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했듯이 내겐 세 명의 누나가 있다. 첫째 누나의 이름은 서연, 둘째 누나의 이름은 서윤, 셋째 누나의 이름은 서희이다. 각각 나보다 여섯 살, 네 살, 한 살이 많다. 아버지가 뻘짓을 하며 돌아다닌다고 한 서윤이 누나는 둘째이다.
누나는 동네에서 이름 난 수재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아버지가 의기양양하게 말한 자신의 공부 경쟁 상대였던 그 여성분이 점점 성적이 추락했던 것과는 다르게 누나는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압도적인 1등을 유지했다. 누나는 스스로 공부 실력에도 자부심이 강한 편이었다. 아니, 누나는 사실 공부뿐만 아니라 예체능을 포함해 학업과 학업 외적인 부분을 망라하여 대부분에서 뛰어났다. 그래서 나는 모르는 게 있으면 누나한테 가서 물어봤고, 내가 한 질문 중에 누나가 답을 하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똑똑한 우리 누나가 좋았다.
우리 남매는 셋째 누나를 제외하면 같은 중학교를 나온 동문인데,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선생님들은 나를 '서윤이 동생'이라고 불렀다. 첫째 누나인 서연이 누나도 분명히 이 학교를 나왔는데, 선생님들에게 내가 철저하게 서윤이 동생으로 불린 것을 보면 선생님들의 뇌리에도 서윤이 누나는 강하게 남았던 것 같았고, 나는 그런 누나가 종종 자랑스럽기도 했다. 나는 공부를 좋아서 한 적도 없고, 좋아할 생각도 없지만 누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고 실제로 정말 압도적으로 뛰어났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뛰어난 우리 누나는 아버지의 자랑일 것임이 분명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적은 우리 집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 누나는 아버지가 저번 사건 때 내게 드러냈던 성공주의적, 가부장적 사고 방식을 매우 싫어했다. 당연히 나도 싫어했고, 다른 누나들이나 심지어는 엄마조차 그런 부분을 적어도 좋아하지는 않았겠지만, 누나는 남달랐다. 누나가 본격적으로 아버지와 다투기 시작한 것은 중학생 때부터였다. 어느 날 엄마와 선생님이 학부모 상담 겸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거실에서 그 얘기를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서윤이 너도 나중에 교사나 하는 거 어떠냐?"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아빠가 살아보니 여자 직업으로는 교사만한 게 없다. 나중에 시집갈 때도 좋은 평가를 받고."
"그럼 다른 직업은 다 해도 교사는 절대 안 해야겠네요. 아빠가 그런 소리 다시는 못하게 하려면요."
아마 이게 우리집에서 아버지의 말에 정면으로 처음 반박이 가해진 날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곧바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셨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사회생활도 안 해본 게 뭘 안다고 아빠 말에 그런 식으로 토를 달아?"
"일단 '여자 직업'이라는 말 자체가 틀려 먹었어요. 예전부터 아빠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함구했는데, 이 나이 쯤 크고 다른 친구들 말을 들어보거나 방송에 나오는 것만 봐도 아빠는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란 것이 확실하다는 게 느껴지네요."
나는 우리 집의 싸움 소리가 엄마와 선생님의 통화까지 들어갈까봐 얼른 가서 안방 문을 닫았다.
"내가 뒤떨어졌다고? 하여간 여자애들은 이래서 문제야. 현실 감각이 없어. 그래, 네가 말한 방송만 봐도 여자 아나운서가 훨씬 많은데 메인 앵커나 MC는 대부분 남자가 하지 않느냐. 그리고 아빠 회사에 여자 임원은 딱 한 명 있다. 그것도 임원 중의 말단인 상무로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만 사회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 적어도 너 취업하고 할 나이까지는 그렇게 될 일은 없어."
