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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Oct 27. 2024

선택할 용기

 영국에서 돌아온 후 밀린 업무를 미친듯이 쳐냈다. 대무자가 있었지만 본인 일이 아니니 대충 눙쳐서 마무리한 것이 많아 사실상 처음부터 전부 다시 손봐야 했다. 태블릿을 너무 만졌더니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닷새는 모니터에 코를 박고 그림만 그렸다. 나는 남의 일이면 오히려 대충 못하겠던데, 이 사람들은 왜 이럴까.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일까? 일을 하며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또 습관적으로 원인을 나에게 돌렸다.


 그 다음 토요일이 찾아왔다. 쉬는 것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가족들 아니면 거의 울릴 일이 없는 내 휴대폰에 알림이 왔다. 이상했다. 연락 올 일이 없을 터였다. 회사 일은 아닐 것이었다. 나는 퇴근하면 회사 사람들은 따로 그룹으로 지정해 알림을 꺼버리기 때문이다. 눈을 비비며 잠시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보았다. 화면을 보니 끊어지기 직전의 상태로 느슨히 연결되어 있던 내 대학교 인맥인 김수진한테 메신저로 연락이 거의 5년만에 와 있었다. 아마 반도체 회사 연구소에 다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대체 얘가 무슨 일로 연락했나 싶어 메신저를 켜서 미리보기를 봤다.


 '소개팅 할래?'


 기가 찼다. 그래도 대학생 때 같이 곧잘 어울려 다닌 편이라 내가 억지로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는 것 정도는 알 텐데 몇 년만에 갑자기 연락해서 소개팅이라니, 일단은 답장하지 않고 휴대폰을 덮어두고 다시 잤다. 그런데 한 네 시간 쯤 더 자니까 아예 전화가 왔다.


"아, 여보세요."

"오, 그래도 전화는 받네. 내 번호 안 지웠지? 나 김수진!"

"어어, 알지. 무슨 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메신저 보냈는데 안 봤어?"

봤는데 답장 안 한 걸 말 할수는 없으니 못 본척 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응. 어제 야근을 해서 피곤해서 아직까지 잤네. 지금 볼게."

"안 봐도 돼. 말로 해줄게. 너 소개팅 할래?"

"소개팅은 무슨, 나 말 주변 없어. 그런 거 잘 못해."

"해본 적도 없잖아. 네 나이에 소개팅 안 해본 사람은 서울에서 너 밖에 없을 거 같은데."

"안 해본 건 아니야. 근데 안 맞더라고, 그래서 안 해. 제안은 고마운데 당연히 이번에도 안 할 거야."

"야야, 이건 달라. 내 고등학교 친구인데, 나랑 같은 회사 다니거든? 오랜만에 만나서 술 한잔 하다가, 내 대학교 때 사진 좀 보여준다고 막 넘기는데 우연히 딱 너랑 찍은 거에서 멈추는 거 있지? 얘가 사진 보더니 꼭 소개 한 번만 해달라고 하는 거야. 너를 콕 집어서 하고 싶다는 애인데 한 번 만나봐."


 원래 였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은 왠지 일하는 평일 동안 너무 힘들어서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골라서 만나고 싶다고 하니, 조금 호기심이 생긴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연락처를 받아서 다음날 점심에 마포역에서 그녀를 만났다. 쭈뼛쭈뼛 지하철 출구에 서있는 내게 그녀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 와서 말을 걸었다.


"진짜 사진이랑 똑같네. 안녕, 수진이 친구면 나랑 동갑이지? 난 강지혜야."

우리 나이 쯤 먹으면 보통 처음 만나면 다 존댓말을 하는데, 미리 동갑인 걸 알든지 말든지 상관 없이 말이다. 과하게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박창수입니다. 반갑습니다."

"갑자기 무슨 존댓말? 그럼 내가 무안하잖아. 너도 반말해. 어차피 오늘 같이 있으면서 얼마 안 가 반말하게 될 텐데."

"아, 응. 그래. 반갑다. 지혜야."

"이제 밥부터 먹자. 너 아는 곳 있어?"

