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되면 우리는 교육과정 중 처음으로 교복을 입게 된다. 그리고 교복을 입은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그렇지 않은 초등학생과 달리 천진한 아동이 아닌 '청소년'으로서 내게 인식되어 왔기에 지난 3년간이 쉽지 않았던 나는 새로 만날 친구들에 대해서 큰 기대를 한 상태에서 내 청소년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약간은 먼 곳에 배치 받아 이전 학교에서 같이 온 애들이 별로 없었던 나는 자연스레 처음 보는 아이들과 함께 다니게 되었고 과거와 달리 나쁘지 않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아쉽게도 새로 사귄 친구들도 나와 취향이 대부분 달라서 같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었다. 취향이 다르더라도 꼭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하지만 취향이 다르면 일과 시간 이후에 축구를 하거나, PC방에 가는 등 친구들과 취미 생활 면에서 어울리기가 힘들었기에, 동시에 한계 역시 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중학생이랍시고 나는 조금 성장했는지, 아니면 현도 사건 때 그것을 억지로 따라가다가 죽도 밥도 안 되었던 기억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때의 나는 친구들의 취미를 억지로 따라가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학교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에 충실하고, 나머지 시간은 나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공부를 하는데 집중했던 것 같다. 그림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공부는 그렇게 재미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축구나 게임보다는 적어도 집에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나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공부를 하다보니 성적이 꾸준히 오르게 되었고, 이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의 관심을 끄는 일이 되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저녁에 혼자서 반주를 하시는 중에 나를 부르셨다.
"창수야, 이리 와서 앉아봐라."
"네, 무슨 일이세요?"
"이거 받아라."
아버지는 내게 5만원을 건네셨다. 당시 내 일주일 용돈이 5천원 쯤 되었으니, 5만원이라는 돈은 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금액이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큰 돈을 주셔요?"
"너 요즘 잘하고 있어서 주는 거야. 나는 네가 맨날 그림만 그린다고 네 엄마가 얘기하길래, 쟤가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나 걱정이 많았다. 이 나라에서 밥 벌어먹고 살고 싶으면 그림은 하면 안 되는 것이거든. 그런데 너 저번 기말고사 때 전교에서 4등 했다며, 나도 딱 중학교 때 정신차렸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너도 내 아들이구나 싶더라. 앞으로 그렇게만 해."
나는 그림이 좋지, 공부는 좋아서 하는 건 아닌데 아버지가 잘못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아버지 말마따나 '정신'을 차려서 대단한 성공을 해보고자 한 것도 아니거니와, 앞으로 계속 지금 하는 것처럼 공부를 할지도 스스로 확신이 서지는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림만큼 좋고 그것이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당장에라도 공부를 버리고 그것을 할 텐데... 아버지는 무엇인가 단단히 오해를 하였음이 분명했다.
"일단 감사히 받을게요. 아버지, 그런데 너무 기대는 안 하셨으면 해요. 운이 좋았던 것도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꾸준히 성적이 좋을지는 모르겠거든요."
"그럼 학원이라도 보내주랴? 이번에 보니 너는 한다면 할 수 있는 놈이야. 아빠는 네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지원해줄테니 말만 해라. 한번 궤도에 올랐을 때는 돌아보지 말고 계속 지금처럼 해야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공부를 앞으로도 이 만큼 쭉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뜻이었어요."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지셨다. 그 변화를 보며 나는 용돈을 준 것을 후회하시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철 없는 소리 마라. 이제야 정신 차린 줄 알았더니... 쯧쯧.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하는 소리는 다 헛소리다. 종종 우리 집에 오는 아빠 친구들이나, 아빠나 왜 이 만큼 벌어먹고 사는 줄 알아? 다 우리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를 졸업했으니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런 수준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거든. 너 이제 어리지 않아. 앞으로 5년이면 인생의 수준이 대략적으로 다 나오게 되어 있어."
장황한 아버지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그 확신에 불타는 눈을 보고 그 때의 내겐 도저히 반박할 논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 대답이 없으니 아버지의 연설이 끝나고 몇 분간의 침묵이 흘렀다.
"멀리 갈 것 없이 네 누나들을 봐라. 서연이가 애가 참 착하고 좋다만, 걔는 이제 시집 잘 가는 것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겠지. 서윤이는 애가 버릇이 없어서 문제이긴 하지만, 그렇게 굴 수 있는 것도 자기가 공부를 잘하니 나중에 벌어먹고 살 자신이 있어서 저러는 거야. 서희도 요즘 성적이 많이 올랐다고 하고, 가정에서도 공부에 따라 이렇게 대접이 달라지는데 사회에 나가면 얼마나 더 심해지겠어? 아빠가 너한테 안 좋은 소리 한 적이 없으니 모쪼록 알아들었길 바란다."
아버지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셨다. 아버지가 일어나자마자 엄마는 아버지가 드신 술과 안주를 치우면서 내게 말을 건네셨다.
