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연고 Oct 17. 2023

운 좋은 날 2

[상상 오르골 -1-]

이야기 둘,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양복의 어깨가 젖어버렸다. 어깨쯤이야 젖어도 상관없는데, 오늘 하루 있었던 씁쓸한 일들이 매달린 어깨는, 젖어붙은 무게 탓을 해보기라도 하려는 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아 C.


오늘 이 단어만  백 번은 넘게 속으로 되뇌었던 거 같다. 참아야지 살아남으니, 참아보기는 했는데, 내일도 백 번을 저 단어를 말해야 한다면, 결국 마지막에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가 버릴지도 모를 단어다. 그럼 나도 그곳에서 나가야 될 테니, 이 악물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어둠이 내려앉은 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들려온다. 여자 구두소리다. 알아서 지나가겠거니 생각하며 무심코 걷고 있는데, 내가 다른 골목길을 접어들고, 또 다른 골목길을 접어들어도, 뒤에서 그 구두소리가 떠나가질 않는다. 가는 방향이 같은 거겠거니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십 여분이 이어지니 신경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걸음을 뛰다시피 조금 빨리 옮겨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익숙한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몇 번 방향을 바꿔 걸었더니, 또각또각 여자의 구두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었겠지. 괜한 신경을 쓴 거 같아 싱거운 쓴웃음을 한 번 삼키고, 다시 내 마음의 무게에나 집중하면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여자의 빨간 구두가 낮게 깔린 내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뭐지 싶었지만, 왠지 시선을 올려 여자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걷던 걸음을 이어 여자를 지나쳐가려 했다. 막 여자의 옆을 지나가려는데, 구두가 멈춰있는 그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이거 그쪽 명함이죠? 아까 길에 떨어뜨리고 갔어요.


예? 아, 제 명함이 맞네요. 어떻게 떨어졌지...? 이상하네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명함 떨어뜨리면 안 돼요. 잘 갖고 다니세요. 그 명함 오래 쓰셔야 되지 않겠어요?


예?


명함 오래 쓰시라고요. 그래서 돌려드리는 거예요.


예? 저... 그게 무슨?


그럼 전 이만.



여자는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등을 돌려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여자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 뒤로 또각또각 여자의 구두소리만 젖은 땅 위의 빗물 안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여자의 멀어지는 구두소리를 듣고 멍하니 서있다, 순간 손을 들어 여자에게서 건네받은 내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한국물산 영업부 대리 김의지


앞장에 적힌 내 직함과 이름을 보다, 무심결에 손을 돌려 명함의 뒷면을 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명함을 바닥으로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여자가 사라진 골목길 반대편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비명이 마음속에 회오리치며, 심장의 방망이질을 부추겨대고 있었다.




젖은 땅 위에 남겨져, 습기가 빠르게 번져나가는 명함 뒷면에는, 가로등 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명함 뒷면에 적힌 글귀가 한 글자 한 글자 빛을 내고 있었다.



운 좋은 날이네요.

당신 오늘 살았어요.

이전 01화 운 좋은 날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