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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한리 Chae Hanlee Feb 07. 2024

성실(誠實)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읽기 40

성실(誠實)에 대하여 


보통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한번 한 약속은 꼭 지키기, 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일에 대해 그 책임을 결코 회피하지 않기 등등을 ‘성실 (誠實)’의 내용으로 생각한다.  즉, 사회적인 맥락에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태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성실’을 밖에서 보는 입장이다. 이때 ‘밖’은 공동체, 친지, 관습, 신 등이 다 포함된다.


그러나 니체는 ‘성실’을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려는 개인의 '의지 (意志)' 보았다. 성실을 안으로부터 보는 입장이다. 자기가 믿는 바의 가치에 대해 외부에서 알아주건 말건, 높이 혹은 낮게 평가하건 말건, 관습에 부합하건 안하건에 상관없이 한번 마음먹으면 그 가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변하지 않는 한, 죽는 순간까지 지키는 것__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바의 성실이다. 이런 성실은 오직 최고로 고독한자, 위대할 정도로 대담한 자만이 지켜낼 수 있는 삶에 대한 태도다. 


" 노예적인 행복에서 해방되고, 신들과의 예배에서 구제되고, 무서움이 없이 대담하고 위대하게, 그리고 고독하게 –성실한 자의 의지(意志)는 이와 같다. " (1)


니체는 이런 의지를 갖춘 성실한 자는 사회라는, ‘우상(偶像)이 없을 수 없는 오아시스’를 떠나 ‘신(神)의 발자국이 나지 않은 사막’으로 가라고 재촉한다. (2)


" 예부터 성실한 자는 사막에서 살았으며, 그 사람이야말로 ……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다 –도시에 사는 자는 영양이 좋은 무리, 고명한 현자들 –즉 수레를 끄는 잡종동물이다.  ……그들은 설사 찬연히 빛나는 황금으로 장식되었다 하더라도, 필경은 사역(使役)되는 하인이며,

자갈 물린 가축에 지나지 않는다. " (3)


물론, 니체의 ‘사막’은 비유 (比喩) 로서의 사막이며, 모래바람이 부는 실제의 사막은 아닐 것이다. 이 사막에는 어쩌면 예수가 그랬듯이 나와 나의 적, 즉 나를 유혹하는 자만이 존재하는 사막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이 예수와 함께 계셨다.  예수의 정신 속에.  그러나 신이 없이 나와 나를 유혹하는 자와의 일대일 대결이라는 점에서 니체의 사막은 어쩌면 예수의 사막보다 더 철저하게 고독한 장소인지도 모른다.  이 사막에 비하면 어린 왕자의 사막은 그래도 덜 고독한 편이다. 꽃이 있고, 여우가 있으므로, 추억과 귀향에의 기대가 있으므로. 어쩌면 오아시스 안에 살면서 마음속에 사막을 품으면 되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해 보지만, 마음속에 품은 사막은 니체의 사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덜 단호하고, 그리고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은 ‘비겁하다’는 점이다. 언제든 바라볼 오아시스가 있고, 그리로 뛰쳐나갈 문이 있는 사막이므로. 








(1)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20

(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20

(3)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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