"아빠 말 새겨들어. 너 그림 좋아하는 거야 엄마가 잘 알지. 그런데 그림은 취미로 그리면 돼. 네가 공부에 전혀 흥미가 없으면 엄마나 아빠나 이런 말도 안 하겠지만, 이렇게 하는 걸 보니 쭉 하면 더 할 나위 없을 것 같아. 일단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그 쪽 진로도 쭉 가지 않더라도 선택지가 많아진단다. 잘 생각해보렴."
"일단 알겠어요, 엄마. 그런데 저는 갑자기 이렇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듯이 기대해버리면 너무 부담스럽다는 말을 아버지랑 엄마한테 하고 싶었던 거예요."
방에 들어와 침대에 엎어지듯이 누웠다. 사실 당장 대체할 것이 없으면 어차피 남는 시간에는 공부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대를 가장한 저 강요를 듣는 순간 공부를 하기가 싫어지는 내가 이상한 것일까? 내가 너무 모난 놈인가? 여러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쳐갔다. 앞으로 저 부풀은 기대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 날은 그렇게 잠들었다.
안타깝게도 그 후로도 나는 친구들과 공유할 만한 취미를 찾지는 못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공부를 꾸준히 했고, 성적은 기존에 받았던 수준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3년간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고 나니 엄마가 내게 과학고를 준비해보라고 권하셨다. 어느 고등학교에 가야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 제의를 받아 들였고, 내 의도이든 아니든 눈에 보이는 목표가 생겼으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지만 과학고 입시에는 실패하게 되었다.
입시에 실패한 날 저녁, 나는 아버지가 들어오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아버지는 처음 내게 5만원을 주신 날 이후로 항상 내 성적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직접적으로 나랑 교류하는 일은 일이 바쁘셔서 거의 없으셨지만, 이리 저리 성적이나 학교 생활과 관련해서 엄마를 움직이는 것은 아버지가 분명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실세인 아버지가 과학고 입시에 실패한 나에 대해서 실망했을 것은 자명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수형장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나는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렸다. 이윽고 삐익삐익 거리는 도어락 소리가 들렸고, 당시 내게 남은 것은 아버지가 식탁으로 나를 부르는 순간까지 마음을 다잡는 것뿐이었다.
"이리 나와봐라, 창수야."
나와서 앉자마자 나는 인사도 생략하고 고해성사를 하듯이 내가 먼저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해요.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어요. 아니... 어쩌면 제가 노력을 다 하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상대적인 것이니 다른 애들이 더 노력을 했겠죠?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으니 마음 푸셔요."
아버지는 내 고해성사를 듣더니 껄껄 웃으시며 말하셨다.
"나는 네가 떨어진 게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네?"
"과학고 그런 게 나는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아. 공부라는 것은 남을 이기는 재미로 하는 것이다. 과학고나 외고 같은 곳에 들어가면 잘하는 놈들만 모여있지. 거기서는 자주 이겨서 승리 경험을 만들기가 매우 어렵단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쟁에서 남을 짓밟고 올라섰을 때 도취되는 부분이 있는 것이란다. 특목고는 그 본능에 반하는 일이라서 성공을 위해서는 별로 좋은 제도가 아니야. 뭐 네가 거기 가서 잘할 수도 있지만, 거기서 깔아주는 놈이 된다면 그것만한 최악이 없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크게 혼날까봐 두려웠는데 오히려 잘 되었다고 하는 것도 혼란스러웠지만, 그 다음에 아버지가 말씀하신 내용이 더 충격적이었다. 남을 짓 밟는 것이 공부의 참된 재미라고 하는 것이, 학문이나 연구를 위해서 스스로를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기는 입시식 가짜 공부를 하는 것이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뿌리 깊은 사고가 놀라웠다. 현실적으로 경쟁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지식의 성숙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그 당시 나조차도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런 약육강식의 논리를 신봉하고 입 밖으로 내뱉으며 스스로 확신하는 사람은 처음보았기 때문이다.
"아빠 얘기를 해주마. 아빠가 중학생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고 나서도 죽어도 못 이길 것 같은 여자애가 한 명이 있었어. 그리고 걔랑 같이 고등학교까지 갔지. 그런데 고등학교에서 나는 성적이 계속 오르는데 걔는 오히려 떨어지기만 하더군. 결국 고등학교부터 하는 공부는 체력전이거든. 걔는 결국 여자애라 나보다 체력이 좋지 못했고 그대로 성적이 떨어져서 나보다 훨씬 못한 대학에 갔지. 걔까지 이기니 나는 그 때만큼 공부가 재밌을 수가 없더라. 그 때 깨달았다. 사회에 나와서 성공하는 사람 대부분이 남자인 것은 결국 이런 이유구나. 여자는 결국 남자랑 붙어서 이길 수가 없구나. 그래서 너를 낳은 거다."
"하지만 공부 잘하는 여자애들도 많아요. 그리고 사회에서도 성공하신 여성분들도 충분히 많잖아요, 아버지."