"바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바꾸려고 노력을 해야죠. 아빠 같은 사람들이 제일 문제예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죠. 아빠 시대 때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은 고등교육도 남자 형제들한테 밀려서 못 받고, 대학을 나와도 결혼을 해서 출산을 하면 회사에서 밀려났겠죠. 그러니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 여성들이나 교사처럼 나라에서 확실한 일자리 보장을 해주는 곳이 아니면 교육 수준이 어떻건 집안 여건이 어떻건 전업주부가 된 거죠. 오히려 아빠가 말한 그 여자 상무님은 더 대단한 거 같은데요?"
아버지는 평정심을 잃고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거실에 있던 나뿐만 아니라 첫째 누나랑 셋째누나까지 거실로 나와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네 엄마가 아빠 때문에 일 그만둔 것 같으냐? 네 엄마는 네 언니 낳자마자 자발적으로 일을 그만 둔거야. 자기가 애를 키우는데 집중하겠다고. 그리고 애초에 내가 네 엄마보다 돈을 배는 버는데 그만두랴? 그리고 여자들이 그렇게 잘 났으면 왜 공장에서는 남자들이 대부분이며, 의사들 중 외과쪽에 근무하는 여자는 거의 없는 거냐? 여자는 천성적으로 지들 몸이 힘든 일은 못 버티는 동물이다. 남자들이 골병들어가며 일할 때 애만 조금 봐줘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지. 내 생각엔 남자들도 애보며 쉬고 싶은 놈들이 많은데 참 부러울 것 같아."
아버지의 말이 당시 초등학생인 내가 듣기에도 유치해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누나는 그 나이에도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자기가 할 말을 냉정하게 쏟아냈다는 점이다.
"마찬가지죠, 아빠. 생물학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육체 노동에 취약하다고한들, 그것은 여자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니 그걸로 여자들을 탓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리고 만약 그런 분야에 여자들을 투입하고 싶으면 남성 위주의 환경을 바꾸고 여자도 일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야죠. 심지어는 성희롱 사건도 셀 수 없이 뉴스에 나오던데요. 출산을 여성이 하는 것도 선택도 아닌데 직장에서 불이익을 주는 것부터 바꾸고 여자가 일을 가리네 마네 이야기를 하셔야죠. 스스로의 의지를 그렇게 중요시 하시는 분이 아버지 아니셨나요?"
"커피를 타오라고 해도 성희롱이고, 직장에서 친한 사람들끼리 농담 좀 했다고 뒤에서 비열하게 성희롱이라고 신고하고, 그러니까 여자들이 직장에서 주류 문화에 끼질 못하는 거야. 네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지 모르겠다만, 나는 아무리 똑똑해도 너 같은 애는 안 뽑으련다."
급기야 아버지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을 누나에게 해버렸다. 그리고 저 말을 하고 바로 서재로 들어가셨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나는 누나를 달래주려고 누나에게 다가갔는데, 누나는 오히려 벌떡 일어서더니 그대로 안방에 따라 들어갔다.
"아빠, 내 말 안 끝났어요."
"뭘 더 얘기할 것이 있다고 따라 들어와?"
이어서 엄마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휴, 이제 전화 끊었네. 대체 무슨 일이니, 서윤아? 아버지한테 대들면 쓰니?"
엄마는 문을 닫았고, 그 후의 대화는 들을 수 없었다. 한 시간 가량은 더 안방에서 아버지와 싸우고서야 누나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당시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렇게 한다고 아버지가 본인의 생각을 바꿀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누나는 왜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얼마 후 이해할 수 있었다. 누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끝까지 관철시켜야 하는 사람. 그 대상이 아버지든 그 누구든 누나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타협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둘 중 한 명이 바뀌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에서 둘 다 바뀌지 않는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저 날 이후로도 둘은 꾸준히 다툼이 있었고, 나중에 가서는 아버지가 오히려 서윤이 누나를 피한다는 생각까지 드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둘의 충돌은 영원히 피할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최종적인 싸움은 누나가 대학교에 지원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수능이 끝나고 원서를 쓰는 날, 식사 시간에 누나는 컴퓨터공학과에 가겠다고 말했다. 보통 이과에서 최상위권의 학생은 의대나 치대에 가는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부모님은 내심 당연히 서윤이 누나가 그곳에 갈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아빠가 말했다.
