모범생 햇살은 역사 공부하느라 분주하다.
하오의 햇살을 머금은 눈이 잦아들고 있다.
마음은 무념인 상태로 바람에 흔들리는 검불 더미를 지나
오늘의 최종 목적지 노성면 주민센터 근처라고 지도가 표시하는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퇴직 후 카페 개업을 하셨다는 '홍카페' 사장님께 물으니 노성면 주민센터가 없어졌다고 한다.
다음 회차 시작점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시니 감동이다.
우리의 다음 고민은 공주 역으로 이동할 차편이 여의치 않아 걱정하고 있는데
이 또한 사장님의 배려로 지인분께서 공주 역까지 태워다 주셨다.
아무리 낯선 곳이라도
내 자리를 떠나야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친숙해지는,
길 위의 특별한 인연에 감사하다.
다음 걸음 시작을 '홍카페'로 정하고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걸으며 방황하는 존재, 티베트어로 '인간' 그 본연의 자세로
떠나고 돌아오는 반복된 일상이지만
걷는 기쁨과 즐거움을 잘 담아 가리라
그리고 기도한다. 계속 걸어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한 발 더 내딛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