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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길]

-유교의 고장 논산에서 옛 선비와 함께 걷는 사색의 길-

by 신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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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해를 보냈다.

지난해 10월 이후 3개월을 쉬고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

코비드 시절의 우리는 암울한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크고 작은 대소사가 몰려 있기도 하고

각자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리의 걸음은 잠시 멈춤.

3개월의 걷기 부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찬바람 부는 겨울 다시 삼남길에 올랐다.

공주 터미널에서 논산시 노성면 주민센터까지의 걸음이다.


2월의 날씨는 생각보다 많이 춥다.

껴입고 또 껴입어서 몸은 둔하지만 마음만은 가볍다.

공주하면 밤을 연상하게 하는 지역답게

여기저기 군밤을 익히는 희미한 연기가 공기를 가른다.

아랫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은 언덕 위 군밤 아저씨를 부른다.

아저씨~군밤 주세요.

아저씨 왈, 지둘러 봐유~~~

언덕위에서 손을 뻗쳐 군밤 봉지를 건네주신다.

달달하고 따끈한 군밤이 얼어붙은 두 뺨을 녹여주며 잠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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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머무를 숙소가 마땅치 않아 모텔에서 묵기로 했다.

생활의 달인에 나왔다는 중국집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동네 어귀 계룡양조장에 들려 막걸리 세 병을 사서 숙소로 향하던 길에

마침 하늘을 하얗게 덮으며 쏟아져 내리는 눈이 느긋한 발걸음을 붙잡는다.

예쁜 소품 감성이 돋보이는 호젓한 카페에서 따끈한 차 한 잔의 여유를 갖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숙소에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으리라.

막걸리 한 병을 넷이서 나눠 마시고 배낭에 한 병 챙겨 넣고

또 한 병은 모텔 사장님 드시라고 냉장고에 넣고 길을 나선다.

막걸리 한 병에 감동받으셨나 사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경천중학교에 도착했다.


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바람도 차갑고 휘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명재고택에 관한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눈발만큼 길다.

아름다운 조선집인 윤 증 생가에는 실제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단정한 한옥 마루 끝으로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간결한 아름다움으로 건축적 지혜가 엿보이는고택을 나와

공자의 영정을 모신 궐리사에 도착했다.

사당 옆 반쯤 열린 대문 문턱을 지나 좁은 툇마루에 나란히 앉은

수리와 감국 도반이 헐벗은 겨울나무 사이를 가르며 조용히 낙하하는 눈을 바라보고 있다.

핸드폰을 통해 나지막이 들려오는 배경음악이 최백호 님의 '겨울엔 떠나지 말아요~'라니

풍경과 섞이며 흐르는 음률이 사람의 따뜻한 교감과 일치하니 나 또한 울컥한다.

모범생 햇살은 역사 공부하느라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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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의 햇살을 머금은 눈이 잦아들고 있다.

마음은 무념인 상태로 바람에 흔들리는 검불 더미를 지나

오늘의 최종 목적지 노성면 주민센터 근처라고 지도가 표시하는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퇴직 후 카페 개업을 하셨다는 '홍카페' 사장님께 물으니 노성면 주민센터가 없어졌다고 한다.

다음 회차 시작점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시니 감동이다.

우리의 다음 고민은 공주 역으로 이동할 차편이 여의치 않아 걱정하고 있는데

이 또한 사장님의 배려로 지인분께서 공주 역까지 태워다 주셨다.

아무리 낯선 곳이라도

내 자리를 떠나야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친숙해지는,

길 위의 특별한 인연에 감사하다.


다음 걸음 시작을 '홍카페'로 정하고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걸으며 방황하는 존재, 티베트어로 '인간' 그 본연의 자세로

떠나고 돌아오는 반복된 일상이지만

걷는 기쁨과 즐거움을 잘 담아 가리라

그리고 기도한다. 계속 걸어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한 발 더 내딛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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