"아니, 마포는 잘 안 와서."

"뭔가 그럴 거 같더라. 내가 아는 곳 있어. 일식 돈까스 좋아해?"

내가 한식 밖에 거의 안 먹긴 하지만, 유일하게 한식 만큼 좋아하는 게 일식 돈까스였다.

"응, 좋아해."

"그럼 가자. 저 쪽이야."


 처음부터 반말을 하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우리 회사의 '형'들이랑 어떻게 보면 똑같은 것인데도 왠지 싫지가 않았다. 당연한 걸까? 이건 하대하는 식이 아닌 친근한 반말이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한식이 아니면 거의 안 먹는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외국 음식인 일식 돈까스를 알고 고른 게 신기했다. 김수진도 그 정도 정보는 몰랐을 테니, 적어도 누가 알려줘서 맞혔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예전에 했던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와 다르게 지혜는 자기가 주도하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말이든, 식당이든 내가 머뭇거리면 지혜는 자기가 알아서 척척 정했다. 솔직히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이게 이성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내가 연애를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여자를 좋아하는 감정이 이게 맞는지 조금 긴가민가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예전과는 느낌이 아예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짬을 내서 지혜랑 데이트를 했다. 지혜가 다니는 회사는 우리 회사랑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혜랑 대화하고 이것저것 해보는 게 굉장히 즐거웠던 까닭이다. 데이트를 하며 지혜에 대해서 몇 가지 알게 되었다. 지혜는 나처럼 영화를 좋아했다. 또한 재즈 음악을 사모으는 게 취미였다. 그리고 먹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었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에 자신이 좋아하는 식당을 촘촘하게 정리해서 표시해두었다. 그러다보니 지혜를 만나며 내 먹성도 그 범위가 많이 넓어졌다. 지혜를 만나기 전 한식만 먹던 내가 일식과 양식, 중식까지는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지혜랑 갖가지 음식을 먹다보면, 먹는 시점에 따라 맛이 다를 수 있는 게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그 어떤 친구나 가족과 있을 때도 이보다 즐거웠던 적은 없다. 지혜는 나랑 너무 다른 사람이었지만, 가끔 보이는 공통점은 오히려 우리의 핵심적인 부분을 절묘하게 관통했다. 우연히 발견한 비슷함이 놀라웠고, 날마다 깨닫는 다름이 새로웠다. 그 때 깨달았다. 나는 지혜를 좋아하고, 더 알고 싶어한다는 것을 말이다.


 깨닫고도 나는 머뭇거렸다. 지혜는 대강 한 달 정도 기다려도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오히려 먼저 그만 질질 끌고 만나 보자고 확실하게 말을 했다. 싫을 리가 있었겠나. 바로 수락하고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조금 미안한 부분이 있다. 내가 너무 수동적이어서 지혜가 여러 모로 고생을 했다. 데이트도 여러 모로 육체적, 감정적 노동력이 소모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관계가 깊어지며 지혜에 대해서 또 새로운 사실을 몇 가지 알 수 있었다.


 지혜는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서윤이 누나처럼 부모와 의절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살가운 사이는 아닌 것이 나랑 똑같았다. 그리고 사투리를 안 써서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본가가 대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아빠와 사이가 틀어진 것도 남동생과 차별을 하고, '여자 직업' 운운하는 등의 작태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엄마랑은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만, 자기를 아버지랑 억지로 화해시키려고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고 아빠에게 종속된 엄마의 삶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기에 그렇게 좋은 감정이 있지 않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래서 자기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고, 출산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고 하였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지혜를 보니 처음 떠오른 건 서윤이 누나다. 그리고 예전부터 서윤이 누나를 보고 내가 항상 하던 생각은, 만약 내가 여자라면 나도 결혼에 대해 좋은 감정이 생기긴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었다. 누나처럼 똑똑한 사람이 여자라는 이유로 회사에서도 그 역량을 발휘하는데 한계를 느낀다고 말하는데, 만약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이유로 경력 단절이 생기고 삶의 전반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면 납득이 될까? 내가 누나라도 납득이 안 될 것이다. 지혜도 똑같았다. 지혜는 충분히 똑똑하고, 행동하는 것만 보아도 영민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지혜가 결혼과 출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국에서 서희 누나랑 얘기했던 것처럼 연애든, 결혼이든 일단 하고 싶은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혜를 만나며 내 생각은 계속 바뀌어 갔다. 내가 고통스러워 하는 회사의 관료제적 부조리도, 보라색 인간으로서의 내 정체성도 지혜는 그 핵심을 이해하고 함께 욕을 하거나 위로를 해주었다. 처음으로 만난 나에 대한 완전한 이해자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여자를 반려자로 삼고, 평생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나는 지혜와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혼은 출산과 분리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이를 근거로 설득하면 지혜에게도 결혼에 대한 이론의 여지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만난 후 2년 쯤 지나고 내가 먼저 지혜에게 집에서 같이 영화를 보다 이야기를 꺼냈다.