"그 사람들이 남자였으면 그것보다 더 고점이 높았을 거다. 동일한 능력이면 남자인 것이 더 멀리 갈 수 있어. 생물학적인 한계는 어쩔 수 가 없는 거야. 직업에 귀천이 없다니, 인간이 평등하다니, 이런 것은 다 경쟁에서 진 패배자들 불만을 욱여넣으려는 개수작이지. 너는 경쟁에서 지면 천한 직업을 갖게 되고, 남들한테 차별 당하는 인생을 산다. 아빠는 그 날 그 여자애를 이긴 후에도 대부분의 경쟁에서 이겼다. 지더라도 다음 경쟁에서는 이기려 노력헀고, 실제로 이겼다.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든 거야. 네가 지적한 내용, 그러니까 여자가 절대적으로 잘났는지 못났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성별조차도 경쟁에서 이기는데 물리적으로 유리한 성별이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거야. 하다못해 작게는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센 것이라도 도움이 된다. 나처럼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라, 아들아."
아버지가 나랑 다른 사람인 것은 알았지만, 이 날 나는 아버지와 내가 근본적으로 엮일 수조차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회사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한 나는 알고 있다. 우리 아버지도 그렇지만, 내가 만났던 회사의 대표이사부터 임원들, 그리고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대기업이랍시고 자부심을 가지는 선후배들까지 자신이 인생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성공 공식'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성공 공식에 도취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성공 공식에서 벗어난 다른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한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경쟁이 있고, 하나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우월한 것이 아닌 것이 객관적 진리에 가깝지만 그들은 자신이 겪어온 경쟁이 모든 경쟁 중 가장 치열하고 압도적인 최상위의 유일한 경쟁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아무튼 당시의 내가 생각한 것은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는 아버지는 대체 그럼 우리 집안의 구성원 중 여자들인 누나들과 엄마에 대해서는 대체 어떻게 생각한다는 것인지였고, 둘째는 만약 내가 경쟁에서 도태된다면 패배자가 된 아들이라도 자식이라는 이유 자체만으로는 사랑해줄 생각이 없는지였다.
"아버지는 만약 제가 고등학교에 가서 말씀하신 그 여자분처럼 성적이 떨어지면 실망하실 건가요?"
"실망할 거다. 그런데 네가 성적이 떨어질 일은 없다. 내 아들이니까. 다만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말 거라. 싸우기도 전 부터 질 생각부터 하는 놈은 어디가서 사내 구실을 못해."
계속 공부나 성적 이야기를 하는데 아버지가 사용하는 단어만 보면 무슨 전쟁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실망하시더라도, 저는 계속 아버지의 아들이겠죠?"
아버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냐 그게?"
"제가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저를 계속 아들로서 사랑해주시겠냐는 말이에요."
"그런 것을 왜 물어봐? 그리고 사랑이나 이런 얘기는 불필요하단다. 나는 네가 충분히 그 동안 느꼈을 것이라 믿기에 그 얘기는 더 하고 싶지 않구나. 중요한 것은 넌 날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아버지 제가 듣고 싶은 말은..."
"듣고 싶은 말이라면 오히려 못해주지. 그건 네가 결과로 보여주면 해주마. 쉽게 원하는 것을 얻어서는 경쟁에서 필요한 인내력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 이 아빠가 확실히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넌 이길 것이고, 아버지는 너를 언제까지나 지원해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내 물음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 분명해보였고, 대답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서윤이도 지금은 저렇게 뻘짓을 하며 쏘다니고 있다만, 머리가 좋은 애이니 결국 이해를 하고 돌아올 거다. 아빠는 서윤이나 너처럼 그 동안 증명한 게 있는 사람한테는 항상 기회를 준단다. 회사에서 내 부하직원들도 모두 그건 인정할 거야. 얘기가 길어졌는데 좌우지간 이번 특목고 탈락에 대해서는 아빠는 문제 삼지 않으마. 다만 이것을 앞으로 네가 할 고등학교 생활에 있어 동력으로 삼아 더 열심히 하면 좋겠구나."
언제나 그렇듯이 아버지의 일방적인 일장 연설이 끝나고 아버지는 바로 일어나서 본인의 방으로 가셨다. 5만원 사건 때처럼 엄마가 곧바로 오셔서 식탁을 치우며 말을 건네셨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내용들은 대부분 너희 아빠가 옳으니 잘 들으라는 내용뿐이었겠지. 나는 그날 방으로 들어와 미친듯이 그림을 그렸다. 만화 캐릭터, 영화배우, 학교 친구들, 그리고 누나들을 그렸다. 둘째 누나를 그릴 때는 눈물이 났다. 누나가 그래서 아버지랑 다투었구나. 저렇게 일방적으로 쏘아붙이고 들어가는 아버지식 화법에 누나는 지쳤던 것이었구나. 그럼에도 나는 누나처럼 아버지께 본격적으로 대들 자신은 없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나의 둘째 누나, 서윤이 누나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