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하나를 찍어 선을 길게 그어가다 보면 닿는 곳에 늘 그녀가 있다. 그립다. 이렇게 그리운데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낼지 벌써부터 겁이 난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반년이 되고, 일 년이 되면, 이런 그리움이 없던 감정처럼 사라지게 되면 좋겠다.
헤어진 남자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서 다시 시작하자 말하면 질리려나. 그녀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왜 아무 말도 못 했는지, 차라리 쏟아붓듯 화를 냈다면 뭐라 말을 해봤을 텐데, 차갑게 식은 감정이 오롯이 드러나는 '우리 다신 마주치지 말자'는 말을 끝으로 돌아서는 너에게, 나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그렇게 너를 보냈었다. 그래, 내가 많이 잘못했던 거겠지. 그러니 그렇게 차가운 말만 남기고 돌아선 거겠지. 그걸 아는 나니까 그렇게 너를 한 번 잡아보지도 못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점을 찍어 너에게 닿아가는 선들을 애써 꺾어내며 몇 달을 지냈다. 아픔을 잡아두는 세월은 없다는데, 내 그리움은 아픔이 아닌지 세월이 흘러도 흘러가주질 않는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다시 닿아가는 수밖에… 그렇게 몇 달을 지낸 어느 날, 나는 결국 그런 결심을 하고야 말았다.
정성스레 내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하늘색 봉투에 담아,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네 집 현관문 앞에 새벽빛을 담아 놓아두었다. 뭐 하나 잘해준 게 없었던 남자는, 그렇게나마 네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마음만은 네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새벽 네 현관문 앞에 잠시 머물다 등을 돌렸다.
그렇게 열네 밤이 지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매일같이 정성 들여 쓴 편지를,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너에게 보내왔었다. 열다섯 번째 편지를 보내는 날, 새벽빛을 받으며 걷다 보니, 왠지 모를 긴장감 같은 설렘이 느껴졌다. 열다섯이라는 숫자는 네가 늘 좋아하던 숫자이니, 왠지 오늘은 이유 모를 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점점 가까워지는 너의 집 대문 앞에, 어렴풋이 인영이 어른거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아, 혹시… 이렇게 마주치게 되는 것일까…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현관문 앞에서 어른거리던 인영은 너의 것이 아니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내가 그동안 보냈던 하늘색 봉투들을 손에 들고 있던 사람은 너의 어머니셨다. 너를 데려다주던 골목길에서 스치듯 인사를 드린 적이 있는, 상냥한 미소를 지녔던 그분의 얼굴은, 그날 새벽 유난히 창백했고 야위어 있었다.
은성이는 떠났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그러니 이제 그만하세.
너의 어머니는 그 새벽빛 속에서 내게 알 수 없는 말을 하셨다. 네가 떠났다니. 그것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니. 그런 말을 들으며 내가 어떻게 그걸 바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었겠는가.
너는 그렇게 혼자 네 삶을 정리하고, 그렇게 너 혼자 우리의 사랑도 정리했었나 보다. 뭐 하나 네게 잘해준 게 없었던 남자는, 그렇게 네게 우리의 사랑까지 혼자 정리할 짐을 지어주었던 거였다. 바보 같았다. 그렇게 혼자 그리워만 하고, 혼자 너와 재회할 시간들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 마지막 순간에 너를 잡아 볼 걸. 그랬다면 네가 삶의 끝을 내게 의지해 볼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의 사랑을 너 혼자 끝냈다고 생각하게 하지 않았을 텐데. 함께 간직했던 순간들을 잊지 않겠다고 네게 말해 줄수도 있었을 텐데.
너의 끝을 함께해 주지 못했으니, 나는 너에게 끝까지 잘해준 게 없는 남자이고, 그래도 너의 말을 끝까지 지켜주었으니, 어쩌면 네가 마음이라도 편히 가지고 떠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누군가 나에게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날 확률을 물어온다면, 나는 0%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너를 다시 만날 확률을 기대할 수조차 없었던 거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