"서윤이 너 성적이 아깝게 의대를 안 가고 공대를 간다고?"
"아까울 게 뭐가 있어요. 가고 싶은 곳 가려고 딴 점수인데 내 마음이죠."
"넌 왜 그렇게 이기적이냐? 아빠랑 엄마가 너한테 투자한 게 얼마인데, 그 성적은 너 혼자서 딴 게 아니야. 못갈 성적도 아니고 차고 넘치는 성적으로 의대를 안 간다는 게 말이 돼?"
"투자라고요? 자식이 부동산도 아니고 투자를 할 대상이던가요, 어디? 아빠는 항상 그런 식이죠. 경쟁, 투자, 귀천을 따시지죠. 저는 다 떠나서 사람 내장을 볼 비위가 없고요. 내장을 안 보는 과든 뭐든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컴퓨터공학이니까 아빠는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아주세요."
"그러면 난 네 등록금이든 용돈이든 줄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다니든지 해. 너한테 투자한 돈이 얼마인데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에 대한 존중이 없는 거지."
"이제 돈으로 협박을 하시는구나. 자식을 낳아놓고 돈으로 협박하는 게 부모다운 행동인가요? 이건 명백히 학대라고요. 학대. 그리고 투자를 하면 얼마나 하셨어요? 제가 언니나 서희, 창수보다 뭘 얼마나 더 받았나요? 학원을 갔나요? 뭐 어디 등록금 비싼 국제고나 특목고를 갔나요? 제가 원해서 이 집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낳으셨으면 당연히 해줄 만한 수준의 것들 아닌가요?"
엄마가 끼어들었다.
"너 미쳤어? 서윤아! 너 아빠랑 엄마가 너랑 동생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그러니? 저기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으면 너 밥도 굶고 살았어.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지. 빨리 잘못했다고 빌어. 아직 안 늦었으니까!"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어. 내가 낳아달라고 한 적 있어?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자신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자식을 낳았으니까 그것에 대해서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엄마. 낳아줘서 고맙고 길러주어서 고맙고 하는 얘기를 나한테 기대했다면 그건 엄마의 오산이야."
누나는 작정한 것 같았다. 오늘 엄마와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을 각오를 하고 애초에 싸움을 건 사람처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아프리카 얘기는 하지도 마. 그런 식으로 남의 나라 경제 수준을 얕잡아 보고 열등한 나라 취급하면서 동정하는 것은 인종차별이라고. 부모라는 사람들이 수준이 높고 존경할 만한 구석이 있어야 나도 공경을 하지. 나는 처음에 아빠만 수준이 낮은 줄 알았더니, 엄마도 부창부수야. 어떤 측면에서는 엄마가 아빠보다 더 나쁜 사람인 거 알아? 엄마는 자기도 여자면서 아빠가 맨날 대놓고 하는 차별적인 얘기 거들잖아. 딸이 세 명인 집에서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심지어는 저번에 안방에 보니까 단란주점 라이터도 아빠 책상에 올려져 있더만!"
"이게 어디서 할 말 못 할 말 구분을 못하고, 그리고 어디서 부모한테 반말이야!"
아버지가 누나의 따귀를 때렸다. 방 전체에 아버지가 때린 따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말을 들은 것은 엄마인데, 따귀를 때린 것은 아버지였다.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나는 무서워졌다. 엄마가 놀라서 말헀다.
"서윤아, 아빠가 너 잘 되라고 그런 거니까 나쁘게 생각하지는..."
