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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번째 길]

풋풋하고 따스한 햇살이 심장을 간지럽게 하는 길

by 신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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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원평버스터미널 앞에 모였다.

걸어야 할 길이 펼쳐져 있어 충분히 행복한 시작점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길을 재촉한다.

마을은 조용하고 인기척이 없다.

우리의 발걸음과 규칙적인 호흡 소리만 적막을 깨는 자동차 소리와 섞인다.

빼어날 것도 없는 수더분한 시골 풍경은 마음 한자락에 훈기를 불어 넣는다.

첫 차를 타고 집을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여름의 아카시아 향기로 행복을 마시며 세속에 오염되지 않은 길을 가는 우리들은

적당한 바람과 햇빛으로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어리석게 놓친 첫사랑에 연연하지 않고

마지막 사랑이 주는 편안함이 옳다고 주장하는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충만한 삶이라는 것을

자연 속에서 걸으면서 깨닫고 나이 들어가는 지금의 우리가 좋다.

곧 정읍시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정읍시까지는 22km, 부지런히 걸어간다.


고개 모양새가 솥을 닮아 붙여진 솥튼재를 넘는데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햇살이 따스하다.

가끔씩 만나는 반사경 앞에서는

자동적으로 폼을 잡고 사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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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키보다 더 큰 푸릇한 풀들이 맞닿을 듯 하늘과 인사하고

시원한 돌 위에 배 깔고 누워 경계를 허물고 쉬고 있는 동네 고양이와 눈을 맞추며 걸어간다.

우리의 걸음이 점점 지쳐갈 즈음 커피로 수혈을 하기 위해 역사와 전통의 도시 태인에 머물렀다.

'호남제일정' 현판이 붙어있는 피향정

신라 때 태산 군수로 와 있던 최치원이 풍월을 읊었다는 연못가 정자에서

이 마을의 과거와 현재, 정자 안에 숨겨진 비밀이라며 처음 만난 낯선 우리들에게

진지한 눈빛으로 얘기하던 아저씨를 뒤로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물댄 논에는 모가 잘 자라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길가의 꽃들, 흙냄새, 마을이라는 이름 아래 옹기종기 자리한 집들

녹물이 배인 듯 세월을 비껴갈 수 없는 쓸쓸한 풍경 앞에서도 즐거운 우리의 걸음.

새로운 다리 곁에서 나란히 자리를 지키는 옛 거산교 돌다리를 건너는데

노란 들꽃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지나는 우리를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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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대로 표식을 놓쳤는지 두 번씩 엉뚱한 길로 헤매는 동안 날이 어두워졌다.

택시를 부르기 위해 장성장묘개발 상호 앞에서 전주로 이동 중이던 택시를 가까스로 불렀다.

해는 지고 푸른빛의 어두운 공기가 마을을 감싸는 시간,

마땅한 숙소가 없어 결국 논 밭 한가운데 있는 무인텔을 오늘의 숙소로 정하고

여자 셋이 방법을 연구하여 들어선 숙소는 창문도 없는, 답답한 구조였다.

햇살과 감국이는 숨을 못 쉬겠다고 하는데...... 어쩌지......

날파리와 한판승하며 먹었던 맛없는 점심 식사와 꽉 막힌 숙소하며....

그래도 이게 최선이지, 굶지 않고 잘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생전 처음 들어가 본 무인텔의 구조가 답답했던 우리들은

결국 새벽 5시에 일어나 숙소를 나왔다.

잠을 제대로 못 자 푸석푸석한 얼굴이지만

새벽노을을 받아 분홍빛으로 물든 은은한 하늘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고 일러준다.

근처 식당이 없어 편의점에서 계란과 컵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걷기 시작했다.

북면으로 향해 걷다 성황산을 오르는 산길을 오른다.

나뭇잎으로 떨어진 햇살로 얇은 초록 잎의 속살이 바람을 만나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이라니,

세상에나...... 너무 아름답다.

오르락내리락 숨이 턱에 차오르지만 오솔길을 따라 걷는 녹색 산길에서 만나는 자연 풍광은

별생각 없는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폐 속 가득 피톤치드로 채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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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시청에 도착했다.

정읍에 가면 쌍화차를 마시겠다는 일념으로 제대로 된 차를 마실 수 있는 찻집을 찾아

진하고 고급스러운 쌍화차를 마셨다.

쌍화차의 여운이 사라질 즈음 석고경로당에서 프로언니와 합류했다.

자외선 패치를 붙이고 평상에 누운 우리들에게 "신상이여?"

재치 만담꾼 프로언니의 유머스러움은 걷는 내내 심심할 틈을 안내어준다.

복바위가 넝쿨째 굴러온 구암마을버스정류장에 앉아서도

프로언니의 입담은 우리를 큰 소리로 웃게 만든다.

나이가 들어가면 화려한 색을 좋아한다더니

많은 화초가 놓인 집 앞에서 발길이 머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긋불긋한 꽃 앞에서 한동안 사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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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꽃을 만나고 마을을 만나고 강을 만나는 길

지금 서 있는 길은 걸어온 길의 끝이지만

앞으로 가야 할 곳의 시작점으로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우리의 걸음이 땅 끝에 닿은 그날

책장에 꽂히는 책들처럼 하나의 길이 끝나면 새로운 길로 찾아 나설 테지.

나이가 들수록 탁한 느낌이 아닌 자연을 닮아 시선도 표정도 맑은 우리들은

입암파출소 앞에서 하루 평균 24km 걸어 이틀간의 여정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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