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최대의 역참지 삼례에서 지역문화의 꿈을 만나다
호남의 첫 고을 원곡마을에서 삼남길을 이어간다.
알바인가를 의심하면서 산등성이로 올라간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았던 듯 잡풀로 산길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큰 도로를 따라 걸을 수도 있지만 산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
지금이 봄이던가 여름 햇살을 닮은 따가운 햇살로 일상의 때를 털어내듯 오르막을 올랐다.
야트막한 산 덩어리들과 밋밋한 들판, 순하게 뻗어난 오솔길,
발에 밟히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쑥 향이 향기롭다.
빼꼼~ 프로언니, 그 담장 너머에 뭐가 있던가요?
까치발을 들고 담장을 올려다보던 언니 왈 '봄 햇살과 꽃향기가 있었다오'
구겨지지 않은 프로언니의 심성에서 한 줄의 시가 흐른다.
정갈한 장독대, 풋풋한 마늘밭, 이 집의 안주인이 되어
툇마루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는 상상을 해 본다는 순박한 천성이 녹아있는 감국이의
싱그러운 바램에 장단 맞추다 보니 나 또한 가슴이 부푼다.
프로언니의 합류로 걸사녀의 분위기는 더욱 부드럽고 호탕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익산 보석박물관 옆 함벽정에 오른다.
일렁이는 저수지 물결과 바람에 휘날리는 연분홍 벚꽃을 바라보니
순간 온순하고 가벼워지는 자신을 느낀다.
한 겨울을 지나는 매서운 바람에도 팔랑이는 바지를 입고
사십 대처럼 보이는 수리 도반의 환갑을 맞아
한 끼 잘 차려주는 한정식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됐다.
길에서 만난 인연이 환갑이 되고 칠순이 되어도 계속 걸어갈 우리들이 대견스럽다.
어스름한 저녁, 백제 왕궁 달빛 축제가 한창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을 보러 나섰다.
환하게 피어난 벚꽃과 어우러진 오층석탑을 카메라에 담는 사진가들로 북적하다.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을 이용해 노을에 물든 환상적인 석탑의 모습을 찍으려는 그들을 따라
자세를 취하고 핸드폰으로 오층석탑을 그럴듯하게 찍어본다.
쭈그렸다 엎드렸다를 반복하며 핸드폰으로 찍는 우리의 모습이 재미있는 소재였을까.
어느 틈에 전문 사진가들의 피사체가 되어있었다.
운 좋게 깔끔하고 저렴한 숙소에서 개운한 아침을 맞는다.
더군다나 조식 뷔페가 꽤 근사하다.
계란 반숙 후라이를 직접 만들어 뜨끈한 밥에 김치 열무 한쪽씩 담아내고
식빵을 구워 땅콩잼과 딸기잼을 잘 버무려 든든한 아침을 먹는다.
옛길 삼남대로의 길목에 세워져 수많은 길손들이 쉬어 갔던 곳
보물 1번지 비비정을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선다.
만경강 양쪽으로 활짝 핀 벚꽃길을 걷고 싶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도 좋아
우리 나이대를 지나는 주인장의 추천 올드 팝송이 흐르는 카페 2층에 자리를 잡고
비비정과 만경강 경치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창가에 나란히 앉았다.
"한여름에 눈빛같이 시원스럽게 부서져 내리는 물결과
가을 달밤에 갈꽃 핀 백사장에 사뿐히 내려앉는 기러기떼를
비비정에서 굽어볼 때 배꽃같이 희게 부서지는 달빛의 정경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작가 미상의 글을 상상하며 그윽한 시선으로 한 뭉치의 구름이 천천히 흐르는 풍경을 눈에 담는다.
장성한 아들에게 세련된 엄마 노릇 하기 실천(?)중이시라는 프로언니의 너털웃음이 귀엽다.
삼남길을 걷고 있는 걸사녀를 응원하러 귀한 손님이 오셨다.
'길위의 인문학 우리땅걷기' 신정일 이사장님께서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책을 들고 오셨다.
'나는 그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
평생을 두 발로 뚜벅뚜벅 전국을 돌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오롯이 책에 담아내셨으니
찾아가 기운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가던 길을 잠시 쉬고 이사장님과 함께 완주 화암사로 향했다.
안도현 시인이 말한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
숨겨두고 싶은, 잘 늙은 절에 꽃비가 내리는 누각 '우화루'를 보러 갔다.
몇 번을 가도 행복감이 차오르는 풍광을 담은 우화루를 찾는 내 발걸음이 나비 날개 같다.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 미풍에 실려 삼례 동네 어귀에 닿았다
호남 최대의 역참지이며 조선시대 삼남대로와 통영대로가 만나는 지점인 삼례,
부드러운 훈풍만큼 정겹고 살뜰해 보이는 삼례라는 동네를 만나는 느낌이 참 좋다.
일제 강점기 때 수탈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양곡저장창고를 개조해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만든
삼례문화예술촌 건물이 인상적이다.
지역 문화의 꿈이 자라고 있고 지역 예술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며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공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반듯하고 아름다운 삼례 성당을 지나니 초봄처럼 여린 햇살이 서산마루로 넘어간다.
이틀간의 여정이 끝나고 있다.
우리는 봄꽃이 앞다투며 피고 지는 대자연의 숨결 안에서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등 떠밀리듯 흩어졌다가 다시 가슴이 부풀어 오를 때 만날 것이다.
그때까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