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오르골 -1-]
A는 길을 걷고 있었다
붓이 먹을 머금고 그려낸 수묵화처럼 A의 걸음걸이마다 굵은 선이 흐른다 그 선은 결국 내 발끝에 닿아 난 한달음에 A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치 처음부터 함께 걷기로 했던 사람들처럼 우린 그렇게 곁에서 길을 걸었다 A의 얼굴은 비어있는 A4용지처럼 창백했지만 뭔가가 곧 적힐 것만 같은 고요한 흥분이 느껴졌다
조용히 길을 걷던 A가 갑자기 걸음을 빨리하더니 눈앞의 검고 좁은 골목길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조금만 흔들며 걸어도 어깨가 양쪽 벽에 닿을 것만 같은 좁은 골목길 어둠이 짙게 깔려 그 안으로 사라진 A가 바로 앞에 서 있는지 이미 어딘가로 골목길을 따라 사라져 버렸는지 알 수 없을 듯한 그 좁은 골목길을 나는 환한 빛을 받으며 홀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골목길로 들어가야 되는지 A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내가 따라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고민 중이었다
좁은 골목길의 어둠을 뚫고 A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씨익 입을 늘인다 그 표정 하나에 서있던 나의 발걸음이 골목길로 향했다 어둠이 사방을 감싸 보이지 않는 내 눈앞에 A는 걷고 있을 거였다 난 차라리 눈을 감고 A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좁은 골목길 양쪽 벽에서 흘러나오는 시간의 냄새를 맡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걷고 있으려니 어둠이 나를 이끌어 흐르듯 내 몸이 움직여졌다 갑자기 A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더니 내 감은 눈에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서서히 뜨자 난 환한 빛 아래 서있었고 내 앞에 펼쳐진 건 푸른 바다였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나를 보고 있는 A의 얼굴에는 이미 뭔가가 쓰여 있었다 그 쓰인 내용을 읽으려 좀 더 가까이 다가서니 A는 바다를 향해있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계단의 반쯤 나도 따라 내려가니 A가 계단 옆 대리석 난간에 몸을 누였다 그러더니 그 몸을 접어 고개를 내리고 몸을 굴렸다 그렇게 한 바퀴 몸을 굴리고 또 한 번 고개를 내려 몸을 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조급한 마음이 들어 후다닥 계단을 뛰어내려 가 난간 끝에서 A를 기다렸다 접힌 몸을 한 번씩 굴려 천천히 난간을 다 내려온 A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바라봤다
A의 눈은 고요했다 먹물이 번지듯 그어진 선을 따라 함께 걷는 동안 볼 수 없던 눈빛이었다 그런 눈빛을 바라보며 내 일렁임도 멈춰갔다 A의 얼굴에 쓰인 내용을 나는 읽을 수 없었다 읽을 수 없어 나는 그저 스며들었다 멀리서 울리는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좁은 골목길 벽을 타고 내려오던 시간의 냄새가 문득 코 끝을 스쳤다 시간의 냄새는 잊히지 않은 존재들을 따라다닌다
한 번 더 경적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소리에 벌떡 일어선 A가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는 내게 손을 내민다 내밀어진 손이 멀리서 들려오는 아득한 소리만큼 멀게 느껴진다 손이 한 번 흔들리더니 내 손위에 포개진다 멀리서 또 한 번 경적이 울린다 그리고 나는 A와 함께 걷는다 경적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A와 나는 점점 더 손을 꽉 쥔다 동행하는 길에 얼굴도 눈도 보이지 않지만 읽을 수 없어 스며든 마음에 시간의 냄새가 뿌려져 간다
경적이 또 한 번 울린다 포개진 손이 우리의 동행을 알린다 흔들리다 잔잔해지고 잔잔해지다 흔들린다 그리고 우리는 걷는다 함께 걷는다 동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