"지혜야, 잠깐 할 말이 있어.“

"응? 무슨 말?"

"지혜 네가 옛날에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다고 했잖아."

"그랬지."

"원래 나도 너 만나기 전에는 결혼이 아니라 연애에도 확신이 없었어. 나를 좋아해줄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 자체를 못했거든."

"이제 와서 그런 뜬 구름 잡는 얘기는 왜? 우리 지금 잘 만나고 있잖아."

"일단 들어봐. 그런데 이제 네가 너무 좋아져서 결혼이 하고 싶어. 물론 평생 이렇게 지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 너한테 위험한 사고가 나든, 어떻게 되든 나는 너의 법적인 보호자가 될 수 없잖아. 동거인에 불과하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는데, 결혼은 미안하지만 안 돼. 몇 번 말했지만 솔직히 이건 내가 예전부터 이미 답을 정해놓은 문제야."

지혜의 단호함에 나는 짐짓 놀랐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지혜의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확신은 생각 이상으로 견고했다.

"알고 있어. 강요할 생각도 없고, 그런데 들어봐. 네가 두려운 건 정확히 출산과 육아가 아니야?"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맞아. 정확히는 그게 맞긴 해.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솔직히 결혼 자체를 거부한 건 출산만 싫다고 말을 해두면 나중에 남자가 마음이 바뀌어서 출산을 하자고 강요할까봐 그런 것도 있어. 물론 창수 너를 만나고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건 충분히 알게 되긴 했어."

"그러면?"

"그래도 문제가 끝난 게 아니야. 너랑 내가 그렇게 정해도, 너희 부모님이랑 우리 부모님이 납득을 안 하실 수 있어."

"우리 결혼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게 그렇게 안 되는 거 알잖아. 나도 논리적으로는 당연히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뭐라든 그 사람들이 분명히 귀찮게 할 거란 말이야. 너희 부모님은 모르겠지만 우리 부모님은 설득의 대상이 안 돼. 말이 안 통한다고."

"그렇지만..."

"또 있어. 만약에 우리가 원하지 않는 아이가 생길 수도 있어. 피임을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실수를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그건 내가 수술을 할게. 너 못지 않게 나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이건 나도 오래 전부터 결심해둔 일이야."

"그리고 넌 내가 나중에 일을 계속 한다고 해도 평생 불만을 안 가질 자신 있어? 예를 들어 해외 법인으로 발령이 나서 떨어져 살아야 된다면?"

"네가 일을 하는 것으로 내가 불만을 가질 일은 없어. 해외로 갑자기 가면 널 못 만나서 슬프긴 하겠지만 기다릴 수 있어. 정 안 되면 차라리 내가 그만두고 재택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더라도 너한테 일을 그만두라고 말 할 일은 없을 거야."

"... 맞아. 이건 사실 물어볼 필요가 없는 일이지. 네가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 건 잘 알아. 네가 가볍게 이런 얘기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그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나한테 시간을 좀 줄래?"


 평소 지혜의 결혼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일이 최악으로 흘러가면 이별까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제시한 딩크족이라는 조건은 지혜를 설득하기에 꽤 강력한 근거가 되었던 것 같다. 이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 일이 있고 정확히 한 달이 되던 날 같이 영화를 보고 지혜네 집으로 걸어갈 때, 지혜는 고민에 대한 결론을 내놓았다.


