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 시인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중간생략)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고등학교 '독서' 교과서(지학사)에 실린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 화백의 뉴욕 유학 시절,
김광섭 시인의 부고를 듣고 탄생했습니다.
9살 차이나나는 선배지만, 김환기 화백은
김광섭 시인을 존경하고 잘 따랐습니다.
그래서 당시 돈으로 삽화가 있는 고급 시집을 내자고
퍽 진지하게 김 시인에게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돈으로 3만원쯤 되는 고오-급 시집을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김환기 화백은 '뉴욕'에서
김광섭 시인의 부고를 듣게 됩니다.
지금처럼, 비행기를 타고 당장 날아올 수도 없는 시대
속을 끓이던 김 화백은, 그 슬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킵니다.
존경하는 선배인 김광섭 시인을 잃은 슬픔을
2m넘는 캔버스에 꾹꾹 눌러담습니다.
마치 눈물을 방울방울 흘려 커다란 캔버스를 채우듯.
5000개가 넘는 점을 담담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 마지막 문구를
작품 제목으로 붙였습니다.
그렇게 탄생한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입니다.
하지만 김 시인이 세상을 등진 건 1977년,
이 작품이 나오고 7년뒤.
심지어, 김 화백이 김광섭 시인보다도
몇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듯 김 시인의 사망 오보가
김 화백에게 잘못 전달돼 탄생한 작품이지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1970년 한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김환기 화백의 이른바 ‘전면화’ 시대를 엽니다.
<어디서>의 확대 버전인 큰 사이즈
<어디서> 시리즈도 나옵니다.
원작보다 사이즈가 조금 큰데, 색이나 기법은 거의 유사합니다.
이후, 130억 경매가로 유명세를 탄 작품 <우주>부터,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전면화 대작들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이른바, 김환기 장르가 시작된 것입니다.
김 화백이 제작한, 전면화 기법은
캔버스에 젯소를 바르는 통상적인 방법이 아닌,
면천 위에 아교만 바르는 방식이었습니다.
토끼 아교를 발랐는데,
그림 속 '점'이 너무 퍼지지 않게
또 너무 쿡 찍히지 않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고안됐습니다.
선염이 자연스럽게 번지는 효과를 만들기 위해,
테라핀유를 많이 섞은 ‘묽은 유화’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서양의 붓이 질이 훨씬 더 좋다고 평가받았는데
상대적으로 더 가느다란, 동양의 붓을 선호했습니다.
이렇게 동양적 기법으로
면포에 점을 찍으면, 한지에 먹이 퍼지듯,
그 점이 때론 짙고 때론 가볍게 번졌습니다.
점을 찍고, 번짐을 기다리고 점을 또 찍고
테두리를 둘렀습니다.
또 다시 점을 찍고, 번짐을 기다려가며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환기 미술관, 백승이 학예사에게
몇개의 점이 찍혔냐는 물었더니,
통상 10만개의 점이 찍혔다라고 답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10만개의 점이 찍혔다기보단
몇번이고 점을 다시 찍다보니,
셀수 없이 많다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김 화백의 전면화는
타국땅에서 고국에 남겨진 가족과 지인에 대한 그리움을 위로하는
김 화백만의 공간이었습니다.
<김광섭에게 보낸 시>
이 점들이 내 눈과 마음에 모두가 보옥으로 보여요.
붓을 들면 언제나 서러운 생각이 쏟아져 오는데
왜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참 모르겠어요. 창밖에 빗소리가 커집니다.”
김환기 화백은 전라남도 신안,
안좌도라는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섬 소년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바다를 보고 자란 섬소년.
바다색을 유심히 관찰하던 그는
코발트 블루부터 페르시안 블루, 블루 그린까지.
‘환기 블루’라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바다 빛 색감을 잘 활용했습니다.
깊은 바다의 불투명함과 얕은 바다의 투명함,
그리고 고고해보이는 청아함도
푸른 빛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림 소재로 자주 사용한 ‘달 항아리’도
고요한 새벽빛과 깊은 쪽빛으로 그렸습니다.
당시에는 도쿄(동경)에서 그림을 수학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세계 미술 중심지을 옮겨다니며,
소위 '마스터'를 한 한국 화가는 김 화백 뿐이었습니다.
도쿄, 파리, 뉴욕을 거치며
세계 미술 무대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시험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사이즈의 캔버스를 주로 활용했습니다.
커다란 그림이 사람을 감싸는 느낌이, 특히 추상화에서 많이 쓰였습니다.
김 화백은 이렇게 대형 캔버스를 택한
서양적 방법은 받아들이면서도
동양적 가치관과 기법은 고수했습니다.
누구보다 워커홀릭이었는데,
때론 하루 열 시간이 넘는 작업 시간에,
목 디스크와 각종 질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의 사위이자, 단색화의 거장 윤형근은
김 화백의 사인을 “과로”라고 표현했을 정돕니다.
김 화백이 자신의 작품 세계에 몰두하면서,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었던 건
두 천재가 사랑한 여인, 아내 김향안 덕분입니다.
천재 작가,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은
결혼한 지 1년도 되지않아 남편 이상을 잃었습니다.
큰 슬픔을 딛고, 몇 년 후
자녀 셋을 키우던 김환기 화백을 만나
두 번째 화촉을 밝혔습니다.
변동림 집안의 반대가 컸지만,
문인들과 화가들을 모아두고 누구보다 화려하게, 식을 올렸습니다.
변동림은 김환기 화백의
아호를 딴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김환기 화백을 위해 살았습니다.
김환기를 위해 파리로 먼저 유학을 간 후,
언어를 배웠습니다.
작가들 사이에서 아뜰리에 정보가 공유된다는 사실에
해외 작가들과 친해지며, 터를 닦았습니다.
매니저 역할도 자처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김환기가 작고한 후에도 계속 됐습니다.
김향안은 프랑스어와 영어로 만든 도록을 만들어
해외 유명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고, 재단을 세워 그의 기록을 아카이브 하는 등
그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서정적 추상화’란 장르를 만든, 김환기 화백.
그림 속 수 많은 우주가
따뜻한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TWyiM7N2WEA?si=Lr86R2S2xbAYrEq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