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알아서 기는 사람을 제일 좋아한다
‘권력 감수성’이라는 말이 있다. 크건 작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언행이 그 권력이 미치는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세심하게 파악하여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주 내가 참가하고 있는 과천 ‘바로마켓’에서 이와 관련된 일이 하나 있었기에 소개한다.
지난주 화요일 과천에 있는 마사회 1층 강당에서 ‘바로마켓’ 임시총회가 있었다. 시장 자치회 회장이 자치회 규칙 개정안을 상정했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그동안 논란이 되어 온 ‘푸드트럭’과 ‘축산물 판매 차량’ 운영자를 시장 자치회 정식 회원과 구분되는 준회원으로 하자는 내용이다.
자치회 회장은 이들의 성격이 과일이나 채소 등을 직접 생산, 판매하는 여타 농가와는 다르므로 ‘준회원’ 제도를 신설해서, 회원에 준하는 자격을 인정하되, 자치회 임원 피선거권은 인정하지 말자는 취지를 개정안에 담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선뜻 이해가 안 되지만,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집요하게 이 주장을 해왔다.
지난 6월에 있었던 임시총회에서도 본질적으로 같은 취지의 안건이 상정되었다가 부결된 바 있다. 회원들은 굳이 푸드트럭 운영자 등을 일반 회원들과 구분해서 취급할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회장이 자신의 임기를 두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다시 이 문제를 들고 나왔으니, 회의가 소란해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회의는 시장이 파 한 화요일 5시 반에 시작했다. 회의 시작 전부터 농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쑥덕쑥덕하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는 시작하자마자 난항에 부딪혔다. 회원 중 하나가, “왜 회장 임기가 2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이 개정안을 상정하는가. 이미 지난 6월 임시총회에서 회원들의 의사가 확인되지 않았는가. 우선 회원들에게 이 규칙 개정안을 안건으로 상정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관한 찬반부터 물어야 한다.”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이 의견에 대해 회장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그냥 뭉개버렸다.
그러면서 “이 시장 위탁운영기관인 임팩트마켓의 요구사항이다. 임팩트마켓은 푸드트럭 등은 일반 농가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달리 취급해야 한다는 것을 비롯해 몇 가지 의견을 적시하면서, 그 의견을 반영해 자치회 규칙을 개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왔다. 우리가 규칙을 개정하면, 그 내용을 반영하여 위탁 운영기관의 운영 규정을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내년도 신규농가 모집 일정 등을 감안할 때, 일정이 촉박하여 부득이 임시총회를 소집했다. 우리가 시장 운영기관의 의견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입장의 차이는 내가 회의장을 뛰쳐나온 7시경까지 소재만 바꿔가며 이어졌다. 사실 내가 회의장을 뛰쳐나왔다고는 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내가 화장실이라도 간 줄 알았을 만큼 조용히 나왔다. 그러니 내 마음속으로만 뛰쳐나온 것이고 회의장에서는 나를 회의 도중에 슬그머니 사라진 사람 정도로 치부했을 것이다.
회의장을 나오니 내가 느꼈던 답답함의 원인이 무엇 때문이었는지가 명확해졌다. 회장과 소위 ‘반대파’(회장과 의견을 달리하는 일단의 사람들)가 다투는 것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특별한 감응도 없다. 내가 답답했던 것은 위탁 운영 기관의 무지와 무례, 그리고 이러한 운영기관의 부당한 요구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자치회 지도부의 비굴한 태도 때문이었다.
시장 자치회 규칙은 이 시장을 구성하는 농가들이 모임에 관한 제반 사항에 대한 합의를 담은 문서이다. 그러니 이 모임에 관한 규칙은 농가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위탁 운영기관을 포함한 외부 기관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도 운영기관이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면서 그 내용을 반영하여 자치회 규칙을 고치라고 요구하다니. 보기에 따라서는 폭력적인 처사라는 생각까지 들 일이다. 우리 모임의 규칙을 왜 남이 왈가왈부하는가. 이런 터무니없는 요구는 대략 두 가지 중의 하나다. 하나는 자신의 행위가 뭐가 잘못된 것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잘못인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지위가 우월한 것을 이용해 밀어붙이는 경우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운영기관 관계자들이 권위적인 성향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알면서도 밀어붙이는 것 같지는 않고 정당한 절차를 잘 몰라서 그런 것 같기는 하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시장 자치회의 의견을 수렴하려면 다짜고짜 자치회 규칙을 개정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궁금한 사항에 대해 설문조사나 의견 조회를 해야 했다. 이후 운영기관이 농가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운영 규정을 만들고, 자치회가 운영규정을 반영하여 시장 자치회 규칙을 개정했다면 누가 문제로 삼겠는가. 몰라서 용감한 것일까, 아무튼 운영기관의 부당한 요구가 내 답답함의 주원인이기는 했다.
자치회 지도부의 태도 또한 문제다. 운영기관이 어떤 요구를 하면 그 요구의 정당성 여부를 따져볼 여지도 없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지도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성향일 수도 있겠고 그동안 운영기관들이 권한을 남용해 온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역학관계 때문에 부당하더라도 수용해야 한다는 태도는 비굴하다. 요구사항이 정당하다면 비록 힘없는 사람이 요구하더라도 받아들이고, 부당하다면 권력자가 요구하더라도 저항하는 것이 당당한 태도가 아닐까.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운영기관이 시장 자치회의 상부 기관도 아니고 역학 관계상 우위에 있지도 않다. 그냥 알아서 기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