"너라면 결혼해도 좋을 것 같아."

"그게 저번에 생각해보겠다고 한 것의 답변인 거지?"

"그래. 사실 네가 말하기 전에도 너라면 결혼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었어."

나는 그 말을 듣고 대학생 때 형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지혜를 만나고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지혜랑 결혼을 하면 어떨까 상상하기 시작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때 내가 이런 말을 했다면 미친 소리로 들렸겠지만, 대학생 때의 형서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정해진 운명 같은 건 있을 리가 없지만, 퍼즐 조각처럼 잘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다행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서, 그럼 너도 동의한 거다?"

"다만 조건이 있어. 저번에 네가 확실하게 답하지 않은 게 아직 남았어. 앞으로 결혼을 준비할 때, 우리 쪽이든 네 쪽이든 부모님과 문제가 생길 수도 있잖아? 만약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은 배제하고 우리는 부부가 될 우리 둘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기로 약속해. 설령 부모님을 못 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자신을 최우선 순위로 올리라는 조건이었다. 당연하다. 세상에 배우자보다 소중한 사람은 없으니까, 상황이 되면 내 스스로 알아서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니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무조건 네가 1순위야."

지혜가 깜빡했다는 듯 급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결혼식은 안 하고 싶어. 나는 거창하기만 하고 실속 없는 것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아."

"나도 동의해. 결혼식 같이 사람 많이 오는 건 질색이야. 심지어 부모님 친구가 대부분일 것이고."

"조건이 빡빡한데 잘 맞춰주네. 좋아."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하기로 합의했다. 결혼식을 하지 않겠다는 내 말에 우리 부모님은 노발대발하셨다. 자기가 낸 축의금이 얼마인데, 그것을 수거하지 못하는 게 말이 되냐고 속물적인 말도 대놓고 하셨다. 그리고 결혼식은 너희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서약을 하는 이벤트적 성격도 있는 것인데 너무 이기적인 결정이라고 다시 생각해볼 것을 촉구하셨다. 그런데 정말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는 결혼식은 하기 싫었다. 예식장을 예약하고, 드레스랑 턱시도를 고르고, 본식이 있는 날에는 불편한 옷을 입고 식 내내 서있고, 인사를 도는 건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났다. 결혼식이라는 문제는 지혜까지 가기도 전에 애초에 내 입장에서도 싫은 일이었다. 대화는 계속 빙빙 돌았고 지친 나는 그럼 그냥 무시하고 진행하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니 지금 협박하는 거냐며 집안에 난리가 났다.


 얼마 후 소식을 들은 누나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는 왜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은지, 어떤 결혼 생활을 하기로 합의했는지 솔직히 누나들한테 말해줬다. 그리고 이 결정이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만약 엄마랑 아버지가 누나들을 통해서 회유를 하려고 해도 바꿀 수 없다고 말이다. 뭐, 서윤이 누나는 애초에 그런 일을 시킨다고 할 사람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누나들 중 단 한 명도 내 생각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누나들이 나와 함께 아버지, 엄마를 설득해주었다. 내 성격상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것을 바꾸는 것은 더 어려울 거라며 마치 내 변호사처럼 변론을 해주었고, 아버지는 결혼을 못할 바에야 이런 식으로라도 외아들이 결혼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는지 결혼식을 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나마 찬성하셨다. 우리 엄마는 엄마답게 아버지의 행보가 정해지니 자동으로 의견을 같이 했다. 딱 하나 납득을 시키지 못한 점은 아이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건 나중에 생각이 바뀔 거라고 낙관하시는 것인지 현 시점에서는 진지하게 문제로 삼지 않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까지 설득이 불가능할 것이고 그럴 시간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혼식을 하지 않으니 이제 남은 것은 상견례뿐이었다. 딱 하나의 산이 남은 셈인데, 여기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우리는 나름 이것 하나만 넘기면 되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들 의중을 맞추고자 그럴듯한 한정식집을 예약했다. 우리는 진짜로 상견례 전에 서로의 가족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나도 약간은 긴장이 되었다. 서연이 누나 상견례 때랑 다를 거 없이, 어른들은 처음에는 인사치레를 몇 마디 주고 받더니 바로 불쾌한 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엄마가 말했다.