누나가 말을 끊으며 쏘아붙였다. 누나의 눈빛은 집안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공포를 느끼기는 커녕 여전히 적대적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누가 잘 되라고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때려? 맞아보니까 알겠어. 나는 엄마처럼 살기 싫어서 지금까지 노력한 거야. 엄마는 아빠가 엄마를 반려자로서 동등한 사람 취급한다고 생각해? 엄마는 아빠가 청소하라면 청소하고, 이사를 가자고 하면 이사를 가. 우리 교육도 그렇지. 학원을 보내도 아빠가 보내라면 보내고 아니면 말아 버리지. 심지어 아빠가 노동당을 지지하니까 엄마도 따라서 지지해. 내가 어이가 차서 엄마한테 정당까지 따라서 지지하냐 물으니까 원래 부부는 그런 거라며? 엄마라는 사람은 대체 뭐야? 정체성이라는 게 있긴 해?"
우리 아버지는 매우 정치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젊을 적 운동권에서 활동했다는 자부심이 강해 자식들에게도 항상 자신의 정치적인 식견을 자주 설파하고는 했다. 우리 집에서는 그래서 아버지가 말하는 정치적 입장이 곧 법이자 진리였다. 상대 보수정당은 물론 심지어 노동당 외의 진보정당도 모두 금지어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노동당은 우리 집에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이다. 그렇기에 정치 얘기를 꺼낸 것은 아버지의 역린을 더욱 건드리는 행위일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이제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질 것임을 직감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노동당이 당연히 옳은 말을 하는 정당이니까 그렇고, 네 엄마가 무작정 따라했겠어? 맞는 말을 하니까 아빠 말에 납득을 해서 지지를 했겠지."
"세상에 옳은 말만 하는 정당은 없어요. 애초에 불가능하고요. 엄마는 내가 물었을 때 논리적으로 노동당을 지지하는 이유를 하나도 대지 못하더군요. 나는 아빠 엄마가 노동당을 지지하든 보수당을 지지하든 녹색당을 지지하든 심지어 외계인이 만든 정당을 지지하든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자기가 왜 그 정당을 지지하는지도 설명을 못하는 사람이 자기 의지로 그 정당을 지지했을까요? 그리고 단순히 자기 남편이 지지해서 따라 지지하는 것이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죠. 정당 하나만 그래도 문제인데, 제게 엄마는 아빠의 식민지 같은 사람으로 보여요. 저는 엄마처럼 아빠의 가축으로 살 생각이 없어요."
누나가 의자를 뒤로 뺀 후, 천천히 무릎을 펴서 일어났다.
"저도 아빠 돈 받을 생각 없어요. 솔직히 오늘 공대 간다고 말할 때부터 아빠가 그런 식으로 협박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빠가 지금 절 통제하려면 돈으로 하는 것 밖에 더 있겠어요? 한 달 안으로 집 나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아빠랑 대화하는 것은 이게 마지막이겠지만, 작별한답시고 그 동안 키워줘서 고맙다는 말도 기대하지마세요. 아까 뺨 때리신 걸로 그나마 있던 고마움은 다 청산이 된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엄마, 밥 잘 먹었어."
누나는 그대로 방에 들어갔고, 아버지는 혀를 차며 술을 내오셔서 연신 홀짝이셨다. 그 분위기를 못 이기겠던 나랑 서희 누나는 말리고 오겠다는 것을 핑계로 서윤이 누나 방으로 들어갔고, 서연이 누나와 부모님만 거실에 남아 마저 얘기를 나누었다. 이 때가 내가 중학교 2학년 말이었다.
"누나 진짜 집 나갈거야? 나는 누나가 좋아. 누나랑 계속 보고 싶은데..."
"당연히 우리 귀여운 창수를 안 볼 수는 없지. 창수야, 네가 보기엔 누나가 말한 게 잘못된 거 같아?"
"아니, 나는 아버지가 누나를 말로 못 이긴다는 생각까지 들었어. 누나 말이 다 맞아. 나도 이제 조금 크니까 예전부터 누나가 아버지랑 싸울 때 하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그런데 아까 맞은 곳은 안 아파? 내가 후시딘이라도 갖다 줄까?"
"으이구, 착하기도 하지. 피가 난 것도 아닌데 무슨 후시딘이야. 남자들이 다 우리 창수처럼 철들기만 했어도 내가 결혼 안 한다는 얘기도 엄마한테 안 하고 살았을 텐데."
