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럴 줄 알았다. 이 동네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됐을 때, 왠지 이런 일이 생길 거 같아 불안했었다.
2,900원입니다.
김민지, 이젠 인사도 안 하냐? 너무 매정한 거 아냐? 나 안 보고 싶었어?
손님, 계산해 주시겠어요? 뒤에 손님들 기다리시잖아요.
알았어, 알았어. 여기. 잔돈은 됐어. 언제 끝나?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도 괜찮지?
잔돈 100원 가져가세요, 손. 님. 영업장에서 죽치고 계시는 건 영업방해입니다.
이 동네는 저 최대오의 집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 언젠가 마주쳐도 마주칠 일이었다. 그날 마침, 저녁 타임 아르바이트생이 아파서 못 오게 되자, 몇 시간만 더 일을 해달라고 붙잡혔던 날이었다. 그날 저녁 이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오던 최대오는, 나를 발견한 순간 반짝이는 눈빛을 숨기질 못했었다. 간신히 이별을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이곳에서 그렇게 대오를 다시 마주쳐버렸다.
우린 대학 동아리에서 만났다. 최대오 같은 인간이 왜 봉사동아리를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곳에 있었고, 처음부터 끈질기게 내게 구애를 해왔다. 동아리 사람 모두에게 김민지는 자기가 구애중이고, 곧 자신의 여자친구가 될 거라고 선언을 했었다. 처음에는 뭐지 이 미친 인간은 싶었고, 귀찮고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변하지 않고 일관된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는 그에게 조금씩 호감이 생겼었고 익숙해져 갔던 거 같다. 최대오가 하도 떠들어대고 다녀서인지, 이미 동아리 사람들은 우리를 공인된 연인처럼 대하고 있었다. 전공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최대오는 내 수업이 있는 강의실에 꾸준히 모습을 드러냈고, 나와 같은 과 친구들까지 그의 존재에 익숙해져 갈 정도가 된 어느 날, 나는 결판을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 좋아. 우리 딱 한 달만 만나보자. 그러고 나서도, 네가 내 마음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으면, 난 네게 이별을 말할 거야. 그럼, 너도 깨끗이 날 포기해 줘.
한 달? 흐음… 그런데 너무 그렇게 딱 끊어서 벌써 이별을 생각하고 시작하는 건 아니지 않나?
왜? 자신 없어?
아, 아니. 당연히 자신 있지. 알았어. 그 대신 한 달 동안 서로에게 정말 최선을 다하기다, 알았지?
그렇게 우린 한 달짜리 연애를 시작했고, 최대오는 늘 내 옆에 머물렀다. 뭐가 그렇게 늘 여유가 있고 즐거운지, 그의 변하지 않는 여유만만함이 난 늘 불만스러웠다. 그 당시 나는 학비와 생활비를 혼자 충당해야 했고, 늘 뭔가에 쫓기듯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던 때였다. 그런데 최대오는 금전적으로도 늘 여유로워 보였고, 빈둥대며 놀 생각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그런 모습들은 내 자격지심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지만, 나는 이런 속내를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에게 절대 드러낼 수는 없었다.
오늘이 한 달째야. 알고 있지?
하하, 당연하지. 여기 내 다이어리에 매일매일 하트 표시 해둔 거 보이지? 우리 그럼 오늘부로 한 달 연애 그만두고 평범한 연인사이 되는 건가?
아니. 우리 그만 만나자.
어..? 왜?
난 연애를 할 여유가 없어. 조건 없이 포기해 주기로 했던 약속 지켜줘. 우연히 만나도 아는 척하지 말자.
난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6개월여 동안 신기하리만치 최대오의 모습은 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그렇게 그날 저녁 우연히 마주친 이후, 최대오는 편의점에 시시때때로 나타나고 있었다.
하루는 음료수를 두 개 사서 내 앞으로 밀어놓고 가기도 하고, 다른 하루는 계산대 옆에 놓인 초콜릿바를 하나씩 사다가, 결국 내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볼 때까지 계산을 해서, 초콜릿바를 열개까지 계산하고 내 앞으로 모두 밀어 두고 간 적도 있었다. 편의점에서 내가 일하는 동안 그렇게 매일매일 잠시 들르기는 했지만, 편의점 밖에서 나를 기다리거나, 매장 안에서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쩍 눈에 띄게 짧아진 머리를 한 최대오가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하나 꺼내와 계산대에 놓고 서있는 최대오가, 너무나 낯설게도 뭔가를 망설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 군대 간다.
어? 아, 그렇구나.
훗, 역시 네가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어. 그동안 귀찮게 해서 미안했다. 잘 지내.
응? 어… 아니.. 그래… 너도 잘 지내길 바랄게.
계산한 음료수를 내 앞으로 밀어 두고, 그렇게 대오는 편의점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 그렇구나. 이렇게… 되어버렸구나…라는 생각을 하는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편의점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면서도,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이 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오야! 최대오!
골목길 모퉁이를 막 돌아서려던 그가, 내 부름을 들었는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조금 더 앞으로 몇 발작국 다가섰고, 그도 나를 향해 다시 걸어오기 시작했다.
대오야.
어.
잘 다녀와.
후후, 그래. 고맙다.
잘 다녀와서.. 우리 다시 마주치게 되면, 그때 꼭 내게 인사해 줘. 그때 너를 다시 마주치게 되면, 나도 꼭 너를 반갑게 맞아줄게.
어? 그럼.. 우리 다시…
잠깐만… 그 상대가 너여서 연애를 안 하겠다고 한 건 아니었어. 그러니 앞으로도 연애를 하고 있지는 않을 거야. 그거면 될까?
아… 우선은 그냥 이대로?
응, 지금은 그냥 이대로.
멀어지는 대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 순간 울컥하던 그 감정이 무언지 생각해 보고 있었다. 우선은 그냥 이대로. 건강히 다시 마주칠 그의 모습을 남겨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