"사돈께서는 들으셨어요? 우리 창수한테 듣자하니 새아기랑 둘이서 아이를 안 낳기로 했다는데."

혹시 지혜는 출산에 관한 부분까지 설득을 해두었을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내가 지혜에 비해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엄마의 말을 듣고 예비 장모님이이 바로 대답했다. 

"예, 들었지요. 때가 되면 알아서 철이 들어 낳을 거라 생각하고 별 생각 안했습니다."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저는 사돈께서는 동의하신 줄 알고 혹시나 했는데 다행입니다."

예비 장인어른이 답했다.

"그럴 리가요. 평소에 결혼 안 한다고 그렇게 떼를 쓰던 지혜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일단은 알겠다고 했는데, 저는 결혼을 하면 출산이든 결혼식이든 남들 다 하는 것을 안 하는게 말이 안 된다고 봅니다."

슬슬 표정관리가 안 되었다. 양측에 오늘 상견례 때는 앞으로 알고 지내야 하니 얼굴을 익힐 겸 서로 인사하는데 집중해달라고 분명히 당부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다른 얘기를 할 수가 있는지 궁금했다. 저번에 분명히 납득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지혜 쪽 부모님과 죽이 맞기 시작하니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혜의 표정은 나 이상으로 썩어 들어갔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결혼식은 인생에 한 번 뿐인 소중한 행사인데요. 사돈, 그러면 요즘에는 아이들 의중도 배려를 해야 하니까, 작게 하는 그거 있잖습니까."

장모님이 끼어들었다.

"스몰웨딩이요?"

아버지가 답했다.

"네, 그래요. 스몰웨딩. 그거 하면 어떨까 싶네요. 다는 초대 못하더라도 중요한 지인들은 초대를 해가지고, 조촐하게 하는 거죠."

장인어른이 말했다.

"그거 참 묘안이네요. 주목 받지도 않고, 그래도 우리 체면도 살릴 수 있고 괜찮은 것 같습니다."

결혼 당사자인 우리의 의중은 이 긴 대화가 오가는 동안 단 한 마디도 묻지도 않고 이야기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내가 나서기 전에 지혜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만 좀 해! 아빠! 그리고 아버님, 창수한테 얘기 못들으셨어요?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장인어른이 곧바로 언성을 높였다.

"강지혜, 너 버릇 없게 어디서 어른들 앞에서 소리를 질러!"

"아빠가 지금 맘대로 이것저것 정하고 있잖아. 우리는 할 생각이 없는데도! 나는 정말 이번에는 아빠, 엄마를 믿었어. 어떻게 마지막에 와서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사람이 바뀌어?"

우리는 공식적으로 아직 결혼한 사이는 아니기에, 보통의 어른이라면 아직은 예비 며느리를 조심스러워하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보통의 어른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새아가, 어른들이 하라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창수한테도 결혼 전에 다시 설득을 하려고 했다만 나는 그 동안 살아오며 결혼식을 안 하는 결혼이라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이 쯤에서 납득을 하는게 어떻겠니?"

"아버님, 죄송한데요. 그럴 생각 없어요. 저는 창수랑 결혼할 생각이지. 아버님과 어머님과 결혼하는 게 아니에요. 아버님이야말로 얼굴 붉히지 말고 이 쯤에서 그만하세요."

지혜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나도 나서야 하는데, 내가 지혜를 도와줘야 하는데 나는 이 무겁고 불편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장모님이 입을 틀어막으며 연신 사과를 했다.

"아이고, 죄송해요. 사돈어른 우리 지혜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가르치겠습니다."

