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억 속의 나는 누나만 세명인 집의 여섯살 먹은 막둥이 남동생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자식이 네 명인 집도 드물지만, 딸을 원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최근만큼은 아니더라도 당시에도 아들이 나올 때까지 출산을 계속한 우리 부모는 조금 독특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는 당시 큰 누나랑 둘째 작은 누나가 다니던 초등학교 옆의 병설 유치원에 셋째 누나랑 함께 다니고 있었다. 엄마는 전업주부였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은 이미 첫째 누나 때 그만두었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엄마 역시 일용직이더라도 짬짬이 해오셨다고 들었다. 아무튼 내가 태어나고 일을 그만두신 엄마는 우리 남매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맞추어 사셨다. 등원도, 하원도, 식사도, 화장실도 엄마와 함께 갔었고 유치원에서도 엄마는 누나에게 나를 중간 중간 가서 확인하고 돌보라고 당부하며 일곱 살 내기 여자애한테는 꽤 무거운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이렇게 내 인생은 시작부터 여자들에게 둘러쌓인 삶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또래 남자애들과는 조금 취향이 달랐던 것 같다. 집에서 누나들과 북적이며 지냈던 나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칼싸움을 하고 모형 자동차 같은 것에 관심을 보일 때 그림을 그리거나 재봉을 하는 게 더 재밌었다. 유치원생이 그리는 그림이 뭐 그리 대단할 것이 있을까 싶지만 선생님이 하는 칭찬까지 더해지니 이 시기 나는 매일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살았다. 남자애들과 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자애들과 훨씬 친하게 지내며 놀았고, 즐겁게 다니다가 별 탈 없이 유치원을 졸업했다.
그 후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4학년 때 쯤 깨닫게 되었다. 적어도 남자들 중 다수는 나와 같은 성격과 취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4학년 쯤 되자 키도 꽤 크고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중 몇몇은 숫기 없는 내가 만만했는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한번은 체육시간이 끝나고 현도라는 녀석이 나보다 먼저 교실에 와서 내 사물함을 뒤져 스케치북을 꺼내더니,
"야 박창수, 이거 니 여친이냐?"
"우리 누나야. 누가 맘대로 꺼내래?"
"헤헤, 누나는 무슨 저거 강형선이잖아. 니 짝꿍. 너 맨날 여자애들이랑만 놀지? 여자친구 만드니까 좋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여자친구니, 남자친구니 말도 안 되는 말로 엮는 것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이상하지만, 당시 나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이리 내놔. 남의 것을 왜 함부로 만져?"
"자기 여자친구 지킨다고 아주 난리가 났죠? 얼굴이 빨개져가지고 흥분했죠?"
아주 사람을 놀리는 일에는 도가 튼 녀석이었다. 그 말이 이치에 맞든 아니든 말로는 현도를 이길 자신이 없는 나는 뛰어가 체중을 실어 현도에게 몸을 던졌고, 나와 현도는 마룻바닥 위에 고꾸라졌다. 현도는 넘어진 그대로 내 몸을 조르며 말했다.
"이 새끼, 너 잘 걸렸다. 먼저 때려주면 고맙지. 네가 내 상대가 되겠냐?"
말 그대로였다. 중학교에 가서야 급격히 키가 큰 나는 당시 너무 왜소했고, 현도에게 호기롭게 달려든 첫 번째 공격 이후로는 이리 저리 내동댕이쳐지며 맞았을 뿐이었다. 누가봐도 이미 승패가 확정되었을 정도로 내가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현도는 분이 안 풀렸는지 내 스케치북을 그대로 걸레를 빨기 위해 받아둔 물에 던져버렸다. 싸움을 이기지도, 내 그림을 물에 쳐넣는데도 반항하지 못한 나는 무력감과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고, 그 날부터 현도는 반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애가 되었고 나는 그 대척점에 있는 먹잇감이 되었다.
얼마 후 난장판이 된 교실에 와서 선생님이 현도를 혼내셨지만, 오히려 현도에게 그것은 훈장과도 같았고 현도는 패거리를 형성해 나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그 날 이후 그나마 나와 친하게 지내던 소수의 남자애들도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 역시 남자랍시고 남자애들 사이에서 고립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는지, 나는 비굴하고 굴욕적일지언정 현도의 생일에 쌈짓돈을 모아 선물을 사주거나, 그 패거리가 좋아하는 게임이나 축구를 연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억지로 노력한다고 축구와 게임을 좋아할 수도 없었고, 현도도 내가 축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나랑 친하게 지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결국 초등학생인지라 현도 녀석도 물리적, 금전적인 괴롭힘까지는 할 생각은 못했는지 내가 지나갈 때 여자랑만 노는 애라고 비꼬았을 뿐 그 이상의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참을 이유가 없는 것을 그렇게 꾹 참으며 그렇게 학교의 절반인 남자애들로부터 고립되어 졸업까지 3년을 보냈다.
따돌림 당하는 것을 내가 얼마나 티를 내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은 주말에 TV를 가족들끼리 모여서 보는데, 뉴스에 왕따가 요즘 심각한 사회문제라는 보도가 나왔다. 그것을 보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왕따를 당하는 애들은 보면, 나약해서 그래. 만만해보여서 그런 거지. 너희는 누가 왕따 시키려고 하면 벽돌로 그냥 머리를 확 쳐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마라. 그렇게 물어줘야 하는 병원비는 아빠가 빚을 내서라도 기꺼이 내줄 테니까."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내가 최선을 다해 맞선다고한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접 겪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기껏해야 초, 중, 고등학생인 아이들이 왕따를 당하는 것은 나약해서 사적제재를 통한 자력구제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아버지의 말은 설득력이 전혀 없는 말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사고력을 지니지 못했고, 저 말에 크게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더 무서운 것은 사회에 나온 후에도 우리 아버지와 같은 말은 하는 사람을 적지 않게 보았다는 점이다. 아직도 저 말은 내 머리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라는 꽃을 피워내고 있는 뿌리 깊은 씨앗과도 같다. 모든 아픔은 노력의 부족이고, 극복할 의지의 박약함에 기인한다는 아버지의 뿌리 깊은 사고 방식은 이후에도 나와 아버지의 충돌에 있어 항상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나니 어느새 초등학교 생활은 끝이 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난 중학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