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가까워지는 삶을 꿈꾸며
시의 매력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어릴 적부터 밤에 관한 시들은 좋아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나, 김소월 시인의 '봄밤' 등. 워낙 유명한 시이고, 아는 시인이라곤 윤동주나 김소월 밖에 없어서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최근 지인들과 함께 시를 읽으며 내가 ‘밤’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정호승 시인의 '여름밤' , 나태주 시인의 '깜깜한 여름밤' , 이현승 시인의 '한여름밤의 꿈' 등 내가 고른 시들이 전부 밤에 관한 시인 걸 보고 나서야, '내가 ‘밤’에 관한 시를 유난히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를 계기로 '깜깜한 밤에 사색을 하거나 신비한 별과 달을 보며 상상력을 키울 수 있으니 시인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시감이지’ 하며 본격적으로 밤에 대한 시들을 찾았다. 그중 파블로 네루다의 시 “밤의 건물들”이라는 시를 읽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오, 신이시여! 얼마나 많은 개구리들이 밤에 길들여져 있는지. 그네들은 마흔 줄의 인간처럼 목이 쉰 채 휘파람을 분다... (중략) 그리고 이어지는 섞임. 밤의 요소들의 집합.”
이 부분을 읽다 보니 밤을 좋아하지만 길들여지지 않으려 애쓴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미국살이 중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밤이다. 한국에서는 특히 대도시에만 살았기에 더더욱 가로등이 많지 않은 어두운 미국의 밤길이 가장 길들여지지 않았다. 한국은 24시간 운영하는 가게도 많고 밤문화가 화려하다 보니 밤이어도 시골길이 아닌 이상 캄캄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데 미국은 밤이 되면 어딜 가든 깜깜하다. 특히 밤 운전이 어려운데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올라치면 깜깜한 밤길을 운전하는 게여간 힘든 게 아니다.
주택가도 마찬가지여서 한국처럼 밤산책, 밤운동을 나가는 건 엄두도 내지 않는다. 초기 정착기에 미국 할머니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던 나는 이 사실을 몰라 할머니와 무던히도 부딪히곤 했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8시만 지나도, 내가 일 때문에 늦어도, ‘직장으로 전화를 건다’. ‘위험하다’며 매일 잔소리를 하셨다. 나는 ‘도대체 서른을 넘긴 처자이고 매일 내가 운전해서 차 타고 다니는데 뭐가 위험하다는 것인가’ 하고 힘들어하곤 했다. 그때는 미처 내가 미국 밤에 길들여지지 않아서, 미국 문화에 대한 길들여지지 않아서라기보다 할머니와의 세대차이라고만 치부했다.
미국에 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어느 정도 어두움에 적응은 되었지만 여전히 한국의 환한 불빛이 그리웠다. 네루다의 ‘밤의 건물들’ 시가 아니었다면 당연한 밤의 어두움을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시에 나오는 밤을 이루는 요소들을 생각해 본다.
어둠, 조용함, 별빛, 달빛.. 여름밤에는 반딧불이까지. (이제는 미국에서도 잘 보기 힘들지만) 미국에 도착한 첫해 여름, 집 앞 잔디밭에 반딧불이 어찌나 많던지 그 환하고 신비스러운 불빛을 잊지 못한다. 어두운 밤에 바라보는 별빛은 또 어떤가. 대청마루 (집에 대청마루가 있었다)에서 바라보는 쏟아지는 별빛은 어찌나 황홀한지.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는 저 별빛이 눈에 띄지 않았겠지. 역시 밤은 밤다워야 한다. 여름은 여름다워야 하고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 밤은 깜깜해야 하는데 우주에서 보면 밤에도 환한 지구에 사는 인간들은 한 여름엔 에어컨을 빵빵 틀며 긴팔을 입고 겨울에는 히터를 빵빵 틀어 반팔을 입지 않았던가.
지구가, 자연이, 이제는 반항하는 인간에게 더 이상 반항해도 소용없다는 듯이 에어컨으로도 견디기 힘든 무더위가 기승이다. 지구가 끓는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더워졌다. 여름을 여름답게 보내지 않았던 인간들에 대한 자연의 경고가 아닐까. 매년 가장 더운 여름이라는 뉴스가, 전 세계적으로 살인적인 무더위가 나에게 자연에 싸우지 말고 길들여지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밤에 길들여져 휘파람을 부는 개구리처럼, 밤의 요소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아름다운 시를 짓는 시인들처럼, 나도 밤에, 여름에, 겨울에, 자연에 길들여지고 싶다. 밤길이 어둡다고 불평하지 말고, 매일 모양이 변하는 달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무의 달빛 그림자를 재보고, 그러다 보면 나도 언젠가 멋진 나만의 밤시를 쓸 수 있겠지? 일단 제목부터 정해보련다. 밤다운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