서희 누나가 말했다.
"엄마는 언니가 그럴 때마다 나이 먹으면 다 바뀔 거라고 하던데."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겠지. 나는 엄마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나중에 내가 진짜 그렇게 살면 엄마도 다시는 그런 말 못할 거야."
"그래도 언니, 나가는 건 다시 생각해봐. 당장 돈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엄마는 아빠가 용돈 주지 말라면 진짜 눈치 보다가 못 줄 사람이야..."
"괜찮아. 내가 그 동안 용돈에서 조금씩 아껴서 저축해둔 게 있어. 중학생 때 처음 아빠랑 싸울 때부터 내 목표는 이 집에서 최대한 빨리 독립하는 거였어.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성인이 되어야 했고, 그래도 몇 백만원 정도 모아둔 게 있어서 이 돈으로 집만 구하면 생활비는 대학교 가서 아르바이트든 과외든 하면서 벌면 아빠 도움 없이도 졸업할 수 있어. 아빠를 안 봐도 직계가족인 아빠 소득 때문에 국가장학금은 못받겠지만 말이야."
"등록금은 어떻게 할 거야? 언니처럼 그냥 갓 스무 살이 된 학생한테도 대출이 나와?"
"아니, 등록금은 어차피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내 성적에 비해서 많이 낮춰서 지원하는 셈이니까. 이미 입시 요강 보고 조건이 어떤지 봤는데 되겠더라."
알고 보니 누나의 가출 계획은 이미 몇 년 동안 계획한 숙원사업이었다. 나랑 서희 누나는 서윤이 누나의 구체적인 계획을 들으니 일단 한시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그 학과는 진짜 누나가 좋아서 가는 곳 맞지? 아버지 때문에 등록금이랑 자취 비용 때문에 포기하는 거 아니지?"
"당연하지. 아빠 때문에 내 꿈을 포기할 수 없지. 나 의외로 속물이야. 만약 성적이 그 만큼 안 나왔으면 아빠한테 4년 동안은 또 입 꾿 닫고 받아먹었을 거야. 어차피 의대갈 성적 안 됐으면 아빠도 강요 안 했겠지. 그런데 내가 워낙 잘해서 그럴 일은 없었을 걸? 헤헤."
"알겠어. 그래도 누나가 나가서 너무 힘들면 다시 들어와도 돼. 내가 아버지 없는 시간 알려 줄테니까 밥이라도 먹고 가."
"맞아. 창수가 연락 안 받으면 나한테 해도 돼. 언니, 우리는 언니 편이야. 언니 보니까 나도 열심히 해서 얼른 독립하고 싶어졌어."
서윤이 누나는 흐뭇하게 우리 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돌연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휴, 언니는 아직도 저 망할 식탁에 앉아서 아빠랑 엄마가 하는 헛소리나 들어주고 있네."
"그래도 서연이 누나도 아버지가 잘했다고 생각은 안 할 거야. 그냥 누나랑은 성격이 좀 다른 것 뿐이야. 요즘 느끼기에는 나도 사실 서연이 누나랑 성격이 비슷한 거 같아."
"나도 알아. 나가기 전에 다음 주 쯤 명품한우촌 가서 고기 사먹자. 내가 언니한테도 말할게. 너희 둘도 엄마한테는 말하지 말고 조용히 따라와."
"알겠어. 그런데 누나 한우 사줄 돈도 아껴야 되는 거 아니야?"
"다 계산하고 사주는 거야. 뭐, 그리고 언니한테도 좀 내달라고 하지."