아버지는 지혜의 말을 듣고 얼굴이 시뻘게졌다. 삿대질을 하며 지혜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새아기 너... 너는 내가 사부인 봐서 참는 거야. 세상 어느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이렇게 대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서윤이 누나가 아버지를 비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우리 아빠는 하나도 안 바뀌었네. 서희랑 서연이 언니 장단 맞추면서 창수 장가 보낸다고 억지로 아빠랑 앉아서 밥 먹어준 내 고생이 다 헛수고가 됐네. 결국, 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엄마가 서윤이 누나 등을 탁 때렸다.

"얘, 너는 지금 낄 자리 못 낄자리 구분을 못하고!"

그렇다고 참을 서윤이 누나가 아니었다.

"아니 나는 지혜씨가 너무 불쌍해. 이 둘이 결혼하는 거고 합의를 다 해놨는데, 부모라는 사람들이 왜 감을 놔라, 배를 놔라 지적을 해대는지 이해가 안 가. 그리고 박창수, 너는 왜 한 마디도 안 해? 네 아내 될 사람이 지금 저렇게 곤경에 처해있는데?"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서윤이 누나의 말은 내 단전을 타고 수치심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렸다. 참으로 옳은 말이었다. 나는 나설 타이밍을 놓쳤다는 핑계로 지혜를 방치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또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나는 그러니까 누나, 그게 아니라..."

"됐다. 알았으면 됐어. 엄마 나 갈게. 지혜씨 부모님, 반가웠습니다. 제가 더 여기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안녕히 계세요."


 그 후로는 기억이 잘 안난다. 머리가 새하얘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다들 집에 가고 나는 지혜의 자동차에 실려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다. 메신저에는 아버지와 엄마한테 각각 연락이 와 있었다. 내용은 차이가 없었다. 당연히 당장 파혼하라는 것이었다. 뻔한 얘기지만 우리 아버지는 본인한테 대드는 며느리는 납득을 하실 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애를 낳을 거라고 당연한듯 생각하는 엄마라고 문제가 아닐 리가 없으니 말이다. 머리가 아파져 창 밖을 멍하니 보다가 문득 서윤이 누나의 말이 떠올랐다. 지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침묵을 깨고 나는 지혜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는 미안했어.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됐는데, 어쩌다보니 순간 정신을 못 차렸어."

"나중에 얘기해. 집에 내려줄테니까 남은 시간은 조용히 가자."


 그 때 더 미안하다고 빌었어야 했을까? 그랬으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우리는 일주일 정도 별 다른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딱 일주일이 지나자 그 주 주말에 만나자고 지혜한테 연락이 왔다. 만나야 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알 수 있었다. 그저 만나자는 약속을 말할 용기마저 지혜에게는 있지만 내게는 없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혜를 만나기 전에 나는 답을 가져가야 했다. 문제는 간단하다. 아버지와 엄마인가, 지혜인가 둘 중 하나다. 양자택일이었다. 결혼할 생각이 없던 사람을 거기까지 끌어낸 나라면 당연히 누구를 책임져야 할 지는 명확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명확한 문제다. 아버지와 엄마는 날 일방적으로 낳은 사람, 내가 선택한 사람이 아니지만 지혜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다. 그 둘 사이에는 분명한 질적 차이가 존재했다.


 머릿 속으로 사고실험을 했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는 몰라도 엄마를 내 삶에서 도려낼 자신이 없었다. 우리 엄마는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있어서, 엄마를 버리지 못하면 아버지로부터 해방될 수도 없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 엄마도 아빠보다는 아니더라도 지혜한테 차고 넘치게 많은 상처를 줄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내가 당하는 건 괜찮을 거 같은데, 지혜가 그런 상처를 받는 건 너무나 싫었다. 하아... 그리고 아버지도 진지하게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되자 과감하게 도려낼 자신이 없었다. 길러준 정이라는 것이 이리도 무서울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답은 명확한데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논리구조가 명확한 문제에 결단을 못 내리고 있었다. 내 이성이 고장난 것 같았다. 일주일 동안 있지도 않을 다른 방법을 궁리하다가 지혜와의 약속 장소인 마포역의 한 카페에 나갔다.


그리고 나는 결국 지혜가 원하는 대답을 주지 못해 그녀를 울리고, 실망감만 안긴 채 집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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