우리는 거실까지 들릴까봐 숨죽여 웃으며 계속 농담을 주고 받았다. 나는 이 때까지도 내심 누나가 언젠가는 다시 집에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도 닮지 않은 서윤이 누나와 아버지는 놀랍도록 닮은 유일한 구석이 있다. 바로 승부욕이다. 우리 아버지든 누나든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누나가 집에 다시 오는 것은 누나가 아버지한테 한 호기로운 선언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누나가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매우 선명하게 예측이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약속한 명품한우촌에서의 외식이 끝나고, 누나는 약속대로 집을 나갔다. 엄마는 나가는 날까지도 누나를 말렸지만, 아버지는 누나가 나갈 때조차 서재에 틀어박혀 누나와 아는 척도 하지 않으셨다. 그 후 누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 과외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대학교를 부모님의 지원 없이 졸업했다. 집을 나간 후에도 엄마는 종종 누나한테 찾아가 아버지랑 화해를 시키려고 했던 것 같지만, 결국 실패했다. 나중에 누나가 해준 말이지만, 엄마는 그렇게 누나한테 화해를 종용할 때도 네가 그래도 자식이니 아버지한테 '사과'하라며 사실상의 굴종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말이 누나한테는 너무나 거슬렸고, 그러한 시도가 반복되자 누나는 결국 엄마와의 연락마저 끊었다. 누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던 IT분야 대기업에 곧바로 취업을 했는데, 그 쯤에는 누나는 우리 남매를 제외하면 친척을 포함해 모든 가족들과 연락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경제적인 완전한 독립을 이룬 누나는 행복해했다. 나 역시 대학교에 들어간 후 누나를 판교에서 만나 밥을 얻어 먹었을 때 누나는 이런 말을 했다.
"창수야, 나는 요즘 너무 행복해. 회사에서 번 돈으로 내가 원하는대로 살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어. 그리고 더 이상 인간관계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 없이 언니, 서희, 그리고 너 같은 진짜 가족들이랑 좋은 시간만 보낼 수 있으니 머리 아플 일이 없네. 맛있는 거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누나한테 전화해."
"누나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야. 서윤이 누나니까 어디 가서든 잘 해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잘 된 것을 보면 누나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것 같아. 그런데 인간관계 스트레스야 아버지, 그리고 엄마랑 연락을 안 하니 크게 줄어들긴 했을 것 같지만, 회사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안 줘?"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 그런데 이건 내가 돈을 받고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니까 괜찮아. 그런데 우리 집 구석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는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닌데 겪게 되는 것이었잖아. 그게 다른 거야."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나도 얼른 졸업하고 취업해서 독립해야겠다."
"꼭 그렇게 해. 그런데 억지로 그렇다고 아무 데나 들어가면 안 된다?"
"그건 당연하지. 나 하기 싫은 것은 오래 못 하는 거 알잖아."
"그래. 그리고 언니처럼 이상한 쪽으로 빠지지도 말고."
"...알겠어. 누나는 여전히 연애를 하거나 결혼할 생각은 없는 거구나, 그럼?"
"당연하지. 난 여전히 남자를 못 믿겠어. 그리고 언니 보니까 알겠더라. 결국 인간은 경제력이 있어야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살 수 있어. 사람은 인생에서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주도권을 항상 가지고 살아야 해."
대학교 때 누나와 했던 이 대담을 내가 과학고에 떨어지고 아버지와 충돌했을 때 미리 들여다 볼 수 있었다면, 나는 아버지의 기대에 더 이상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서윤이 누나처럼 철저하게 이용할뿐 내가 원하는 쪽으로 몰래 일을 진행시키는 꾀를 발휘했을지도 모르지. 특목고에 떨어지고 그림을 그리며 잡다한 생각을 떨치던 그 때도 이미 누나는 내가 가야할 길을 잘 제시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정답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탓이다. 당시 나는 서윤이 누나가 왜 아버지랑 그 동안 싸워 왔는지를 떠올렸지만, 싸우고 나서 서윤이 누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했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 역시 아버지와 의견 다툼이 생긴 후에는 당연히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스스로 생각해 정해야만 했지만, 나는 그 때 여전히 그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다.
이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후로도 나는 항상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기만 했다. 그래서 오늘도 지혜를 과감히 선택하고 부모와 맞서지 못한 것이다. 누나와는 달리 이 때나 지금이나 나는 내 인생의 주도권을 쥐고 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